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나는 강이현. 정치 명문가의 반항적인 언론인이었다.

나의 유일한 탈출구는 서지혁과의 은밀하고 열정적인 관계였다. 그는 얼음과 논리로 조각된 듯한 막강한 힘을 가진 CEO였다.

그는 나를 그의 ‘아름다운 재앙’이라 불렀다. 그의 펜트하우스 벽 안에 갇힌 폭풍우.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거짓 위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가 단지 다른 여자, 윤채아를 위해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채아는 아버지의 비서실장의 병약한 딸이었고, 지혁은 그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나 대신 그녀를 선택했고, 나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다정함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하고, 감싸주었다.

내가 포식자에게 궁지에 몰렸을 때, 그는 나를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최악의 배신은 그가 나를 감옥에 처넣고 폭행을 사주했을 때였다.

“버릇을 좀 고쳐야지.”

그가 뱀처럼 속삭였다.

마지막 결정타는 교통사고 때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윤채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를, 충격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나는 그의 사랑이 아니었다.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짐 덩어리일 뿐이었다.

부서진 몸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재앙이 아니라, 그의 멍청이였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나는 그의 완벽한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나에게 평화를 약속한 상냥한 재벌 3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 사랑의 재를 뒤로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제1화

강이현은 모순적인 여자였다.

대중에게 그녀는 정치 명문가 ‘강씨’ 집안의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름이 실린 기사는 아버지인 강태준 의원에게 끊임없는 불안의 원천이 되는 탐사 보도 전문 기자.

그녀는 명석하고, 반항적이며, 골칫덩어리였다.

어둠 속에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차가운 펜트하우스의 정적 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비밀이었고, 열정이었으며, 서지혁이라는 세상의 네 벽 안에 갇힌 폭풍우였다.

거대 IT 보안 회사 ‘SJ 시스템’의 CEO, 서지혁.

그는 얼음과 논리로 조각된 남자였다. 그의 힘은 통제되었고, 그의 감정은 굳게 잠긴 금고와 같았다.

그는 그녀의 가족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면서도,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관계는 격렬하고 절박했으며, 결코 만나서는 안 될 두 세계의 충돌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리고 이제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은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른 아침의 빛이 전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필요로 하는 한 남자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부패한 노조위원장이 폭로되면 강 의원의 최신 법안은 좌초될 터였다.

좋은 기사였다.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향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가 옷을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면 셔츠가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 셔츠로 바뀌었다.

그 변화는 언제나 순식간이었다. 연인은 사라지고, CEO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가지 마.”

조용한 방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애원처럼 울렸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넥타이를 바로잡을 뿐이었다.

“7시에 이사회 있어.”

“취소해.”

그가 마침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 거절은 익숙한 상처였다.

그녀는 그가 서류 가방을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작별의 키스도, 미련이 남은 손길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지혁 씨.”

그녀가 다시 한번 불렀다. 절박함이 위 속에서 매듭처럼 조여왔다.

“나중에 얘기해.”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광활하고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았다.

나중에. 그의 ‘나중에’라는 약속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 유령과도 같았다.

방 안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아버지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명확했다.

“아버지께 전하세요. 받아들이겠다고.”

전화기 너머에서 순간 충격적인 침묵이 흘렀다.

“그… 해성 그룹과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네.”

이현이 텅 빈 눈으로 말했다.

“주해민과의 정략결혼. 하겠어요.”

그 제안은 몇 주 동안이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은둔형 IT 재벌로부터 막대한 선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강태준 의원이 설계한 정치적 술수.

그것은 거래였고, 그녀는 상품이었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그녀가 낮고 위험한 톤으로 덧붙였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이현 아가씨. 의원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오늘 발표해 주세요. 오늘 아침에요. 앞으로 한 시간 안에 보도자료가 나가길 원해요.”

“물론입니다.”

남자가 기쁨에 겨워 더듬거렸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결정의 무게가 수의처럼 그녀를 덮었다.

그녀는 방금 하나의 새장을 다른 새장과 맞바꾼 것이었다.

짐을 챙기던 그녀의 시선이 침대 협탁 위에 놓인 두 번째 휴대폰에 꽂혔다.

서지혁의 개인 휴대폰. 그는 절대 이걸 두고 다니지 않았다.

차가운 불안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윤채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단순하고, 기만적으로 다정했다.

“오빠, 괜찮아? 그 여자 오빠랑 같이 있었다며. 힘들게 하진 않았어?”

윤채아. 아버지 비서실장의 연약하고 사슴 같은 눈을 한 딸.

서지혁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여자.

몇 년 전, 채아는 지혁의 커리어를 시작도 전에 끝장낼 뻔했던 산업 스파이 사건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

그 이후로 그는 줄곧 그녀에게 빚을 졌고, 채아는 그 사실을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이용했다.

이현의 머릿속에 한 달 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정보원의 경호원들에게 얻어맞고 멍투성이가 되어 지혁의 문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차가운 논리의 가면을 쓴 채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부턴 조심하라고만 했다.

아프냐고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윤채아에게는 언제나 걱정뿐이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손길뿐이었다.

입안에 쓴맛이 가득 찼다.

그녀는 옷을 거칠게 꿰어 입었다. 무모한 계획이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이사회 때문에 사무실에 있을 터였다.

거기로 가서, 그를 마주하고, 진실을 직접 확인하리라.

그녀는 택시를 잡았다. 심장이 갈비뼈에 부딪히며 미친 듯이 울렸다.

하지만 택시가 SJ 시스템 본사 빌딩에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는 회의 중이 아니었다. 길 건너편 작은 카페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윤채아가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이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주차된 밴 뒤에 몸을 숨겼다.

카페 창문을 통해 그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채아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섬세한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지혁은 몸을 기울였다. 그의 표정은 이례적으로 부드러웠다.

이현이 들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채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 몸짓은 너무나 다정하고, 너무나 은밀해서, 마치 물리적인 타격처럼 느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그런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져준 적이 없었다.

이현을 둘러싼 세상이 희미한 굉음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삶의 기반, 진짜라고 믿었던 유일한 것이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아버지는 그녀를 팔아넘겼다. 그것은 야망에서 비롯된 배신이었고,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2년 전, 그녀를 지혁에게 넘겼다. 그가 존경하는 남자에게 ‘길들여야 할’ 야생마 같은 딸을.

“버릇 좀 가르쳐.”

강 의원은 마치 그녀가 다루기 힘든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처음에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에게 저항했다.

그의 서버를 해킹하고, 그의 차를 박살 내고, 그의 사무실을 백 마리의 검은 고양이로 채웠다. 그의 날렵하고 포식자 같은 본성에 대한 오마주였다.

그녀는 그의 얼음 같은 통제를 깨부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짜증 날 만큼 침착하게 처리했고, 한마디 질책도 없이 그녀의 난장판을 치웠다.

결정적인 순간은 그의 생일날 찾아왔다.

그녀는 그를 망신 주려는 유치한 반항심에 그의 와인에 약을 탔다.

하지만 약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낳았다.

그를 기절시키는 대신, 그의 통제의 겹을 벗겨내고 그를 날것 그대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 혼란과 욕망의 안갯속에서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감정이 섞인 거친 목소리로.

그는 그녀를 ‘아름다운 재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약점의 순간, 그녀는 그에게 빠져버렸다. 완전히.

그들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태어났다.

훔친 밤과 속삭이는 비밀의 세계. 강력한 CEO와 반항적인 언론인이 아무런 편견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곳.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반항심 아래의 불꽃을 진정으로 봐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그것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지난달, 그가 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계획이었다.

새 드레스를 사고, 머릿속으로 수천 번이나 할 말을 연습했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타블로이드 신문은 그와 윤채아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헤드라인은 이랬다. ‘IT 거물 서지혁과 자선사업가 윤채아, 다시 불붙은 사랑?’

이현은 술에 취했다. 그의 펜트하우스로 가서 값비싼 화병을 깨부쉈다.

수정 조각들이 그녀의 산산조각 난 희망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그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바닥의 난장판을 보았다.

“청소팀 불러서 처리하라고 할게.”

그것이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그 순간부터 사랑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채아와 함께 있는 그를 보는 것, 그녀에게는 결코 보여주지 않은 다정함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지막 치명타였다.

이것은 단지 그가 채아에게 진 빚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선택한 적이 없었다.

차갑고 단단한 결심이 그녀의 심장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게임에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지혁의 게임에서도 바보였을 뿐이다.

그녀는 창문에서 등을 돌려 강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흔들림 없고 단호했다.

그녀는 서재에서 아버지, 강태준 의원을 만났다.

계모와 채아의 어머니인 민혜진이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다.

“발표는 나갔다.”

강태준이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성 그룹과의 동맹은 훌륭한 수야, 이현아.”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그녀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미소가 흔들렸다.

“그게 뭐냐?”

“저를 의절해 주세요. 공개적으로요. 강씨 성을 제게서 거둬주세요. 저는 강이현이 아니라, 그냥 이현으로 부산에 갈 겁니다. 이 집안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의원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불신과 분노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민혜진의 눈에는 승리감의 불꽃이 스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강태준이 으르렁거렸다.

“그런가요?”

이현의 입술이 씁쓸한 미소로 뒤틀렸다.

“아니면 그냥 아버지의 야망에 대한 대가를 상기시켜 드리는 걸까요? 10년 전에 아버지가 ‘잘못 관리’하셨던 노조 연기금 기억나세요? 첫 대규모 선거 직전에 사라졌던 그거요. 저는 기억해요. 기록도 가지고 있고요. 저를 의절하시든가, 아니면 세상이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알게 될 거예요.”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분노로 붉어졌다.

그는 일어서서 그녀를 때릴 듯이 손을 들었다.

“나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쉭쉭거렸다.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잘됐네요.”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문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강 의원님. 주해민의 회사는 세계 최고의 데이터 보안 전문 기업이죠. 제가 아버지라면, 앞으로 제 비밀이 어디에 보관되는지 아주 조심할 거예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옛 침실로 돌아와 문을 안전하게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아버지와, 체계적으로 자신의 심장을 부서뜨린 남자를 위한 슬픔의 눈물이, 흐느낌이 되어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서지혁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이름, 가족, 정체성 전체를 희생했다.

그날 저녁 늦게, 마지막 짐을 싸고 있을 때,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하고 아버지다운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윤채아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

“걱정 말거라, 얘야. 여긴 언제나 네 집이 될 거다.”

이현은 얼어붙었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엿보았다.

아버지가 채아를 그녀의 방 바로 맞은편 방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어머니의 방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방을 채아에게 주고 있었다.

차갑고 무감각한 평온이 이현을 덮쳤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곳에 그녀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회차 2

윤채아는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은 완벽한 금발 컬의 폭포수 같았고, 눈은 크고 순수한 파란색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녀를 더욱 연약하게, 마치 부드러운 바람에도 부서질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복도에서 이현을 본 그녀는 작고 머뭇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현 씨. 모든 게 정말 미안해요.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을 그토록 능숙하게 해체해버린 여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강태준 의원이 채아 뒤에 나타나 그녀의 어깨에 다정한 손을 얹었다.

“채아야, 주방장에게 네가 제일 좋아하는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는 이현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온기로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정부의 딸을 친딸에게 보여준 것보다 더한 애정으로 대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이현에게 닿자, 그 온기는 사라지고 차가운 짜증으로 바뀌었다.

“네 물건 아직도 네 방에 있더구나. 이제 그 방은 채아가 쓰기로 했다고 말했을 텐데. 하인들 시켜서 네 짐 손님방으로 옮겨.”

“싫어요.”

이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뭐라고 했나?”

아버지가 얼굴을 굳히며 요구했다.

“싫다고 했어요. 그 방은 우리 엄마 방이었어요. 저 여자한테 줄 수 없어요.”

“이 집의 주인은 나다!”

그가 천둥처럼 소리쳤다.

“시키는 대로 해! 넌 은혜도 모르는 년이야. 이게 바로 네가 시집가야 하는 이유다. 주해민이 널 감당하겠지.”

채아는 이현의 말이 물리적인 타격이라도 되는 듯 움찔하며 의원 뒤로 몸을 숨겼다.

“의원님, 제발 이현 씨한테 화내지 마세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손님방에 머물면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의원은 그녀에게 돌아서자마자 즉시 부드러워졌다.

“넌 최고의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그는 이현을 노려보았다.

“네 짐 옮겨. 당장.”

메마르고 유머 없는 웃음이 이현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알았어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손님방이 아니라, 현관문 쪽으로.

“어디 가는 거냐?”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나갈 거예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결혼식이 2주 후야! 그냥 떠날 순 없어!”

“두고 보세요.”

그녀는 문 옆에 둔 여행 가방을 잡았다.

“결혼식 때문에 부산에 갈 거예요. 그게 우리 거래였잖아요. 전 제 몫을 다하고 있어요. 이 집에 머물면서 아버지가 정부 딸이랑 행복한 가족 놀이하는 걸 지켜보는 건 거래에 포함되지 않았고요.”

그녀는 밝은 아침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갔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강씨 집안의 금박 입힌 새장은 마침내 그녀의 등 뒤에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시내에서 가장 비싼 호텔이었다.

그녀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를 예약하고, 아버지가 ‘재량껏’ 쓰는 주 가족 계좌로 요금을 청구했다.

그리고 쇼핑에 나섰다.

그녀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최고급 명품 부티크에 들어갔다.

그녀는 모든 것을 샀다.

결코 입지 않을 드레스, 결코 신지 않을 구두, 작은 나라 하나를 살 수 있을 법한 보석들.

블랙카드를 긁을 때마다 작은 반항이었고, 아버지의 정치 자금 창고를 겨냥한 독화살이었다.

그날 오후, 아버지가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세 시간 만에 10억 원이 넘게 썼어!”

이현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살펴보았다. 그 단면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전 아버지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최고가 입찰자에게 팔려갈 딸이잖아요. 새로운 삶을 위한 새 옷 정도는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요?”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그리고 한 푼도 빠짐없이 갚아드릴게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재벌이랑 결혼하자마자요. 대출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그가 폭발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이틀 동안 실크, 가죽, 다이아몬드의 폭풍 속에서 난동을 계속했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했다. 아버지의 계좌에서 유동 자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빼내어, 그의 선거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모금 기간 직전에 그를 허둥지둥하게 만드는 것.

사흘째 되던 날, 그녀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떴다. 서지혁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디야?”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았다.

그녀 안의 한 부분, 어리석고 바보 같은 부분이 이 모든 추잡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부분을 죽였다.

“결혼 준비 중.”

그녀는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아침 식사를 주문하려 했다.

호텔 매니저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녀의 카드가 거절되었다고 알렸다.

아버지가 계좌를 동결시킨 것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호텔은 정중하게 계산을 마치고 스위트를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산더미 같은 명품 옷과 가방을 택시에 싣고 시내 중심가에 내렸다.

트렁크에는 수천만 원어치의 자산이 있었지만, 주머니에는 단돈 만 원도 없었다.

완고하고 맹렬한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그중 어느 것도 팔 수 없었다.

이것은 부산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한 갑옷이었고, 복수의 지참금이었다.

단 한 조각도 내놓지 않을 터였다.

황혼이 질 무렵,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냉혹한 진실을 깨달았다.

권력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평생 동안, 그녀는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도 만들지 못했다.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차가운 공원 벤치에 앉게 되었다.

그녀의 명품 여행 가방들이 요새처럼 그녀 주위에 쌓여 있었다.

실크 드레스의 감촉이 살을 에는 바람에 얇게 느껴졌다.

한때 그녀의 놀이터였던 도시가 이제는 낯설고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자정이 지난 어느 때, 술 취한 남자들 무리가 그녀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크고 위협적이었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구야.”

그들 중 하나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이 그녀를 훑었다.

“성을 잃어버린 공주님이네.”

이현은 일어섰다. 턱을 높이 쳐들었다.

“저리 가.”

남자는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아니면 어쩔 건데?”

갑자기, 날렵한 검은 차가 길가에 멎었다.

문이 열리고 서지혁이 내렸다.

그는 남자들을 보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가득 찬 먹구름 같았다.

술 취한 남자들은 그를 보자마자 즉시 정신이 들었다.

서지혁에게서 풍기는 차갑고 위험한 권력의 아우라는 어떤 무기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쥐새끼처럼 흩어졌다.

지혁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짐, 드레스, 공원 벤치를 훑었다.

“이게 무슨 꼴이지, 강이현?”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그녀가 식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걱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짜증이었다.

마치 그녀의 곤경이 그가 억지로 처리해야 하는 불편함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면 모르겠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자존심이 따끔거렸다.

“신선한 공기 좀 쐬는 중이에요.”

“차에 타.”

그것은 요청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거절하고 싶었다. 윤채아에게나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떨리고 있었고, 술 취한 남자들과의 마주침에서 온 공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말없이, 그녀는 차에 탔다.

그의 기사가 그녀의 짐을 트렁크에 싣고, 그들은 길가를 떠났다.

그녀의 짧고 비참했던 길거리 생활을 뒤로하고.

그녀는 너무나 깊은 굴욕감에 거의 질식할 것 같았다.

그에게, 그녀가 벗어나려 했던 단 한 남자에게 구조된다는 것은 궁극적인 패배였다.

회차 3

그는 그녀를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데려갔다.

불과 며칠 전 그녀가 도망쳐 나왔던 바로 그 펜트하우스.

도시의 불빛이 떨어진 별들의 융단처럼 아래에 펼쳐져 있었지만, 오늘 밤 그것들은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고, 현기증과 상실감만을 안겨주었다.

그는 운전하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 옆에 앉아, 차 안을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채우는 조용하고 음울한 존재로 있었다.

도착했을 때, 그는 그녀의 짐을 직접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안방 써.”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던, 그들의 비밀스러운 관계의 유령이 깃든 바로 그 방이었다.

그의 배신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마음으로 그 침대에서 혼자 자야 한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었다.

“손님방 쓸게요.”

그녀가 의도했던 것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머물지 않을 거예요. 부산으로 갈 준비가 될 때까지만요.”

무언가—실망? 좌절?—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가려졌다.

“마음대로 해.”

그녀는 손님방에 틀어박혔다. 호텔처럼 작고 무균 상태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텅 빈 벽을 응시하며 결혼식까지 남은 날을 세었다.

열하루. 열하루 후면 그녀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의 소유가 된다.

그것은 사형 선고인 동시에 해방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부엌에서 그를 발견했다.

전날 밤의 긴장감이 여전히 공기 중에 짙게, 말없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깨기로 결심했다.

“윤채아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으며 커피를 따랐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태블릿으로 경제 뉴스를 계속 읽었다.

“누군지는 알지.”

대답 아닌 대답은 그 자체로 대답이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이현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빚진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겠네요. 언제나 연약하고 구해줄 필요가 있는 사람 말이에요.”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차가웠다.

“채아랑 나는 과거가 있어. 복잡해.”

“지혁 씨랑 관련된 건 뭐든 복잡하죠.”

그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채아한테서 떨어져, 이현아. 걘 충분히 겪었어. 네가 걜 괴롭히는 건 용납 못 해.”

경고는 명확했다. 그는 윤채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날카롭고 부서지기 쉬운 웃음이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걱정 마세요. 당신들의… 복잡한 과거에 끼어들 생각 없으니까. 전 결혼식 준비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커피를 들고 손님방으로 물러났다.

대화는 입안에 시큼한 뒷맛을 남겼다.

그는 윤채아 주위에 요새를 쌓았고, 이현은 확고하게 그 밖에 있었다.

그녀는 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펜트하우스의 침묵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날 밤,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습관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가 항상 침대 왼편에서 자는 방식,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한때는 위안이었던 것.

이제 복도 저편 그의 방에서 들려오는 침묵은 그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욕망이 아니라 의무감에서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다음 날, 그는 초대장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늘 밤 파티가 있어. 내 동료 집에서. 같이 갔으면 좋겠어.”

“왜요?”

그녀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여기 혼자 앉아서 우울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이 조용한 아파트에 갇혀 또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숨이 막혔다.

더 나은 판단에 반하여, 그녀는 동의했다.

“좋아요.”

파티는 언덕 위 호화로운 저택에서 열렸다. 도시의 엘리트들로 가득 찬 화려한 행사였다.

그들이 들어서자, 밝고 환한 미소를 지닌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윤채아였다.

“지혁 오빠! 왔구나!”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친숙하게 외쳤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다 이현을 발견했고, 그녀의 미소는 아주 잠깐 흔들렸다.

“어. 이현 씨. 여기도 왔네요.”

“안녕, 채아야.”

이현이 얼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다 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채아가 재빨리 회복하며 말했다.

“환영 파티예요. 저를 위한.”

이현은 발밑의 바닥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라이벌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에 데려온 것이었다.

굴욕감은 물리적인 타격처럼 폐에서 공기를 앗아갔다.

그녀는 돌아서서 떠나려 했지만, 채아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제발, 가지 마세요.”

채아가 거짓된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아버님한테 의절당해서 많이 힘드시겠죠. 정말 막막할 거예요.”

그녀의 말은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고개들이 돌아갔다. 속삭임이 군중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

이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채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이현 씨, 그렇게 용감한 척 안 해도 돼요. 우리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알지만, 전 정말 돕고 싶어요.”

그녀는 훌쩍였다. 모든 사람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완벽하고 섬세한 소리였다.

“그만해.”

이현이 인내심을 잃고 쉭쉭거렸다.

“제발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

채아가 흐느끼며 지혁에게 돌아섰다. 아랫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지혁 오빠, 이현 씨가 무섭게 해.”

지혁이 앞으로 나서 채아의 어깨를 위로하듯 감쌌다.

그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실망으로 굳어 있었다.

“강이현. 그만해.”

그는 울고 있는 채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이현은 심판하는 눈들의 바다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그가 채아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머리가 그녀의 머리에 가깝게 숙여져 있었다.

그 광경은 그녀의 심장을 찌르는 단도와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공개적인 지지, 그런 부드러운 보호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세상에게, 그리고 그에게, 그녀는 악당이었고, 채아는 희생자였다.

그녀는 마침내 이해했다.

그는 단지 빚 때문에 채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아꼈다.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 강이현은 단지 기분 전환용, 사적으로 길들이는 것을 즐기는 ‘아름다운 재앙’이었을 뿐, 공개적으로는 결코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존재였다.

그녀가 매달렸던 사랑, 어둠 속에서 키워왔던 희망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바로 향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뻣뻣하고 기계적이었다.

술이 필요했다.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고통을 마비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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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폰에서 그녀의 여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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