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어둡고 호화로운 개인 영화관에서 최고 인기의 보석 경매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경매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2억 나왔습니다. 하나, 둘-"
윤우희의 귀에 경매인의 목소리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몸 아래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거친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콱 물었다.
남자는 작게 신음했다.
"힘 좀 풀어."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꽉 붙잡고 굵고 거친 목소리로 명령했다.
윤우희도 자신이 깨문 것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턱의 힘을 풀었다.
그녀가 사과하려는 찰나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힘을 풀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윤우희는 멍해졌다.
미안한 마음이 수치심으로 바뀌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몸짓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경매인의 망치가 떨어졌다. "20억에 낙찰되었습니다! 구인준 씨, 축하 드립니다!"
그 이름을 들은 윤우희는 순간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녀의 변화가 너무 선명한 탓에 남자도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느릿하게 화면 쪽으로 돌렸다.
카메라가 구인준의 얼굴을 확대하자, 익숙한 얼굴 이목구비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구씨 가문의 둘째 아들, 구인준... 아는 사이인가?" 남자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윤우희의 귓불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윤우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인준 얘기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서비스에 잡담까지 포함되나요?" 그녀는 짜증 섞인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반박에 남자는 가볍게 웃었다. 몸으로 감지할 수 있는 낮은 웃음이었다.
서비스라고?
그는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움켜쥐고 그녀의 안을 무자비하게 침범하기 시작했다.
방 안의 공기는 그들의 열렬한 욕망과 하나 되어 고동치는 듯했고, 곧 그들의 헐떡거리는 숨결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들은 동시에 절정에 도달했다.
일이 끝나자 윤우희는 남자가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에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내 의자 위에 놓아두었다. 그녀는 허리를 움켜쥐고 자리를 떴다.
마침내 욕실에서 나온 려서준은 의자 위에 깔끔하게 놓인 지폐 뭉치를 응시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여유롭게 불을 붙인 다음 의자에 기댄 채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비서인 송현이 긴장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담배 연기가 공기 속에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위험하고 음침한 분위기에 그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어, 죄송합니다, 려 대표님. 제가 방심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 여성 분을 찾아 오겠습니다."
방금 귀국한 그들은 경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빠져 나간 것이다.
려서준은 거의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럴 것 없어. 일부러... 내버려 둔 거니까."
송현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때 그는 려서준의 가슴에 위치한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송현은 머리가 멍해졌다. 그가 려서준 밑에서 일한 이후로 려서준은 단 한 번도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스킨십도 잘 하지 않았었다.
려서준이 어떤 비밀스러운 질병을 앓고 있어서 지금까지 여자와 사귀어 보지 못한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지금 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그런 말들이 전부 헛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송현이 두 번 생각하기도 전에, 려서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구인준의 사생활을 살펴 봐. 30분 안에 보고서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오늘 밤, 윤우희는 온몸에 홧홧하게 열이 오른 채 비틀거리며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왔었다.
누가 약을 먹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금욕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윤우희는 아직 처녀였다.
구인준과 결혼한 지 2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의 손을 타지 않았다니?
열정적이었던 순간의 기억이 그의 깊은 곳 어딘가를 자극했고,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뜻밖의 선물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윤우희는 약효 때문에 자신이 누구와 함께 밤을 보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
윤우희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을 알리는 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밖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이를 갈았다.
그녀가 몇 번이고 힘이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됐지만 남자는 끝까지 놔주지 않고 욕망을 풀었다.
돈을 주고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어느 쪽이지?
바로 그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임해연에게서 온 전화였다.
"우희야!" 임해연이 걱정스러운 듯이 거의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좀 어때?"
윤우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어 던졌다. "좀 나아졌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임해연이 화를 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구인준, 그 쓰레기 자식! 역겨워 죽겠어! 결혼 생활이 그렇게 하기 싫으면 그냥 지금 당장 이혼하든가!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자기 아내를 해칠 계략을 꾸민단 말이야?"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윤우희의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어제는 두 사람의 결혼 2주년 기념일이었다. 구인준은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자며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윤우희는 그가 변했기를 바라며 예쁘게 차려 입었지만 결국 여느 때와 같이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다 누군가 가져다 준 약물이 들어간 술을 마셔 그런 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구인준이 정말 이 일의 배후에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씁쓸해진 윤우희는 지친 몸으로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괜찮아, 해연아. 내가 알아서 할게."
하지만 임해연은 그녀가 마음이 약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아서 해?" 알아서 한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말만 해, 언제라도 달려갈 테니까. 이 하이힐로 그 자식 고환을 날려버리겠어!"
윤우희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지만, 친구의 말에 지친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 때, 임해연이 갑자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어젯밤에 너랑 있었던 그 남자 누구야?"
윤우희는 걸음을 멈췄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네가 부른 호스트 아니야?" 그녀가 불안한 듯 물었다.
"내가 부르긴 했지." 임해연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네가 안 갔다며. 오늘 아침에 문자 왔던데? 밤새 기다렸는데 아무도 안 왔다고. 그럼… 도대체 누구랑 같이 있었던 거야?"
사실을 깨달은 윤우희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침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깜짝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샤워를 하고 허리에 수건을 느슨하게 두른 구인준이 서 있었다. 아직 물에 젖어 축축한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남자?"
회차 2
윤우희는 남편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는 늘 그랬듯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차갑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부어 오른 그의 입술이었다.
다른 여자와 그렇게 격하게 입을 맞춘 건가?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끊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인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윤우희, 무슨 태도가 그래?"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평소 집에 잘 들어 오지 않던 그가 오늘은 모처럼 집에 들어온 것이다.
평소였다면 윤우희는 피곤한 얼굴에 기쁜 미소를 띠며 두 팔 벌려 그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지치고 공허해 보였다.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난 항상 이랬는데요. 순종적이고 현명한 아내로서 당신이 회사에서 돌아오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집안을 깔끔히 정돈해놓는 아내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도 내가 이러는 걸 좋아하잖아요? 당신이 애인과 밖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에도 더 편할 테니까요."
구인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일은 감추기도 어려우니 그는 감출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말했다. "그래서 온 거야. 할 얘기가 있어."
윤우희는 그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세게 문질렀다. 미련이 아니라 더러운 무언가를 닦아내듯.
"드디어 그 여자와의 관계를 공개하는 건가요?"
구인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당신이 어떻게 안 거야? 뒷조사라도 했어?"
긴장해 하는 그의 목소리에 윤우희는 실소를 터뜨렸다. "뒷조사 같은 게 필요나 할까요? 어젯밤에 그 여자한테 20억이나 썼잖아요.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다 보이겠죠?"
그는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목소리와 외모 모두 윤우희가 맞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는 그녀의 말 속의 가시를 분명히 느꼈다.
하얗고 수수한, 다듬어지지 않은 얼굴은 한층 더 아름다워졌지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분노도, 고통도...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자신이 전부인 듯 바라보던 그녀였는데,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이런 그녀의 모습이 그는 왠지 모르게 불만스러웠다. 자신의 그런 반응에 짜증이 난 구인준은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쳐댔다. "그 사람, 임신했어. 아직 위험한 단계라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작은 선물을 산 것 뿐이야."
그 말에 윤우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임신을 했다고?
그러니까 윤우희가 그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밤을 새우는 동안, 그는 다른 여자와 정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윤우희에 구인준은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다. "당신과 자고 싶지 않은 건 아니야." 그가 거만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냥... 재미가 없어. 그냥 아무 맛 없는 생수 같아.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을 걸."
그의 잔인한 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날아와 윤우희의 몸을 꿰뚫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윤우희가 부부관계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먼저 요구한 적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력 없는 여자 취급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 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윤우희는 느린 속도로 차분하게 숨을 들이쉬며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좋아요."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이혼하죠. 그 여자가 원하는 자리를 줘요."
이혼이라는 말에 구인준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비웃었다. "또 수작 부리는 거야?"
자신이 옳다고 확신한 그는 점점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우희, 당신은 내 관심을 받으려고 온갖 유치한 짓은 다 했어. 지치지도 않아? 난 지치는데."
그는 윤우희가 너무 우스웠다.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정말로 나를 떠나갈 수 있겠어?"
그 말에 윤우희는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랑? 저 남자가 사랑이 뭔지는 알까?
구인준의 사업이 망해 그에게 남은 거라고는 산산이 조각난 꿈과 빚 뿐이었을 때, 윤우희는 자신이 모은 돈을 모두 바쳐 그를 도왔었다.
그래서 그는 고맙다는 이유로, 아니 의무감으로 그녀와 결혼했다.
2년 동안 그녀는 남편이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내조하는 충실한 아내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얻은 게 뭐지?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배고 있는 동안 그녀는 쓸모 없는 유물처럼 내쳐졌다.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과 헌신은 그의 발 아래 땅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이 남자를 계속해서 사랑한다면 자신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닌가?
윤우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 서류를 준비해 와요. 어떤 조건을 가져와도 동의해주죠."
그녀는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고, 구인준은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잠시 분노한 얼굴로 그녀가 들어간 문을 노려봤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한 번 버텨 봐.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고.
구인준은 집에서 나와 그의 연인 심지연이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로 곧장 향했다.
"빠르네." 구인준이 이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눈썹을 치키며 농담조로 말했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다루기 힘든 고집쟁이는 아닌 것 같은데."
구인준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교활한 여자야." 그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혼에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를 놀리는 건지 모르겠어."
심지연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장난기 어린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걱정 마, 인준 씨." 그녀는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 여자가 마음을 바꿨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을 걸."
구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회차 3
심지연의 두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별 일 아니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여자는 사회와 단절된 채 2년 동안 조용히 전업주부로 살아왔잖아. 당신이 단호하게 말하면, 그 여자는 찍 소리도 못할 걸?"
구인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난 2년 동안 윤우희가 그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정상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자신이 갈망하던 곳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성공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위는 권력으로 더 다져져야 했다.
심씨 가문의 딸의 신분이 윤우희의 헌신적인 사랑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때, 심지연은 갑자기 그녀의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 "인준 씨."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벗어난 기념으로 축하할까?"
구인준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머릿속엔 윤우희의 무관심한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까 그가 일찍 집을 나선 후로, 윤우희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전화해 그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그가 그녀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당황해 안절부절못하며 전화를 걸어댔을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는 심지연을 밀어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임신한 지 몇 주밖에 안 됐잖아. 조심해."
심지연은 예리하게 그의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인준 씨, 왜 그래?"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혼하고 싶지 않아?"
구인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물론 하고 싶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다. "그런데 왜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거야?"
구인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버지 상태가 악화됐어.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데다, 어젯밤에 서준이 형까지 돌아왔다고. 아마 재산 상속 때문에 왔을 거야. 형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해."
당황한 심지연이 눈을 깜빡였다. "려서준? 아버님이 첫 번째 부인이랑 낳은 그 아들? 서준 씨는 더 이상 구씨 성도 아니잖아. 그런데 무슨 권리로 재산 상속권을 주장해?"
구인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생아가 본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끊임없이 노력한 세월은 구씨 가문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려서준을 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됐든, 꼭 이겨야 했다.
한편 윤우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피로가 가시지 않아 팔다리가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아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그 남자 꿈을 꿔서 그런지 그의 손길이 여전히 피부에 느껴지는 듯했다.
약효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 남자가 밤일을 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지금도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임해연으로부터 전화가 오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여-여보세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눈치가 빠른 임해연은 친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즉시 알아챘다.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네. 어떻게 된 거야? 그 자식하고 화해했어?"
윤우희는 당화하지 않은 척 하려고 애쓰며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임해연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쨌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어. 약물 성분은 믿을 만한 친구한테 맡겼거든. 약물 구매자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몰라."
윤우희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고마워, 해연아."
"정말 나한테 고마우면 내 부탁 좀 들어줘. 그 멍청이한테 너무 집착하지 마. 이혼 후에는 네 커리어에 집중해. 알았어?"
윤우희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응, 알았어."
그녀는 구인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결코 순수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빚과 의무감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출신이 특별했고, 그래서 가족들이 그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런 어두운 어린 시절에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격려해 준 사람은 바로 구인준이었다.
그녀는 곁에 있어주는 그를 보며 막연한 애정을 느꼈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사랑 받지 못한 것이 익숙해서 괜찮아." 윤우희가 중얼거렸다. "지난 2년은... 그냥 인준 씨의 친절에 대한 보답이었어."
윤우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과거 구인준이 자신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때로는 덧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희야, 나는 네가 이 모든 걸 내려놓았으면 좋겠어." 임해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윤우희는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고 울음을 참았다. 그녀는 눈물이 나지 않도록 재빨리 눈꺼풀에 손을 대고 꾹 눌렀다.
바로 그때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결혼 반지가 사라진 것이다.
하루 종일 안 보였는데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가벼워지고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전부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정말 다 내려놨어."
......
구인준은 그녀가 결혼 반지를 잃어버렸단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그는 잠깐 뭘 가지러 돌아왔다가 그녀의 깨끗한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결혼반지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