회차 1
"우리 서주는 이제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라,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 연우한테 맡겼다가 혹시라도 상처라도 받을까 봐, 선뜻 맡기기가 겁이 나는구나."
"할머니, 제가 서주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요. 어찌 섭섭하게 대하겠습니까?"
남연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 차갑게 식은 눈빛에 드물게 온기가 감돌았다.
서류를 손에 든 강서연은 거실에 들어서자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용암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남연우는 강서연이 회사에서 더 단단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연애 사실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업무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강서연은 남연우의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어떤 특혜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잦은 야근에 머리가 핑 돌 만큼 어지러웠고, 고객 접대를 이어가다 위출혈까지 생겼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그녀는 마치 벌거벗은 광대처럼 느껴졌다.
남연우의 아버지는 경시 정계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남시 최고 부자의 외동딸로서 서정호 어르신의 수천억 자산을 상속권을 가지고 있다.
재계와 정계의 최고 가문이 결합해 맺어진 그 부부는, 평생 두 아이만을 두었다. 바로 남연우와 그의 여동생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들 남연우는 모두가 떠받드는 존재였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얼굴 한 번 보기조차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전해지는 고통에 강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봤다.
수줍게 소파에 앉아 있는 차서주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금방이라도 물기를 머금은 듯 싱그러웠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가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7:3으로 가른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양쪽 귀 옆으로 내려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얌전한 소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청순하고 깨끗한 미모에 말도 많지 않았다.
남연우는 차서주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때때로 귓속말을 나누었다.
차서주의 얼굴에 피어 오른 홍조와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강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씨 가문에서도 남연우에게 여러 차례 맞선을 주선했지만, 그는 형식적으로 자리에만 응할 뿐이었다. 대개는 3~5일쯤 지나면 더 이상 연락조차 이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이 달랐다.
남연우의 다리 위에 하얀색 곱슬머리 강아지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털이 긴 동물을 싫어했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강서연은 남연우의 생일 선물로 얌전하고 예쁜 랙돌 고양이를 선물했다.
하지만 남연우는 고양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강서연에게 당장 고양이를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동물을 집에 데려오면 함께 쫓아낼 것이라고 했다.
지금, 차서주의 강아지는 남연우의 다리 위에서 혀를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편안한 기색이었다. 남연우는 마디가 또렷한 손가락으로 그 등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그 촉감을 즐기는 듯했다.
강서연의 시선이 깊어지며, 차서주를 뜯어보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남연우와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이 따로 없다고 느껴질 만큼이었다.
강서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수많은 바늘이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남연우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서류를 건네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목소리는 최대한 낮추고 차분하게 눌러 담았다. "공급사 쪽에서 계약서를 받아야 발주가 가능합니다. 더 늦어지면 납기에 차질이 생깁니다."
남연우는 뒤로 물러서며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서류를 움켜쥔 강서연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회장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 메시지도 답이 없으셔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연우 오빠, 이분은 누구세요?" 차서주가 고개를 내밀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서연을 쳐다봤다.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저는 남씨 그룹 홍보팀 부장 강서연입니다." 강서연은 차서주를 향해 싱긋 웃으며 다시 남연우를 돌아보고 업무를 보고했다.
"이번 주말 저녁, 임씨 그룹 이사장의 외아들이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장소는…"
강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연우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끊었다. "네가 대신 가. 난 그날 시간 없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미숙 노부인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연우야, 앞으로 일거리는 집으로 가져오지 마라. 외부인이 함부로 남씨 저택을 드나들게 해서야 되겠니? 네 아버지가 알면 또 너를 꾸짖을 게다."
노부인은 장인이 수놓은 치파오에 제왕록 비취 장신구를 세트로 갖춰 착용하고 있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연스러운 위엄이 실려 있었다.
남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할머니. 아랫사람이 눈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다시는 들이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강서연은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남연우는 회사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남씨 저택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출장 가기 전까지 그녀와 꿀이 떨어지던 남연우는 지금 한 노부인이 말하는 '외부인'이라는 말을 묵인했다.
남연우는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빠르게 서명하고 강서연에게 던진 다음, 물티슈로 손을 깨끗하게 닦았다.
"앞으로 나를 못 찾으면, 서류는 정문 경비실에 맡겨."
강서연은 확신하지 못했다. "중요 서류도 말씀이십니까?"
남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꾸짖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네."
한미숙은 강서연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눈빛에 지나치게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내 그녀는 남연우를 향해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일렀다. "일 얘기만 하지 말고, 서주 좀 챙겨라."
남연우는 시선을 거두고 탁자 위에 놓인 떡을 집어 차서주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이것 좀 먹고 있어. 금방 식사 준비될 거야."
남연우의 다정한 행동을 지켜보는 강서연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이 고풍스럽고 위엄 있는 저택에서, 자신만이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회차 2
차서주는 수줍게 몸을 피하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떡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떡을 먹을 때, 그녀의 입가에 떡 부스러기가 묻었다.
남연우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휴지를 사이에 둔 채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스쳤지만, 결벽증이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어때?" 남연우가 차서주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차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서연은 남연우의 시선이 차서주에게 고정된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몇 달 전, 그녀는 거래처와 술을 마시다 위 천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강서연은 2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그 사이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그동안 남연우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면 늘 바쁘다는 말뿐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다른 여자가 배고플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까지 직접 닦아주고 있었다.
강서연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얼굴에는 내색하지 않았다.
차서주는 강서연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연우 오빠가 처음으로 저를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라, 제가 긴장할까 봐 특별히 신경 써주는 거예요. 강서연 씨, 오해하지 마세요."
남연우의 가족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서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그녀는 차서주와 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날 그녀는 남연우의 어머니 서윤서의 비아냥을 반나절이나 들어야 했고, 할머니의 부름에 따라 커피를 내오고 물을 따르며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쁘게 움직인 뒤에야, 겨우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는 한미숙이 했던 말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클럽에서 술이나 따르던 여자가, 감히 남씨 가문이라는 동아줄을 잡으려 하다니. 분수를 모르는군."
그 이후로 그녀는 남씨 저택에 거의 오지 않았다.
오늘 계약이 급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남씨 가문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차서주는 그녀와 달랐다.
차서주는 연성 보석 재벌 차현준의 딸로, 인품이 고귀하고 가문 또한 흠잡을 데 없었다. 당연히 남연우의 손에서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차서주 씨, 그런 말씀 마세요." 강서연은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남연우의 곁에 있었지만, 그의 보호를 받은 적도 없었고, 보살핌을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
다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최소한 그 사실만큼은 미리 알려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집착하며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강서연은 마음이 불편해 잠시 감정을 조절할 곳을 찾고 싶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복도에서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곧게 뻗은 체격과 고귀하면서도 냉랭한 분위기,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남연우의 검은색 셔츠에는 강아지 털이 가득 묻어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벽에 기대선 그의 차가운 눈빛이 강서연을 쏘아보았다. "서주한테는 좀 공손하게 대해."
강서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되물었다. "어떻게 공손하게 대하면 되나요?"
남연우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그 눈빛 속에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고집을 읽어냈다.
그는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리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귀 옆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통통한 귓불을 가볍게 만지며 내려왔다.
"서주는 너와 달라. 깨끗한 아이야.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서씨 그룹 홍보팀 부장 자리까지 올라온 강서연에게도 나름의 방식과 수단은 있었다.
남연우의 곁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자들은 대부분 강서연이 해결했다. 그래서 남연우는 그녀에게 경고하러 온 것이다.
그는 그녀가 차서주를 건드릴까 봐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 자체는 상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서주가 자신과는 다르고, 깨끗한 아이라는 남연우의 말은 달랐다. 그 말은 그녀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제가 깨끗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강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직업 때문이요?"
남연우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내일 서주가 회사에 출근할 거야. 정수연한테 잘 가르치라고 해."
정수연은 강서연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남연우의 비서실 팀장이었다.
대표이사실은 홍보팀과 달리, 남연우의 날개 아래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강서연은 홍보팀에서 일하는 동안, 음흉한 속내를 품은 남자들을 수없이 마주해야 했다.
그들은 교활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회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마다 심신이 녹초가 되었고, 술을 강요하거나 집요하게 들러붙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도 지쳐 있었다.
그녀는 한때 남연우에게 대표이사실로 옮겨, 비교적 부담이 덜한 비서 업무를 맡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연우의 대답은 늘 같았다. "홍보팀은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야. 내가 너를 믿으니까 그 자리에 앉힌 거야."
하지만 차서주가 회사에 출근하게 되자, 남연우는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조금도 고생시키지 않으려 했다.
사람들은 강서연이 홍보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깔보고 무시했지만, 왜 그녀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강서연은 눈을 내리깔고 모든 생각을 숨긴 채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차서주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건가요?"
남연우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강서연은 마음 깊숙한 곳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남씨 저택이라는 것도 잊은 채, 강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는요? 저는 그동안 뭐였던 거죠?"
남연우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과 똑같아."
사람들 앞에서는 유능한 홍보팀 부장으로, 사람들 뒤에서는 배려심 많고 눈치 빠른 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공개하지 않겠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위해서였다는 거였구나.'
강서연은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주먹을 세게 움켜쥔 채 고개를 저었다. "남연우 씨, 저는 그렇게 천박한 사람이 아니에요. 만약 차서주 씨랑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면, 우리 헤어져요."
회차 3
강서연이 남연우의 집을 나서려 할 때, 남연우의 아버지 남회성과 마주쳤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 뒤, 예의 바르게 자리를 떠났다.
재킷 차림의 남회성은 남연우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동 조심해. 차씨 가문은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밖에서 어슬렁대는 쓸모없는 여자들은 당장 정리하고."
남연우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강서연은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정수연을 마주쳤다.
정수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연아, 남연우 그 자식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너한테 이럴 수가 있어?"
하룻밤 사이, 남씨 가문이 미래의 며느리를 초대해 연회를 열었다는 소식은 상류층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무 일도 아니야."
강서연은 태연한 얼굴로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며 덧붙였다. "차서주가 오늘 대표이사 비서실에 출근한대. 내가 직접 안내해야 해."
"남연우가 차서주를 대표이사 비서실에 낙하산으로 꽂았다고?"
정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그렇게 부탁할 때도 안 들어주더니, 이제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네. 네가 그동안 얼마나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는데. 남연우는 너한테 미안하지도 않은 거야?"
4년 전부터 남연우의 곁에서 일하기 시작한 강서연은 홍보팀에서 몇 년 동안 고생한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서씨 그룹의 다수 원로 주주들은 남씨 성을 가진 외부인인 남연우가 서씨 그룹의 거대한 가업을 물려받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드러내지 않게 훼방을 놓아 왔다.
홍보팀 부장으로 재직하는 몇 년 동안, 강서연은 남연우를 위해 최상급 프로젝트를 여러 건 성사시켰다.
그중 어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이력서를 빛내기에 충분했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동안 수차례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지만,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강서연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서씨 그룹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강서연은 서윤서가 약속한 것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내고, 자신의 체면을 무참히 짓밟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4년 전, 소꿉친구였던 진서준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그때 서윤서는, 강서연이 남연우의 곁에 남아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면 진서준의 주소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 하나에 의지해, 그녀는 지금까지 버텨 올 수 있었다.
강서연은 진서준과 함께 자랐다. 그는 그녀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야 했다.
정수연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앞뒤를 가리지 않고 소리쳤다. "확 사표를 던지고 그 배은망덕한 개자식, 차버려!"
강서연은 자리에 멈춰 서더니 정수연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수연아, 입 조심해. 벽에도 귀가 있어."
남씨 가문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가문이었다.
정수연은 의분에 차서 쏘아붙였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회사에서 네가 남연우의 진짜 여자친구라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관계를 공개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이제는 대놓고 다른 여자를 데려와 너를 이렇게 모욕하잖아. 아직도 안 정리하고 뭐 하자는 거야? 나중엔 걔랑 그 여자까지 네가 먹여 살리게 할 셈이야?"
강서연이 말조심하라며 정수연을 말리려던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여러 사람이 차서주를 둘러싸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침부터 한가하게 수다나 떨고 있어? 일하기 싫어?"
"강 부장님, 안녕하세요." 차서주는 눈웃음을 치며 강서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남연우의 경고 때문에 강서연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녀는 정수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 팀장, 차서주 씨는 대표이사 비서실로 안내해 주세요."
정수연은 차서주를 흘깃 바라보며 상사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냈다.
"따라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서주는 미안한 얼굴로 정수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 "연우가 제 물건을 가지러 갔어요.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정수연은 입을 벌린 채 강서연을 돌아봤다. '남연우가 차서주를 위해 직접 사무용품을 챙겨 오겠다고? 강서연은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강서연은 눈을 한 번 깜박이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네. 그럼 저 먼저 일하러 갈게요."
"잠깐, 내 방으로 와. 지시할 게 있어."
남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서연은 자리에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봤다.
남연우는 손에 든 상자를 정수연에게 건네고 차서주에게 당부했다. "먼저 가 있어. 혼자 다니지 말고."
정수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차서주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정수연을 따라 떠났다.
강서연은 남연우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 프로젝트 팀이랑 같이 남성 개발지구에 다녀와."
사무실로 들어선 남연우는 재킷 단추를 풀더니, 재킷을 벗어 강서연에게 건넸다.
강서연은 남연우의 재킷에서 은은한 감귤 향을 맡았다. 그녀는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차서주의 몸에서도 같은 향을 맡았다.
강서연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감정을 정리하고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프로젝트 팀에서 연락이 왔어. 남풍로에 아직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집이 하나 있대. 네가 가서 처리해. 예산은 6억 원이야."
남연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은 기색을 내비쳤다.
강서연은 '남풍로'라는 세 글자를 듣고 숨을 멈췄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고아원은 남풍로에 있었다.
김 원장님은 이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이었고, 그곳은 그녀에게 유일한 집과도 같은 곳이었다.
남연우는 그녀가 여전히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할 말 있어?"
강서연은 숨을 잠시 멈췄다가, 책상 앞에 다시 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풍로 철거 건... 재고해 주실 수 없습니까? 거기가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