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권지혁과 결혼하기로 한 바로 그날, 그는 공공연하게 내가 제 형의 여자라고 선언했다.

그는 결혼식을 막판에 취소했다. 그의 전 여자친구인 윤소희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두 사람이 한창 뜨겁게 사랑하던 시절로 기억이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녀의 헌신적인 연인 역할을 자처했다.

한 달 동안, 나는 권씨 가문의 저택에서 ‘손님’으로 지내야만 했다. 그가 그녀에게 애정을 쏟고 과거를 재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회복되는 대로 나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나는 진실을 엿들었다. 권지혁은 그녀의 기억상실증 치료제를 자신의 금고에 잠가두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는 인생의 사랑과 두 번째 기회를 만끽하고, 음미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소유물이며, 그가 끝날 때까지 그저 기다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우리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형의 이름을 이용해 나를 모욕했다. 좋다. 나는 그의 형의 이름을 이용해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나는 이 가문의 진정한 권력자, 권도형 회장의 집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당신 동생이 제가 회장님의 파트너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걸 현실로 만들죠. 저와 결혼해주세요.”

제1화

서이현 POV:

권지혁과 결혼하기로 한 바로 그날, 그는 공공연하게 내가 제 형의 여자라고 선언했다. 그의 진정한 사랑이 병상에 부서진 채 누워 오직 그만을 기억하는 동안, 온 가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만 나지막이 속삭인 편리한 거짓말이었다.

예식장의 무거운 참나무 문이 닫혔다. 문 저편에서 하객들이 웅성거렸고, 그들의 속삭임은 나무를 뚫고 둔탁한 소음처럼 들려왔다. 웨딩드레스는 레이스와 실크로 만들어진 감옥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이제는 뼛속까지 섬뜩한 공포가 스며들고 있었다.

소식은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교통사고. 권지혁의 전 여자친구이자, 그가 단 한 번도 제대로 잊지 못했던 윤소희가 위독한 상태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그녀의 기억은 5년 전, 그녀와 권지혁이 깊이 사랑했던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신부인 나에 대한 생각은 단 한순간도 없이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내 앞에 섰지만, 내 눈을 보지 않고 내 어깨 바로 너머의 벽을 응시했다.

“결혼식은 취소야.” 그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밋밋했다.

그의 형이자 권씨 가문의 수장인 권도형 회장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겨울밤처럼 차갑고 어두운 도형의 눈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방의 진정한 권력자는 그였다. 그의 존재감은 무거운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권지혁은 고작 전무에 불과했지만, 권도형은 회장이었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취소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소희가… 나만 기억해. 의사들은 어떤 충격이라도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어.” 권지혁은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며 설명했다. “자기가 아직 내 여자친구인 줄 알아.”

그는 그녀를 위해 연기할 작정이었다. 내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동안, 그는 그녀와 함께 5년 전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요?” 내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나는 어떡해요, 지혁 씨?”

그는 마침내 나를 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오직 짜증만이 가득했다. “이현 씨, 이건 집안 문제야. 복잡하다고.”

“우리도 곧 가족이 될 사이였잖아요.” 충격을 뚫고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며 쏘아붙였다.

바로 그때, 그가 그 짓을 했다. 그는 밖에 기다리는 하객들을 힐끗 본 다음, 제 형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 잔인하고 계산적인 생각이 스쳤다.

“오늘 밤, 이현 씨는 우리 형님의 파트너야. 손님으로.” 그는 문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물리적인 타격처럼 나를 덮쳤다. 그의 약혼녀가 아니다. 그가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아니다. 손님. 그의 형의 파트너. 그는 몇 마디 부주의한 말로 내 지위와 존엄성을 송두리리째 벗겨냈다.

나는 모욕감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다른 여자의 다정한 연인 역할을 하러 떠나버렸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홀로 남겨졌다. 일어나지 않은 결혼식의 유령처럼.

그게 한 달 전이었다.

한 달 동안 권씨 저택에서 ‘손님’으로 살았다. 한 달 동안 권지혁이 윤소희에게 애정을 쏟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우리의 옛 장소들을 모두 그녀와 함께 찾아다니며, 그들의 공유된 과거를 재건하고 내 과거를 지워나갔다.

매일 밤, 그는 내 방으로 와서 일시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희가 나아질 때까지만이야, 이현아. 그러면 우리 결혼할 거야. 약속해.”

거짓말. 전부 다.

나는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저녁 뉴스에서 흘러나온, 고대의 약초 요법으로 명성이 자자한 지리산의 한 가문에 대한 조용한 대화였다. 그중 하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해준다고 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해결책. 이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

미친 듯이 휘갈겨 쓴 정보를 손에 쥐고 권지혁을 찾아 달려갔다. 그의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노크를 하려던 순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이럴 순 없어요, 전무님.” 그의 가장 신임하는 부하인 박 실장이 말했다. “회장님께서도 인내심을 잃어가고 계십니다. 치료제가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숨이 멎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고?

“윤씨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리산 그 집안에서 약을 구했다고. 하루면 기억을 되찾게 할 수 있답니다.” 박 실장이 압박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권지혁의 목소리.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이기심이 밴,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알아.” 그가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어. 내 금고에 잠가 뒀지.”

“네?” 박 실장은 충격받은 듯했다. “그럼 왜 사용하지 않으신 겁니까?”

“5년 만에 처음으로, 소희가 예전처럼 날 봐주니까.” 권지혁은 뒤틀린 기쁨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고백했다. “이건 내 두 번째 기회야, 박 실장. 포기할 수 없어. 아직은.”

“미친 짓입니다.” 박 실장이 반박했다. “서이현 씨는요? 그분이 평생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약혼녀시잖아요.”

권지혁이 웃었다. 차갑고 오만한 소리였다. “이현이? 날 사랑하잖아. 절대 날 떠나지 못해. 갈 데도 없는 애야. 결국엔 소희한테 치료제를 줄 거야. 우리가 시간을 좀 가진 후에. 이현이랑 결혼하고, 내 자리도 지킬 거야. 난 둘 다 가질 수 있어.”

그의 말은 내 영혼에 쏟아부어진 얼음물 한 동이였다. 그는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는 탐닉하고 있었다. 내 현실을 희생시켜 꿈을 음미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이며, 그저 기다리기만 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마비되고, 깊고 모든 것을 삼키는 냉기가 혈관을 통해 퍼져나갔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벽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이 회벽을 파고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를 위해서는 안 돼.

소희와 나누었던 모든 눈빛, 내가 억지로 지켜봐야 했던 모든 다정한 손길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건 필요에 의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진짜였다. 우리의 관계, 우리의 약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더 나은 것이 나타날 때까지의 대용품이었을까?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내려다보니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권지혁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밤은 방에 있어. 소희 기분이 안 좋아. 내가 같이 있을게. 잊지 마, 넌 도형이 형 손님이야. 역할에 충실해.`

역할에 충실해.

그 말이 얼어붙은 내 심장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쳤다. 냉기는 나를 마비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슬픔이 응고되기 시작하며, 날카롭고 명확한 결심으로 뒤틀렸다.

좋아. 역할에 충실해주지.

내가 권도형의 파트너가 되길 원한다고? 자기 형의 이름을 자기기만의 방패로 삼고 싶다고? 나는 그의 거짓말을 내 무기로 만들 것이다.

손가락이 떨리며 연락처를 열었다. 권지혁의 이름을 지나쳐 오직 ‘회장님’이라고만 저장된 번호로 스크롤했다.

통화 버튼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맴돌았다. 깊고 떨리는 숨을 내쉬고 버튼을 눌렀다.

그는 첫 번째 신호음에 바로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한 울림이었다. “서이현 씨.”

“뵙고 싶습니다.” 놀랍도록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내 집무실로. 지금.”

나는 사자굴로 걸어 들어갔다. 권도형은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도시의 불빛이 그 뒤에서 마치 떨어진 별들의 바다처럼 반짝였다. 그는 동생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인내심 있고, 조용하며, 치명적이었다. 그의 권력은 시끄럽지 않았다. 공기 중에 숨 막히는 압박감이었다. 그는 읽을 수 없는 어두운 눈으로 나를 지켜봤다.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제안할 게 있습니다.”

그는 등을 기댔고,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권지혁 씨가 공개적으로 저를 회장님의 파트너라고 지명했습니다.” 재 같은 맛이 나는 말을 시작했다. “그걸 현실로 만들죠. 저와 결혼해주세요, 권도형 회장님.”

그의 얼굴에 무언가—놀라움? 만족감?—가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꼈고, 시선은 강렬했다. “내 동생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와 결혼하고 싶다?” 질문이 아니었다.

“제 자리를 확보하고 싶습니다.”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리고 가문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싶고요. 우리 사이의 결혼은 고작 전무와의 결혼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그걸 해낼 겁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 안에는 괘종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의 눈은 내게서 떠나지 않고, 탐색하고, 평가했다.

“그런데 왜,” 그가 마침내 비단결 같은 위협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 제안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지?”

이것이 나의 도박이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카드. “지난 2년 동안, 회장님 책상 맨 아래 서랍에 제 사진을 보관해 오셨으니까요.”

공기가 바싹 마르는 듯했다. 침묵이 짙고 무겁게 늘어졌다. 나는 한번 펜을 찾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었다. 정원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찍은 스냅 사진. 권지혁은 본 적도 없는 사진이었다. 그때는 그냥 이상하다고 치부했었다. 이제야 이해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느리고 포식자 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좋아.” 그가 말했다. 그 말은 사형 선고처럼 최종적으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결혼한다. 하지만 이걸 알아둬, 서이현. 되돌릴 길은 없어. 일단 내 것이 되면, 넌 영원히 내 것이야.”

오싹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나는 하나의 감옥을 다른 감옥과 맞바꾼 것이었다. 아마도 더 화려하고, 더 위험한 감옥으로. 하지만 이건 내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좋아.” 그는 일어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요?”

“결혼식에서,” 그의 목소리가 낮고 소유욕 넘치는 으르렁거림으로 떨어졌다. “권지혁이 널 차까지 안아서 데려다줬으면 좋겠어. 널 넘겨주는 거지. 네 손을 내 손에 쥐여주는 걸 보고 싶어.”

회차 2

서이현 POV:

권지혁은 얼어붙었다. 그의 얼굴은 불신으로 가득 찼다. “내 형이랑 결혼? 이현아, 장난치지 마. 농담 그만해.”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내 말이 달래주면 그만둘 어린애 투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손길은 내 피부 위를 기어가는 거미처럼 느껴졌다. 나는 불에 덴 듯 팔을 뒤로 뺐다.

“농담 아니에요, 권지혁 씨.” 내 목소리는 발밑의 대리석 바닥처럼 차가웠다.

진실이 마침내 그의 두꺼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간 듯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안 돼. 허락 못 해.”

“당신한테는 투표권 없어요.” 나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권도형의 펜트하우스 스위트룸 문을 닫았다. 내가 막 이사 온 새로운 집. 나의 집. 자물쇠가 잠기는 ‘딸깍’ 소리는 내가 들어본 소리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그의 미친 듯한 문자가 몇 분 뒤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현아, 문 열어. 얘기 좀 해야 해.`

`이건 실수야. 넌 날 사랑하잖아.`

`내가 바로잡을게. 약속해. 소희랑 조금만 더 시간을 줘. 그다음엔 우리 차례야.`

나는 답장 없이 각 메시지를 삭제했다. 우리 차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다리는 것을 끝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로운 현실에 집중했다. 내가 결혼할 남자를 이해해야 했다. 나는 권도형의 수석 비서인, 나이 들고 엄격한 여성인 김 집사에게 그의 취향에 대해 물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 읽는 책의 종류, 저녁에 듣는 음악까지.

오후에는 최고급 남성 부티크에 가서 빈티지 커프스링크 세트를 찾았다. 중앙에 단 하나의 짙은 사파이어가 박힌 단순한 백금 사각형. 그것들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강력했다. 그처럼.

그날 저녁, 내 차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헤드라이트가 한심한 장면을 비췄다. 권지혁이 서비스 출입구 근처의 대형 쓰레기통 옆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는 물건들을 버리고 있었다. 내 물건들을.

내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손으로 그린 작은 보석함. 우리가 함께 읽기로 했던 낡은 문고판 책들. 우리가 처음으로 교외로 여행 갔을 때 샀던 커플 머그잔. 그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잠시 지켜보다가, 가슴속의 둔한 통증을 느끼며 운전기사에게 정문으로 계속 가라고 말했다. 그 고통은 이미 죽어버린 사랑의 유령, 메아리에 불과했다.

몇 분 후 그가 응접실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 그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현아. 그냥… 낡은 물건들 좀 정리하고 있었어. 우리가…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릴 때를 위해 공간을 좀 더 만들려고.”

너무나 약하고 한심한 거짓말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권지혁 씨.” 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들은 버리는 게 좋죠.”

그는 내 말의 날카로움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스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반응하기 전에, 윤소희가 밝고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이현 씨! 여기 있었네요. 저녁 식사 같이 할까 기대하고 있었어요. 지혁 씨가 마라탕 사준대요!” 그녀는 내 신경을 사포처럼 긁는 애칭인 *이현아*라고 불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도형 오빠 아직 안 돌아왔어요?”

“시카고에서 업무 처리 중이세요.”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일 돌아오실 거예요.”

권지혁이 나에게 재빨리 의문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내가 어떻게 형의 일정을 알았을까? 그는 아마 직원 중 한 명이 말해줬을 거라고 생각하며 금방 무시해버렸다. 그는 여전히 너무나 눈이 멀어 있었다.

“가요, 이현 씨.” 소희가 내 팔을 잡으며 고집했다. “다 같이 가요. 가족처럼.”

그 아이러니는 너무나 두꺼워서 질식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고,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낸 남자와 그 원인이 된 여자와 함께 차에 앉아야만 했다.

식당에서 권지혁은 소희가 좋아하는 가장 매운 국물을 주문했다. 그는 악명 높게 위가 약해서 순한 맛 이상은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계속해서 물 잔에 손을 뻗으며 괜찮은 척 애썼다.

그를 돌보는 것은 예전에 내 몫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공깃밥 한 그릇을 주문하고, 매운맛을 달래줄 우유를 챙겨줬을 것이다. 나는 그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알았다.

이제, 나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이거 정말 맛있지 않아요, 지혁 씨?” 소희는 그의 고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행복하게 말했다. “더 먹어요.”

그는 고통으로 입술을 꽉 다문 채 억지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

나는 그가 삼킬 때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미묘하게 배로 움직였다. 나는 내 손을 무릎 위에 두고, 표정을 중립적으로 유지했다.

소희가 내 그릇에 야채를 좀 덜어주려고 했다. “안 먹네요, 이현 씨.”

권지혁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안에는 조용한 간청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내가 그를 도와주길, 이 자초한 고통에서 구해 주길 원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소희 앞에서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강하고 완벽한 남자친구라는 환상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의 사랑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화폐였다. 소희를 위해서는 불을 삼키고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지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습관의 편리함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그는 나를 위해 고통받을 의향이 전혀 없었다. 단 한 번도.

갑자기, 큰 음료 쟁반을 든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 근처에서 비틀거렸다. 쟁반이 위태롭게 기울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회차 3

서이현 POV:

쟁반이 기울었다. 뜨거운 국물과 유리잔들이 허공을 날았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권지혁은 윤소희 앞으로 몸을 던져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보호했다. 뜨거운 액체가 그의 등에 튀자 그는 신음했지만, 그의 유일한 걱정은 그녀였다.

“소희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그는 미친 듯이 그녀의 얼굴과 팔을 확인하며, 순수한 공포가 밴 목소리로 물었다.

“난 괜찮아, 지혁아.”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팔에 몇 방울 튄 것뿐이야. 근데 너는…”

그는 엉망진창인 상황과 고통을 무시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안 다쳤으면 됐어.” 그는 그녀가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것처럼 들어 올려 출구를 향해 달려가며, 누군가에게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내 무릎에 튀어 드레스를 흠뻑 적시고 허벅지를 데운 커다란 국물 웅덩이를 보지 못했다. 날카롭고 타는 듯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눈물이 핑 돌게 했다.

그는 가버렸다. 그는 순수한 본능의 순간에 다시 한번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식당을 혼자 걸어 나왔다.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택시를 탔고, 길의 모든 굴곡마다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의사는 2도 화상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여러 겹의 흰 거즈로 감쌌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혼자 했다.

그날 밤 늦게, 소독약 냄새나는 외로운 병실에서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소희의 최신 게시물을 보았다. 권지혁이 그녀의 팔에 난 작은 붉은 자국에 부드럽게 크림을 발라주는 사진이었다. 그의 표정은 절대적인 헌신 그 자체였다.

그녀의 캡션은 이랬다: `나의 영웅. 나를 위해 불 속이라도 걸어 들어갈 남자가 있어서 너무 행운이야.`

다리의 통증은 가슴속으로 퍼져나가는 공허한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항상 세심했다. 꽃을 가져다주고, 기념일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이해했다. 나와 함께일 때는 일상이었다. 그녀와 함께일 때는 본능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권지혁이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방금 들었어. 정말 미안해, 이현아. 소희를 먼저 병원에 데려가야 했어. 얼마나 심해?`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한 시간 후, 그가 내 병실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 다리에 감긴 두꺼운 붕대를 보고 죄책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현아… 정말 미안해.” 그는 내 곁으로 달려오며 말했다. 그는 이미 최고의 화상 치료제를 가지고 오는 개인 전문의를 불렀다. 그것은 그의 태만을 지우기 위한 과장된 제스처였다.

그는 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직접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널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는 후회로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소희 상태 때문에, 내 첫 번째 생각은 그녀를 보호하는 거였어. 이제부터는, 맹세컨대, 네가 내 최우선 순위가 될 거야.”

아름다운 거짓말이었다.

“괜찮아요, 권지혁 씨.” 나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저는 이제 당신의 약혼녀가 아니라, 권도형 회장님의 파트너잖아요.”

그는 내가 뺨을 때린 것처럼 움찔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냥 화가 난 거잖아. 내 잘못이야.”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 열었다. 안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등불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결혼식 날 너에게 주려고 했어. 제발, 받아줘. 내가 널 돌보게 해줘.”

나는 목걸이를 보고, 다시 그의 애원하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침착하게 상자를 그의 손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이거 받을 수 없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 형님의 파트너가 당신에게서 이런 선물을 받는 건 부적절하니까요.”

나는 일어섰다. 다리의 통증은 둔하게 욱신거렸다. 그리고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완전히 패배한 표정으로, 열리지 않은 선물 상자를 손에 든 채 떠났다.

그 후 몇 주는 조용한 치유와 노골적인 무시의 연속이었다. 권지혁은 끊임없이 소희 곁에 있었다. 그녀의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저택 정원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

그것은 동화 같은 장면이었다. 수천 개의 반짝이는 불빛이 나무들 사이에 걸려 있었고, 공기는 장미와 샴페인 향으로 가득했다. 소희는 그녀를 공주처럼 보이게 하는 옅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날렵한 검은 정장을 입은 권지혁은 그녀에게 일련의 사치스러운 선물을 선사했다. 빈티지 스포츠카, 희귀한 그림, 순종 백마. 선물 하나하나에 군중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잘 어울린다.” 등 뒤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과 공주님 같아. 서이현 씨가 불쌍해. 애초에 상대가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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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 애인을 선택했고 나는 복수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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