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곽요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무릎 위에 얹힌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은 뜨거웠고 임가연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말해 봐, 이 남편이 화 풀어줄 테니."
임가연은 고개를 숙여 잘생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연기 참 잘하네.'
그의 연기력만 놓고 보면 오스카상도 아깝지 않을 판이었다.
임가연이 손을 빼려는 순간, 티 테이블 위에 놓인 곽요한의 휴대폰 화면이 번쩍 밝아지며 카톡 알림이 하나 떴다.
저장된 이름은 [재무부 채아]였다.
간단한 몇 글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유난히도 눈에 가시처럼 박혔다.
이어 전송된 사진 썸네일은 작았으나, 임가연의 시력은 워낙 예리한 터라, 단번에 알아챘다.
임채아가 레이스 잠옷을 곱게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찍은 셀카였다.
카메라 앵글은 교묘하게도 입술을 깨문 듯한 야릇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형부, 새 잠옷인데 예뻐요?]
곽요한도 그 내용을 분명 확인했다.
그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임가연의 손을 내던지듯 놓아 버리고는 휴대폰을 낚아채 허둥지둥 테이블에 엎어두었다.
임가연은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비스듬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곽요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연아,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시스템이 다운 돼서 빨리 가서 처리해야 해." 휴대폰을 움켜쥔 그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렸고 임가연과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전혀 없는 듯했다.
그 말에 임가연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시스템 다운이라고? 참으로 엉터리 변명이네.'
임가연은 세계 정상급 해커였고 곽씨 그룹 시스템의 절반을 직접 설계한 장본인이다. 핵 공격도 뚫지 못할 방화벽이 다운됐다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애인과의 밀회를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겠지.'
"그렇게 급해?" 임가연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응, 지금 당장 안 가면 내일 주가가 폭락할지도 몰라."
그는 몸에 맺힌 물방울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서둘러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아마 밤새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곽요한은 깔끔한 옷을 차려 입고, 현관에 선 채로 무심하게 손만 흔들었다.
"나 갔다 올게. 집에 얌전히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쳤다.
임가연은 적막한 거실에 앉아 마당에서 엔진 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휴대폰 전원을 켜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알림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곽요한이 건 것이었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저렇게 애틋한 척 하는 거지?'
임가연은 주소록을 열어 한 번호를 찾아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바로 응답이 돌아왔다.
"큰 아가씨?"
그녀는 몸을 일으켜 통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곽요한의 차량 후미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그녀의 눈빛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완전히 얼어붙었다.
"상철 아저씨, 장부 조사 좀 부탁 드려요." 잠시 침묵한 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곽씨 그룹의 지난 2년간 모든 자금 흐름, 특히 임채아 명의로 이체된 모든 내역을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조사해 주세요."
곽요한이 먼저 자신을 배신한 이상, 임가연은 그의 모든 것을 한 푼도 남김없이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상철 아저씨는 과거 임씨 그룹의 법률고문으로 그녀가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흔쾌히 승낙하자, 임가연은 만족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곽요한을 떠나기 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다음 날 저녁, 임가연은 수수한 차림으로 부두 근처의 사적인 경매장에 들어섰다.
아버지 유품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열다섯 살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 임씨 그룹의 재산은 모두 경매로 넘어갔고, 그녀는 수년간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몇몇 유품만 되찾을 수 있었다.
이번 경매 목록에 비취 배추 조각상이 올라와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그녀의 생일 선물로 사 두었던 보물이다.
투명도는 아이스 단계에 이르렀고, 배춧잎의 녹색은 생기가 가득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아버지가 그 조각상을 들고 활짝 웃으시던 모습이 스치자 임가연은 눈을 감으며 단호히 다짐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낙찰 받아야 해.'
그녀가 중간 좌석에 앉아 천천히 도록을 넘기던 그때, 옆자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비 목걸이는 마음에 안 들어? 또 원하는 게 있어?"
곽요한이었다.
"에이, 내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생일 선물은 내가 직접 고를래요."
임가연이 고개를 들어 곽요한과 시선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임채아는 다정하게 곽요한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회차 3
곽요한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리더니, 거의 본능적으로 임채아에게 붙잡혀 있던 자신의 팔을 황급히 빼냈다.
"가연아, 너에게 문자 보냈는데 답도 없더니 나한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불쑥 나타난 거야?"
'서프라이즈? 오히려 경악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임가연은 그가 연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후에 볼 일이 좀 있어서 휴대폰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어."
그 말에 곽요한은 속으로 깊이 안도한 듯, 재빨리 그녀 곁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날씨가 추운데 이렇게 얇은 옷만 입고 다니면 어떡해. 내가 걱정 되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장 직원을 불러 담요를 가져오게 한 뒤,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임가연이 조용히 관찰하는 사이에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임채아에게로 향했다.
임채아는 그 시선에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곧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
그리고는 아무일 없다는 듯 임가연과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곽요한은 임가연의 귀밑머리를 살며시 정리해 주며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동생이 최근 대형 프로젝트를 몇 개나 성사시켜서 내가 보상으로 생일선물을 사주겠다고 약속했어."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임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연아, 화난 거 아니지?"
그때 임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언니,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하다면 자리를 비켜줄게."
임가연은 담요 끝자락을 정돈하며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불편할 게 뭐 있어. 요한 씨가 네 형부인데 챙겨주는 게 당연하지. 그냥 우리 부부가 너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라 생각해."
결혼증명서가 가짜라 한들, 현재 곽요한의 공식적인 아내는 자신이고, 임채아는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내연녀에 불과했다.
경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곽요한은 초반에 주얼리 세트를 낙찰 받아 임가연에게 선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채아는 더는 참지 못했는지,의자 아래로 새끼손가락을 뻗어 곽요한의 손을 살짝 걸었다.
곽요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 손가락을 잠시 감쌌다가 놓았다.
임가연은 그 모습을 보고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양다리 전문가가 따로 없네.'
예전에 임가연과 임채아는 경성 사교계에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자매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비록 임씨 가문이 몰락했지만 그녀와 임채아는 어디를 가나 시선을 끄는 존재였다.
그런데 곽요한이 이렇게 뻔뻔하게 두 여자를 동시에 차지하며 양다리를 걸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임가연은 곽요한에게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관계가 자신의 감정이나 이익에 진정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때 해야 할 일은 용감하게 판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여러분. 다음은 이번 경매의 마지막 출품작입니다. 천연 비취로 정교하게 조각한 배추로, 질감이 매우 섬세할 뿐 아니라 비취 특유의 결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시작가는 4억 원입니다."
그 말에 임가연의 시선이 순간 단호해졌다. 아버지의 유품인 이 비취 조각상 만큼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20번 분께서 5억 2천만 원을 호가하셨습니다! 더 오르실 분 계십니까?"
호가가 마무리되려는 순간, 임가연이 번호판을 번쩍 들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7억 원."
갑작스러운 고가에 경매장 안이 순간적으로 술렁였다. 비취 시장의 암묵적인 룰을 깬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게다가 임가연이 제시한 가격은 시작가보다 훨씬 높았고, 현장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이 비취 조각상을 꼭 갖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입찰하는 사람은 없었다.
"7번 분께서 7억원을 호가하셨습니다! 더 오르실 분 계십니까?"
"7억 원 한 번! 7억 원 두 번!"
경매사의 망치가 공중에 떠오른 순간,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경매장을 가르며 터져 나왔다.
"7억 2천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