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눈부신 네온사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군용 지프차 몇 대가 연달아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독특한 문양으로 장식된 번호판과 눈에 띄는 휘장은 군용 지프차에 탄 사람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골목을 달리던 차가 유난히 밝은 조명인 행운 술집 앞에 멈춰 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에 고정되었다.
군용 지프차 문이 열리며 다시 닫히는 소리는 마치 하늘에 총을 쏘는 소리만큼 날카로웠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휘장이 잔뜩 걸린 군복을 입고 있었고, 엄숙하게 가라앉은 낯빛은 요란하게 번쩍이는 조명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한 조명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며 무겁게 내려앉은 얼굴이 더욱 짙게 일그러졌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세가 활기찬 음악 소리와 끈적하게 엉켜있는 사람들을 뚫고 느껴질 정도였다.
카운터에서 바텐더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장난을 치고 있던 손국동은 군복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자가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모습에 손국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재빠르게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달려갔다.
"박, 박 도련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남자의 압도적인 기운을 느낀 손국동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미간이 조금 더 좁아진 남자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권한별은 어디 있지?"
"그, 한별 누나는 지금쯤 집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린 손국동은 최대한 평온한 척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남자는 손국동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최고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덧붙였다. "내가 왔다고 전해줘. 30초 줄게."
더 이상의 거짓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손국동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휴대폰을 꺼내 남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권한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울려도 권한별이 전화를 받지 않자 카톡을 열어 다급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별 누나, 누나 남편이 누나를 잡으러 왔어요. 지금 엘리베이터 안이에요"
손국동이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도,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남자의 싸늘하게 식은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손국동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자는 더 캐묻지 않고 그대로 VIP 룸으로 향했다. 초조한 얼굴로 남자의 뒤를 따라나선 손국동은 차마 남자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해결책을 찾아 헤맸다.
남자가 VIP 룸 앞에 멈춰 서자 손국동은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별 누나 여기 없어요. 정말이에요."
"마지막 기회야. 네가 직접 열래? 아니면 내가 이 문을 깨부술까?"
"제발 제 말 좀 믿어 주세요. 누나 정말..." "셋."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제가 열겠습니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방 키를 더듬은 손국동은 마음속으로 권한별에게 사과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필경 박씨 가문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가늘게 뜬 남자의 안색이 더욱 거칠게 일그러졌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본 손국동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뒤돌아서더니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다시 방안을 관찰했다.
방안에는 붉은색의 슬립을 입은 권한별이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고,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발가벗은 채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두 남자의 등에 가득 난 상처만 보아도, 세 사람이 조금 전까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위압적인 기세로 나타난 남자의 등장에 두 사람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움직이지 못했다.
도리어 천천히 눈을 뜬 권한별은 남자를 발견하고 차갑게 비웃었다.
매혹적으로 치켜 뜬 눈에 남자를 흘겨본 그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놀리듯 비아냥거렸다. "겁먹을 필요 없어. 간통 잡으러 온 경찰도 아니고. 내가 직접 소개할게. 이 사람은 내 남편, 박씨 가문의 후계자 박우빈. 다들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야."
말을 마친 권한별은 확연히 굳은 박우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롱하듯이 입을 열었다. "바쁘신 박 도련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세요? 아까운 시간을 우리한테 낭비하는 대신, 애인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잔뜩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긴 박운빈이 그녀의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더니 입 꼬리만 끌어올렸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회차 2
눈에 띄게 긴장한 두 남자는 그가 박씨 가문의 후계자인 박우빈이라는 말에 더욱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눈을 살짝 아래로 뜬 권한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억누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우리 도련님은 취향도 고급스러워. 두 사람, 도련님께서 흥 깨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고개를 옆으로 돌린 권한별은 박우빈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우빈 씨도 이번 기회에 잘 배워야 할 거예요. 두 사람 테크닉이 어찌나 부드럽고 훌륭한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어요. 당신의 거친 손길과는 완전히 다르죠. 난 그래도 참을 수 있었는데, 당신의 가녀린 애인은 결코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권한별을 노려본 박우빈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곧바로 매캐한 연기가 주위에 피어 오르며, 그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해갔다.
권한별은 박우빈의 무심한 태도에 짜증이 치밀었다. 마치 그녀의 말에 상처받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남자가 상처받을 리 있겠는가?
결국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권한별이 망부석처럼 서 있는 남자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뭘 기다리고 있어? 박 도련님이 보고 싶다고 하잖아. 너희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한 수 가르쳐 줘."
말을 마친 권한별은 얇은 슬립의 어깨 끈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도리어 권한별의 곁에 선 무명 배우가 화들짝 놀라며 박우빈의 눈치를 살폈다. 박우빈의 날카로운 눈빛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감았다.
"한별 누나, 저... 아님, 저희 먼저 나갈게요."
이후 무명 배우 두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으려 했으나, 권한별의 눈빛에 다시 자리에 얼어붙어야만 했다.
"왜 다들 겁먹은 얼굴이야? 그럴 필요 없어."
권한별이 다시 박우빈을 돌아보자, 군용 외투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더니 정확히 그녀의 상체를 덮어 시야까지 가리게 만들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그녀가 외투를 벗어 던지기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어깨에 들어 올리는 것이다.
"박우빈 씨,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두꺼운 외투를 뚫고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비록 외투에 얼굴이 가려 박우빈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그의 서슬 퍼런 눈빛에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오른손으로 권한별의 허리를 낚아챈 그가 왼손에 들린 담배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모델의 등에 그대로 눌러버렸다. 동시에 걸음을 옮겨 신인 배우의 무릎을 발로 걷어차자, 날카로운 비명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손국동이 빠르게 달려와 애원했다. "박 도련님, 싸우면 안 돼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말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요?"
"꺼져." 박우빈의 섬뜩하게 깔린 목소리에 손국동은 두려움에 떨며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참견할 수 없었던 그는 박우빈이 권한별을 차에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굉음을 내며 빠르게 멀어지는 군용 지프차는 주인의 화난 심정을 그대로 보여줬다.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하게 펴진 이불에 내팽개쳐진 권한별은 술이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후 단 한 번도 같이 밤을 보낸 적 없는 신혼방이 눈에 들어왔다. 씁쓸한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며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두 사람이 결혼한지 3년이 지났지만, 평범한 부부라고 말할 수 없는 사이에 가까웠다. 박우빈이 휴가를 받고 나오는 날이면, 아무리 싸웠어도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자리를 했었다. 그러나 각방을 쓰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신혼방은 그저 이름만 존재한 방일 뿐이다.
박우빈은 이러한 금기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처럼 잔뜩 흥분한 채 그녀를 신혼방에 데려와 침대에 내던졌다.
"박우빈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권한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눈이 빨개진 박운빈이 몸을 덮쳐왔다.
"내가 뭘 하려는지 정말 모르겠어?" 이를 악물고 대답한 그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몸에 걸친 얇은 슬립을 벗겨냈다.
"권한별, 내가 침대에서 부드럽지 못하다고 했지?" 박운빈은 차갑게 웃더니 그녀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연신 뜨거운 숨결을 뿜었다. "부드러운 정사가 어떤 건지 오늘 똑똑히 느끼게 해줄게."
박우빈의 품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버둥거리던 권한별은 그의 욕정을 더욱 불러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벌을 주듯 귓불을 부드럽게 핥은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뜨거운 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
"권한별, 유부녀라는 사실 잊지 마."
그때, 박우빈의 휴대폰 벨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를 무시하려 했으나,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소리에 하는 수 없이 꺼내 확인해야만 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의 안색을 살핀 권한별은 차갑게 비웃으며 그의 휴대폰 화면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예상대로 발신자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하." 차갑게 실소를 터뜨린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당신도 유부남이라는 사실 잊지 않길 바라요."
눈을 깜박인 박우빈이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권한별은 이미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나래 씨, 안녕하세요."
정나래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적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권한별 씨, 오랜만이에요."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말까지 더듬었다.
박우빈이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한 것을 본 권한별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네, 저 권한별이에요. 우빈 씨 지금 바빠요. 부부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지금은 나래 씨 전화를 받지 못할 것 같네요."
회차 3
권한별의 말에 겁이라도 먹은 걸까, 한참이 지나도 정나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권한별이 또다시 과감하게 비난하려던 찰나, 박우빈이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 들더니 강하게 입을 맞추며 침대에 눕히는 것이다.
박우빈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정사를 약속한 그는 권한별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할 때까지 밤새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쓰러지듯이 잠든 그녀는 눈을 뜨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박우빈이 새벽쯤에 침실을 나서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땐 이미 다음날이었다. 신혼방에서 깨어난 그녀가 잠깐 멍을 때리는 것 같더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커튼 때문에 새벽인지 아침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전날 밤의 희열로 몸 곳곳이 뻐근한 것을 느낀 그녀가 팔을 뻗어 휴대폰을 더듬었다. 인스타그램을 열자 정나래가 새로운 게시물을 업로드 한 것이다. 남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지만, 권한별은 그 남자가 박우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낀 그녀가 휴대폰을 벽에 세게 내던졌다.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은 액정조차 깨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빌어먹을.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에, 바람둥이 남편까지. 아주 끼리끼리네."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은 그녀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옆으로 던지며 자리에 선 그녀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남자가 애인 집까지 찾아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용서할 수 없었다.
정나래는 그녀에게 도발하기 위해 사진을 업로드 한 것이 틀림없다.
그때, 고용인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도련님의 지시로 해장국을 끓여 놨어요."
아직 화를 억누르지 못한 권한별은 박우빈이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용인에게 해장국을 끓이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마음속에서 피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해장국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문 하나를 사이 두고 선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사모님을 위해 약도 준비해 두었어요. 내려와서 약이라도 드시겠어요?"
고개를 갸웃한 권한별이 문을 살짝 열고 물었다. "무슨 약이죠?"
"저, 피임약인 것 같았어요..." 권한별의 눈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아주머니가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박우빈이 직접 피임약을 준비했다는 말에 권한별은 마지막 남은 이성이 끊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참으면 그녀는 호구로 몰릴 것이다.
아직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던 권한별은 지난 3년 동안, 박우빈의 의지와 상관없이 꾸준히 피임약을 복용했었다.
그건 그거고. 박우빈이 이렇게 피임을 강요한 것은 또 다른 문제지.
"싫어요. 아이를 임신하면 낳아야죠. 쌍둥이든, 세 쌍둥이든 낳아서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예요!" 권한별은 거의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문을 쾅 하고 닫는 소리가 저택에 크게 울려 퍼졌다.
고용인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확인한 그녀는 서랍을 뒤지며 이전에 사둔 피임약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이는 반드시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태어나야 한다.
다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운 그녀는 한참이나 뒤척거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박우빈과 정나래를 저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나래와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박우빈이 갑작스럽게 부대에서 나올 일도 없을 텐데, 정나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권한별의 추측은 근거 없는 의심이 아니었다. 박우빈이 급하게 휴가를 신청한 것은 정나래와 관련된 일이 맞았다.
부대를 나서자마자 권한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권한별이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아 조사한 결과, 그녀가 무명 배우 두 명과 술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과 함께 술집을 찾아 나선 것이다. 권한별을 잡아 혼을 내준 후 다시 정나래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권한별이 침대에 편하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 박우빈은 정나래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가벼운 빈혈 증상 외에 모두 정상이네요. 이분은 남편인가요?"
의사의 질문에 정나래는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박우빈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선생님, 앞으로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던가 먹지 말아야 할 음식 같은 건 없나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은 그는 정나래의 체면을 최대한 봐주려는 듯했다.
"갑각류는 최대한 피하는 게 좋고, 과식은 금물이에요. 입덧하는 중이니, 최대한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해 주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우빈은 작게 안도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산부인과를 나선 두 사람은 나란히 병원 밖으로 나왔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는 정나래의 얼굴에는 곧 엄마가 된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피어 올랐다.
박우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래야."
"오빠, 아기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정나래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며 박우빈은 차마 말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나래야, 아이 지우자."
"싫어요!" 정나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가 애원하듯이 간청했다. "오빠, 나 이 아이 낳고 싶어요. 제발 낳게 해줘요. 아이 낳고 저 혼자 잘 키울 수 있어요..."
"내 허락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권한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나래의 가녀린 목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병원 로비 모퉁이에 기대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권한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박우빈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정나래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