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5년 전, 나는 평창의 설산에서 약혼자의 목숨을 구했다.
그날의 추락은 내게 영구적인 시각 장애를 남겼다.
내 완벽했던 시력을 포기하고 그를 선택했던 그날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잔상처럼.
그는 내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절친 오윤서가 춥다고 불평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평창 결혼식을 몰래 부산으로 바꿔버렸다.
나는 그가 내 희생을 "감성팔이"라 부르는 것을 엿들었고, 내 드레스는 비웃으며 그녀에게 6천만 원짜리 드레스를 사주는 것을 지켜봤다.
결혼식 당일, 그는 제단에 홀로 서 있는 나를 버려두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시작된 오윤서의 "공황 발작"을 돌보기 위해 달려갔다.
그는 내가 용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는 내 희생을 선물이 아닌, 나의 복종을 보장하는 계약서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마침내 그가 텅 빈 부산의 예식장에서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입을 열기 전 그가 설산의 바람 소리와 예배당의 종소리를 똑똑히 듣게 해주었다.
"내 결혼식이 곧 시작될 거야."
내가 말했다.
"네 결혼식이 아니라."
제1화
서주아 POV:
내 약혼자는 그의 절친 오윤서가 평창은 너무 춥다고 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세상 전부를 의미했던 결혼식 장소를 부산으로 바꿔버렸다.
나는 강태준의 사모펀드 회사 로비, 커다란 화분 뒤에 숨어 서 있었다.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숨이 턱 막혔고, 내 손에 들려 있던 평창 예배당의 정교한 건축 설계도는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지난 5년간, 평창은 우리만의 성역이었다.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가 담긴 증거였다.
암벽 등반 중 끔찍한 사고로 낡은 밧줄에 매달려 있던 태준을 내가 발견했던, 눈 덮인 절벽.
필사적으로 그를 구하려다 추락하여 만성적인 신경학적 시각 장애를 얻게 된 바로 그곳.
때때로 세상의 경계가 아른거리며 흐릿하게 보이는, 내 완벽했던 시력과 그의 목숨을 맞바꾼 그날의 영원한 증표.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부산과 맞바꾸려 하고 있었다. 오윤서를 위해서.
회의실 유리 벽 너머로 그가 보였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특유의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최진혁이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너 미쳤냐?"
진혁의 목소리가 낮게 웅얼거려 간신히 들렸다.
"아직 주아 씨한테 말 안 했다고?"
태준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시선은 스크롤하고 있는 휴대폰에 고정한 채였다.
"말할 거야. 괜찮아, 걔."
"괜찮다고? 태준아, 그 여자 바인더를 갖고 다녀. 우리 지난 분기 보고서보다 두꺼운 바인더. 1년 내내 평창 결혼식만 계획했다고. 그건… 알잖아… 걔한테는 전부야."
"결혼식이지, 무슨 우주선 발사냐?"
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에 섞인 짜증이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나를 찔렀다.
"그깟 산 타령하는 감성팔이도… 이제 지겹다. 그리고 부산이 훨씬 낫지. 파티 분위기 나고."
"윤서 파티겠지."
진혁이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말을 정정했다.
"고도가 높아서 힘들다고 징징대던데."
"추우면 천식이 도져."
태준의 말투가 부드럽게 변했다. 내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따뜻한 공기가 필요해."
"아, 그러셔. '천식'."
진혁이 손으로 따옴표를 그리며 비꼬았다.
"크로아티아 요트 파티 때는 멀쩡했던 그 천식 말이야?"
"그거랑은 달라."
"오윤서랑 엮이면 항상 뭐가 다르지."
진혁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진짜 다 바꾸는 거야? 걔 때문에?"
"걔 때문에 바꾸는 거 아니야."
태준이 마침내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며 쏘아붙였다.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부산이 더 재밌으니까 바꾸는 거라고. 분위기가 더 좋잖아. 주아도 이해할 거야."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아도 이해할 거야.
그것이 우리 관계를 요약하는 한 문장이었다.
늘 믿음직하고, 이해심 많고, 주기만 하고 바라는 건 없는 서주아.
그의 목숨을 구하고 그 흉터를 평생 안고 살아가는 동안, 그는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약혼녀잖아. 날 사랑한다고."
태준이 말을 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다시 떠올랐다.
"내가 어디에 있든 행복해할 거야. 그게 우리 사이의 약속 같은 거니까. 산에서 증명했잖아."
그의 말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그는 내 희생을 선물이 아니라 계약으로 보고 있었다. 나의 복종을 보장하는, 깨뜨릴 수 없는 계약서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태준의 얼굴이 환해지며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태준 씨, 자기야!"
오윤서의 가증스럽게 달콤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거 구했어?"
진혁이 연극이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기울였다.
"당연히 구했지."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몇 년 동안 내게는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목소리였다.
"널 기다리고 있어."
"어머, 세상에, 자기는 진짜 최고야. 키스해주고 싶어!"
그녀가 꺅 소리를 질렀다.
"그 발렌티노? 우리 같이 봤던 거? 하얀색?"
내 피가 차갑게 식었다. 하얀색.
"바로 그거."
태준이 확인시켜 주었다.
"파리에서 직접 공수해왔어."
"6천만 원이라니, 태준 씨! 나 너무 버릇 나빠지겠어."
그녀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 보여줄게, 약속."
"그럴 줄 알아."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혁이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드레스에 6천? 야, 너 누구랑 결혼하냐, 윤서야 주아 씨야?"
태준이 웃었다. 어떤 진짜 유머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웃음소리였다.
"윤서는 최고로 보여야지. 그날의 주인공이 될 거니까. 얼마나 예민한 애인지 알잖아."
예민하다고. 그 단어가 잔인한 농담처럼 허공에 맴돌았다.
내 웨딩드레스가 떠올랐다. 작고 우아한 부티크에서 찾은, 그 천문학적인 가격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심플한 아이보리 실크 A라인 드레스였다.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렘을 안고 태준에게 사진을 보냈었다.
그는 딱 한 단어로 답장을 보냈다. 괜찮네.
결제할 시간이 되자, 그는 350만 원짜리 청구서가 엄청난 불편이라도 되는 양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카운터에 신용카드를 던졌다.
그는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스쿼시 게임에 늦었다고 불평하며 나를 재촉했다.
오윤서에게는 6천만 원. 나에게는 350만 원.
계산은 간단했다. 그리고 참혹했다.
로비의 시든 화분 뒤에 서 있던 그 순간, 강태준과 함께 쌓아 올린 내 5년의 인생이 먼지와 잔해 더미로 무너져 내렸다.
눈앞의 아른거림이 심해졌다. 세상의 경계가 흐려진 것은 신경 손상 때문이 아니라, 마침내 터져 나온 뜨겁고 소리 없는 눈물 때문이었다.
그는 단순히 감정적인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사랑이라는 벽돌과 내 희생이라는 시멘트를 이용해, 그녀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그 밑에 묻혀 잊힌 기초 공사에 불과했다.
회차 2
서주아 POV:
집으로 운전해 오는 내내, 흐릿하게 번지는 신호등 불빛과 텅 빈 가슴의 통증만이 느껴졌다.
5년. 내 인생의 5년, 내 충성,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다.
그가 희생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 위에, 나는 그를 중심으로 내 세상을 꼼꼼하게 설계했다.
한때는 그가 그 의미를 안다고 믿었다.
사고 후, 세상이 만화경처럼 조각난 이미지로 보이던 고통스러운 몇 주 동안, 그의 목소리는 나의 유일한 닻이었다.
"절대 잊지 않을게, 주아야."
그는 병실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네가 날 구했어. 나랑 결혼해줘. 평생 너한테 갚으면서 살게. 우리 평창에서, 바로 그 산에서 결혼하는 거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말을 기도처럼 붙들었다. 그를 믿었다.
그가 그 공포와 추위,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은 그 찰나의 결정을 기억한다고 믿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 약혼의 기반이었고, 우리 미래가 세워져야 할 바로 그 땅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모든 것이 연기였다는 것을.
강태준은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한 게 아니라, 무기처럼 휘둘렀다.
그것은 그의 면죄부였고, 나의 끝없는 헌신에 대한 증거였다.
내 담당 신경과 의사인 윤지후 선생님이 경고했었다.
"주아 씨 상태는 안정적이지만, 스트레스에 의해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극심한 감정적 고통은 발작을 유발할 수 있어요. 차분하고 지지적인 환경이 필요합니다."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차분하고 지지적인 환경이라니.
지금 내 세상은 지진이라도 난 건물처럼 발밑의 기초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 손바닥을 얹고, 나를 집어삼키려는 슬픔의 파도를 억누르며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쥐어짜이는 것 같았고, 고통스러운 깨달음이 심장 박동마다 전해졌다.
전화벨이 울려 나를 놀라게 했다. 화면에 '강태준' 이름이 번쩍였다.
네 번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 내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감정을 숨겼다.
"여보세요."
"자기야."
웃음소리와 잔 부딪치는 소음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사무실에서 좀 늦어질 것 같아. 클라이언트랑 저녁 먹고 있어. 아마 자정 넘어서 들어갈 거야."
클라이언트. 물론이겠지. 그 이름은 오윤서일 테고.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할 수 없는 모든 것들로 가득 찬 심연이었다.
"알았어."
그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고층 빌딩을 설계하는 것보다 더 힘겨웠다.
"그게 다야? 알았다고?"
"응, 태준아. 알았어. 재밌게 놀아."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항의하지 않는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알았어. 기다리지 말고 자."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두운 화면을 응시했다. 차 안의 침묵이 갑자기 귀를 먹먹하게 했다.
기다리지 말고 자. 나는 5년 동안 그를 기다려왔다.
그가 나를 봐주기를, 나를 소중히 여겨주기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기를.
이제 기다림은 끝났다.
그날 밤, 잠은 내가 닿을 수 없는 먼 나라였다.
우리의 차갑고 텅 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하얀 이불은 이제 거짓이 되어버린 결혼식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새벽 2시쯤, 휴대폰에서 인스타그램 알림이 울렸다. 최진혁의 게시물이었다.
엄지손가락이 아이콘 위에서 망설였다. 불길한 예감이 배 속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그래도 열었다. 봐야만 했다.
사진은 내장을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북적이는 고급 바에서 찍은 단체 사진. 그리고 그 중심에 강태준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웃고 있었고, 한 팔은 오윤서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으로 그를 숭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가 병원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날 이후로 내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든든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댓글들이었다.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왕과 여왕이네! 파워 커플."
"대학 때 다들 둘이 결혼할 줄 알았는데. 될 사람은 어떻게든 되나 봐."
그리고 아는 지인인 로렌이라는 여자애의 댓글이 달렸다.
"@강태준 오빠, 대담한데. 주아 언니가 이거 안 보길."
나는 숨을 참았다. 기다렸다. 태준의 답글이 거의 즉시 나타났다.
"@로렌P 살아남겠지. 아니면 말고. 걔 선택이지."
그의 선택. 언제나 그의 선택이었다.
내 고통, 내 굴욕, 내 존재 자체는 그가 처리하거나 버릴 수 있는 사소한 불편함에 불과했다.
나는 그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의 잔인함에 대한 조용하고 디지털적인 인정.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 옆 탁자에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그가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두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그의 경멸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끝났다. 내 인생에서 유령처럼 사는 것도 끝났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윤지후 선생님과의 진료를 위해 직접 운전해서 병원으로 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 안의 폭풍처럼.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서주아 씨?"
간호사가 혈압을 재며 친절하게 물었다.
"저 다 컸어요."
나는 눈까지는 웃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요."
병원을 나서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냉기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길 건너편 카페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그들을 보았다.
강태준과 오윤서. 하나의 큰 우산 아래 함께 웅크린 채, 그가 차 문을 열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내게는 오래전에 버린 신사적인 제스처였다.
그리고 그녀의 팔에는, 투명한 비닐 커버에 싸여 비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하얀 천과 정교한 비즈 장식이 언뜻 보였다.
그 발렌티노 드레스.
히스테릭한 웃음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물론이지.
그는 내연녀의 수천만 원짜리 드레스를 직접 집에 가져다줄 성의조차 없었다.
그는 그것을 그녀 앞에서 과시해야만 했다. 그의 애정의 트로피처럼.
나는 빗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웅덩이를 피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비틀거리며 들어섰을 때, 나는 피부 속까지 흠뻑 젖어 떨고 있었다.
몇 분 후 태준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머리에서 물방울 몇 개를 털어내며.
그는 나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세상에, 주아야, 무슨 일이야? 물에 빠진 생쥐 꼴이잖아."
"걸어왔어."
내 목소리는 밋밋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걸어서? 어디서부터?"
그러다 그의 눈이 짧고 덧없는 기억의 순간에 커졌다.
"아, 맞다. 네 진료. 깜빡했네."
나는 그저 그를 쳐다봤다. 어제 아침에도, 그 전날에도 상기시켜줬다. 냉장고에 메모도 붙여놨었다.
"그래서,"
그의 순간적인 죄책감은 금세 짜증으로 변했다.
"어떻게 됐어? 드디어 완치 판정받았어? 이제 이… 드라마… 좀 끝낼 수 있는 거야?"
내 눈, 내 희생, 내 계속되는 고통—그에게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내 눈은 영원처럼 느껴졌던 시간 만에 처음으로 맑고 흔들림 없었다.
"아니, 태준아. 못 받았어. 시신경 손상은 영구적이래. 언제나 재발 위험이 있을 거래. 잔상이 생기고, 암점이 생길 위험."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게 절대 안 끝난다는 거네. 넌 평생 이… 문제…를 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살 거라는 거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 내가 구했던 남자는 사라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 너 진짜 피곤하다."
그가 뱉어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항상 너랑은 뭐가 문제야, 안 그래? 두통, 흐릿한 점, 무슨 새로운 빌어먹을 증상. 피해자인 척하는 게 즐거워?"
그때 보았다. 그의 깔끔한 흰 셔츠 깃에 작고 희미한 분홍색 얼룩.
카페에서 오윤서가 바르고 있던 립스틱과 똑같은 색이었다.
"셔츠에 립스틱 묻었어."
내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얼어붙었다. 그의 손이 당황하고 죄책감에 찬 반사 작용으로 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오윤서한테 전해줘."
나는 덧붙였다. 그 말이 독처럼 느껴졌다.
"6천만 원짜리 드레스 조심하라고. 이번 주 내내 비 온대."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나 미행했어? 너 대체 뭐가 문제야?"
"걔 충격받았단 말이야, 주아야!"
그가 나를 향해 다가오며 소리쳤다.
"고양이가 죽었어! 내가 위로해주고 있었다고!"
"걔 고양이는 지난달에 죽었잖아, 태준아."
"그럼, 뒤늦은 슬픔이 몰려온 거겠지!"
그가 거짓말이 들통난 남자의 절박함으로 눈을 번뜩이며 더듬거렸다.
"넌 이해 못 해, 넌 걔만큼 예민하지 않잖아. 걔는 내가 필요해! 나한테는 걔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책임?"
나는 물었다. 부서지고 웃음기 없는 웃음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그럼 나에 대한 책임은? 네 약혼녀? 네 목숨 구하다가 얻은 부상 때문에 병원 갔다가 쏟아지는 비를 맞고 혼자 걸어온 사람에 대한 책임은?"
"그건 다르지!"
그가 소리쳤다.
"그건 사고였잖아! 이건… 이건 윤서라고!"
마치 신호라도 된 듯, 그의 전화가 울렸다. 그가 낚아챘다. 화면에 '오윤서' 이름이 빛났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즉시 그 부드럽고 걱정스러운 톤으로 바뀌었다.
"윤서야? 무슨 일이야? 괜찮아?"
스피커 너머로 연극적인 흐느낌이 들려왔다.
"태준 씨… 너무 미안해… 나 또 공황 발작이 오는 것 같아…"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갈게."
그는 이미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경멸적인 시선을 내게 던졌다.
"여기 있어. 몸 말리고. 그리고 제발, 내가 돌아왔을 때 유난 좀 떨지 마."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 소리가 우리가 지은 삶의 조용하고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유난 떤다고. 그는 내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진실을 깨달았다.
5년 동안, 나는 손상된 신경 때문에 눈이 멀었던 게 아니었다.
보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회차 3
서주아 POV:
결혼 전 주말을 보내기로 되어 있던 부산행 비행기는 북극의 침묵 그 자체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구름을 바라봤다.
그것은 내 옆에 앉은 남자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만질 수 있는 장벽이자 방패였다.
강태준은 안절부절못했다.
자리에서 몸을 뒤척이고, 팔걸이에 손가락을 두드리고, 거의 코믹할 정도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계속 힐끔거렸다.
그는 나의 용서와 결국에는 항복하는 것에 익숙했다.
나의 침묵은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였고,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날씨 좋네."
그가 너무 큰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헛기침을 했다.
"승무원이 정시에 착륙할 거래. 지연 없대."
나는 재생되지도 않는 음악 너머로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시선을 수평선에 고정했다.
"서주아."
그의 목소리가 좌절감으로 날카로워졌다. 그가 손을 뻗어 내 헤드폰 한쪽을 잡아챘다.
"너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야?"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내 표정은 텅 빈 벽과 같았다.
"들었어."
그는 내 차갑고 생기 없는 목소리에 움찔하며 놀랐다.
그는 목덜미가 붉어지며 자리로 다시 주저앉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
우리는 택시를 타고 해운대의 번화가로 향할 때까지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
주말 내내 모든 것이 그의 연출이었고, 나는 그저 참석하기만 하면 되는 공연이었다.
"그래서,"
내가 긴장된 침묵을 가르며 말했다.
"결혼식 계획은 다 확정된 거야?"
그것은 시험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가 고백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하게 깜빡이는 마지막 희망.
그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기로 한 삶에 대해 단 한 조각의 존중이라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
그는 내 눈을 피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전부 다 처리됐어. 자기도 알잖아, 내가 이런 건 자기 판단을 믿는 거. 자기가 건축가고, 마스터 플래너잖아."
그 거짓말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모욕적이어서 숨이 막혔다.
그는 자신이 몰래 해체한 계획, 내게서 훔쳐 간 결혼식을 내 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신뢰는 무기가 되어, 그가 나의 공개적인 굴욕을 준비하는 동안 나의 순응을 보장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내 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으로 쥐어졌다.
차갑고 단단한 결심이 내 뼛속 깊이 자리 잡으며, 심장의 균열을 메웠다.
이걸 끝내야만 했다.
그는 내 내면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아마도 내가 장소 변경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변명을 연습하고, 나중에 거창하고 공허한 제스처로 무마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터였다.
내가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는 것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고급 케이크 시식 부티크였다.
공기는 설탕과 버터크림 향으로 가득했다.
방 중앙의 받침대 위에는 샘플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하얀 퐁당과 섬세한 수제 설탕 꽃으로 만들어진 걸작. 평창의 자작나무 꽃이었다. 속이 뒤틀렸다.
내가 샴페인 맛 케이크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 익숙하고 역겨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태준 씨! 주아 씨! 이런 우연이!"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오윤서의 목소리는 이제 내 악몽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녀는 노련한 여배우의 솜씨로 놀란 척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침 이 근처에 있었지! 태준 씨, 우리 저번에 갤러리 오프닝 끝나고 여기 왔던 거 기억나? 여기 레드벨벳 죽인다고 했잖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또 다른 비밀스러운 만남.
그들의 숨겨진 삶의 또 다른 조각이, 내 인생 한가운데에 수류탄처럼 아무렇지 않게 던져졌다.
"주아 씨, 패션프루트 구아바 꼭 먹어봐요."
오윤서가 내 굳은 자세는 완전히 무시한 채 지저귀었다.
"해변 결혼식에 딱일 것 같아."
나는 손을 거두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됐어요."
"어머,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고집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전 이미 제 선택을 했어요."
오윤서의 미소가 흔들렸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에 악어의 눈물을 글썽였다.
"아. 저… 미안해요. 그냥 도와주려고 한 건데. 전 그냥… 갈게요."
그녀가 한 발짝도 떼기 전에, 태준의 팔이 뻗어 나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바보 같은 소리 마, 윤서야. 어디 안 가."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너 뭐가 문제야, 서주아? 그냥 제안한 거잖아."
그리고는 마치 마지막 치명타를 날리듯 덧붙였다.
"그리고, 걔가 곁에 있는 거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말하는 걸 깜빡했네. 내가 윤서한테 들러리 서달라고 했거든."
세상이 기울었다. 들러리. 내 결혼식에.
내 행복과 미래를 체계적으로 파괴한 여자가, 그녀가 훔쳐 간 남자에게 내 인생을 서약하는 동안 내 옆에 서 있겠다고.
그는 내게 묻지 않았다. 그저 결정했다. 언제나처럼.
"들러리라."
나는 재처럼 씁쓸한 단어를 반복했다.
"좋은 생각이네."
내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차분했다.
태준과 윤서는 내 손쉬운 동의에 놀라 나를 쳐다봤다.
윤서는 언제나처럼 배우답게 자기 역할을 했다.
"아, 태준 씨, 이건 좀 너무한가. 내가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녀는 그에게 기대며, 손을 그의 가슴 위에서 나풀거렸다.
태준의 팔이 소유욕을 드러내며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너무나 친밀하고 공개적인 그 제스처에 나는 신물이 났다.
"바보 같은 소리 마."
그가 그녀에게 속삭이고는 나를 쏘아봤다.
"봤지, 주아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너 요즘 너무 변덕스럽고 까다로워. 피곤해 죽겠어."
윤서가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쉿, 자기야. 화내지 마. 그냥 결혼 전이라 예민해서 그래."
"예민한 수준을 넘었어."
태준의 인내심이 마침내 끊어졌다.
"네 그 섬세한 감정 맞춰주느라 눈치 보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그가 경멸적인 표정으로 격하게 손짓했다.
"넌 언제쯤 그거 놓아줄래? 알았어, 네가 날 구했다고. 근데 언제까지 비련의 여주인공 노릇 할 건데!"
침묵. 어이없을 정도로 명랑한 작은 가게에 두껍고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세상의 경계가 하얗게 변했다.
내 희생. 내 고통. 내 감각의 영구적인 변화.
그에게 그것은 내가 써먹는 카드에 불과했다. 역할. 비련의 여주인공.
그가 내 고통을 무시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끔찍한 암점으로 잠에서 깨어 긴급 신경안과 진료를 받으러 가야 했던 날, 그는 나를 데려가는 것보다 오윤서의 개를 미용실에서 데려오는 것을 우선시했다.
나는 혼자, 겁에 질린 채 택시를 타야 했다.
그는 우리의 5주년 기념일, 진짜 기념일인 사고 기념일은 잊어버렸지만, 오윤서의 반쪽 생일을 위해 호화로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주었다.
나는 너무, 너무 지쳤다. 뼛속까지 스며들어 나를 짓누르는 깊은 피로감.
나는 이미 죽어버린 사랑을 위해 싸우고 있었고, 시체를 소생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 놓아줄 시간이었다.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서서 가게를 나갔다.
그들의 유독한 작은 세상에 얽혀 서 있는 그들을 남겨두고.
태준은 내가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그는 가게 주인에게 돌아서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여자들, 아시죠? 결혼 전이라 예민해서."
그는 윤서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팔을 두른 채,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스쳤다.
내가 멀어지면서 가게 창문에 비친 모든 것을 보았다.
내 손안의 휴대폰이 울렸다. 태준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주아야, 돌아와. 너 지금 말도 안 되게 굴고 있어. 내가 좀 심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얼마나 압박받고 있는지 이해해야 해.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두 여자를 관리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네가 차분하고 지지해주는 쪽이 되어야 해. 넌 내 아내가 될 사람이잖아, 제기랄. 아내답게 굴기 시작하라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완벽하게 결정화된 단어들이었다.
'아주 중요한 두 여자를 관리하려고 노력 중이야.'
느리고 차가운 미소가 내 얼굴에 번졌다.
'내가 네 짐을 덜어줄게, 태준아.' 나는 생각했다. '그 여자들 중 한 명을 방정식에서 빼줄게.'
나는 메시지를 삭제하고 계속 걸었다.
이상한 가벼움이 가슴을 채웠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적인 확신과 함께 알았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