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고진아는 손에 폴더를 든 채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침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한결 씨, 살살해 줘... 못 참겠어..."
한 여자의 신음 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녀는 이런 신음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저택에 살고 있는 건 그녀와 그녀의 삼촌인 우한결 둘 뿐이었다. 삼촌이 여자를 집까지 데려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폴더를 놓치는 바람에 종이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고진아는 침실 문을 열어 젖혔다.
조명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넓은 등은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고, 하반신은 얇은 이불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삼촌 우한결이 틀림없었다.
그의 몸 아래로 흥분한 여자가 보였다.
화가 잔뜩 난 고진아는 문 옆에 있던 신발을 집어 던지며 울부짖었다. "삼촌 진짜 싫어!"
그리고는 침실을 뛰쳐나갔다.
문 닫는 소리에 우한결은 이불을 제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의는 맨몸이었지만 바지는 입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들이마시자, 연기 사이로 그의 매력적인 모습이 흐려졌다. 차갑고 위협적인 눈빛에는 아무런 욕망도 서려있지 않았다.
곧 여자도 브래지어만 입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우한결의 허리에 손을 뻗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던 거 계속 할까요?"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가."
사실 그녀는 침대 위에서의 연기를 현실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결 씨.."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허리를 더듬으며 속삭였다.
이 도시에서 우한결의 권력은 청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여자를 다시 대에서 밀어냈다.
"한성남, 데리고 나가."
"알겠습니다."
그녀는 침실에 더 있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한성남에게 잡혀 끌려 나갔다. 한성남이 침대 옆으로 다시 다가가 말했다. "대표님, 아가씨가 친구 곽아남 양의 댁으로 간 것 같습니다. 아직 해외 여행 서류에 서명도 안 했어요."
"직접 서류 보여주고 사인 받아 와. 이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저택을 떠난 직후 고진아는 베프인 곽아남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친구의 어깨에 기대 흐느끼며 말했다. "어떻게 삼촌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곽아남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달랬다. "진아야, 그 사람은 네 삼촌이란 거 잊지 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 게다가 나이도 서른이잖아.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지. 이제 그만 벗어날 때가 됐어."
고진아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친삼촌도 아니잖아."
"그래도 널 키워준 사람이잖아. 어쨌든 네 삼촌이고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곽아남이 다시 한 번 현실을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고진아는 잠시 생각에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두 사람은 가족이었고 이를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삶에 가족 관계를 능가하는 다른 관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무렵, 자신을 학대하는 외삼촌과 외숙모로부터 도망친 뒤로 줄곧 우씨 가문에서 지내왔다.
존경 받는 우씨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우건국이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빚진 일이 있어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어르신을 만나러 가보니, 그는 이미 은퇴하여 더 이상 저택에서 거주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앉아있던 우씨 가문의 현재 리더의 둘째 부인인 유가인이 그녀를 못마땅한 눈치로 쳐다보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진아는 어색하게 거실에 서 있기만 했다. 그때 부인이 도우미를 시켜 제발로 나가라는 의미로 2만 원을 건넸다.
굴욕감에 두 뺨이 달아올랐다. 돈을 거절하고 나가려던 순간 유가인을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계실 때에만 너그러운 척 연기하나 봐요? 우씨 가문이 애 하나 정도는 먹여살릴 수 있을 텐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래도 신용은 지켜야죠."
고진아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계단에 서 있는 쌀쌀맞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회색 정장 차림의 그는 팔짱을 낀 채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위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차 2
순간 고진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보았다.
얼굴부터 몸매, 분위기까지 세련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차가운 표정은 위압적이었고, 약간 놀리는 듯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키도 커서 쉽사리 눈을 떼기 힘들었다.
고진아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첫눈에 그에게 반한 뒤로 그녀는 늘 한없는 애정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물론 우씨 본가에서는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고, 그녀도 유가인과 같은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우한결이 살고 있는 다른 저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별장은 우한결이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네덜란드에서 가족 사업을 꾸릴 준비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우지성이 선물한 것이었다.
고씨 어르신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앞으로 넌 내가 책임질 거야."
그의 말에 고진아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외삼촌 집의 작은 다락방에서 넓고 큰 침실로 이사가게 되었고, 신상 디자이너 옷들로 가득한 자기만의 옷장도 생겼다. 늘 삼촌과 숙모의 딸인 사촌 언니가 물려준 옷만 입던 그녀에게는 하늘 땅 천지의 변화였다.
게다가 이제 시중을 드는 도우미들도 생겼다.
작고 말랐었던 16살의 소녀는 금세 보기 좋은 체형에 키가 큰 어엿한 숙녀로 거듭났다.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외삼촌 부부와 달리 지금은 집에서 가정교사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덕분에 그녀는 누구보다 밝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과정은 2년 만에 모두 마쳤다.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18살이 되는 해, 청해 최고 대학에 입학했다. 2년 만에 학부 과정을 조기 졸업한 그녀는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우한결과 자주 연락을 취하지 못했지만, 그는 늘 고진아를 위하여 세심하고 철저한 준비를 해 주었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우한결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곧 그 남자는 고진아의 온 세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고진아는 우한결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져갔고 그의 삶에 깃들고 싶었다.
게다가 그는 청해에서 우씨 가문 사업을 키운 결단력 있는 리더이기도 했기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청해 상류층 여성이 그의 관심을 갖기 위해 온갖 전략을 쓰고 있는 것 또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한결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어느 날은 자신에게 너무 적극적이라는 이유로 유명한 여배우를 파티에서 쫓아내는 일도 있었다.
그랬던 우한결이 지금 다른 여자와 침대를 뒹굴고 있다니! 어떻게 충격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여자에 관심 없다는 이야기는 그저 소문에 불과했던 거였을까?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오늘 그녀가 목격한 것은 모든 환상을 깨뜨리고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결코 그녀를 여자로 대한 적이 없었다. 단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를 돌본 것 뿐이었다.
그녀가 4년 동안 품어온 깊은 감정은 정작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제서야 우한결이 왜 그녀가 그 서류에 서명하고 해외로 이주하기를 바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인생에 나타났기에, 아무 관계 없는 그녀는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눈물을 닦은 고진아의 맑은 눈빛에는 단호함이 역력했다.
우한결이 그렇게 싫다는데 그를 잡을 이유도 없었다.
지금의 고진아는 한때 제발 거두어달라며 간청했던 그때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곽아남은 걱정스럽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이 뭔데?"
"나한텐 남아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아. 서류에 서명하고 우한결이 바라는 대로 여길 뜰 거야. 그 사람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게 낫겠어."
회차 3
그날 저녁 고진아는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거실로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우한결이 눈에 들어왔다.
'일에 열중할 때의 남자가 가장 매력적이다.' 고진아는 이 말이 진짜라고 믿었다. 오늘 일에 상처 받았지만 그를 보자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하지만 우한결이 검정색 라운지 웨어를 입고 있는 걸 보니 다시 침실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금세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낮에는 너무 민망하고 분하여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유명 배우이자 가수였던 조이진이었다.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고진아가 무척 좋아하고 응원했던 연예인이었다.
방금 조이진이 SNS에서 사진을 뿌렸는데, 사진 속에서 그녀가 입은 라운지 웨어가 최근에 삼촌이 입은 옷과 같은 브랜드였다.
아! 나의 짝사랑 상대와 우상이 그렇고 그런...
두 사람은 함께 사는 건 아니었지만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같은 스타일의 라운지 웨어를 입고 있었다.
삼촌이 누나 스타일의 여성을 선호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조이진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고, 많은 남성 팬을 지니고 있었다.
고진아는 비록 제법 인기가 있었지만 전체 분위기는 순수하고 담백하여 조이진과 완전 다른 스타일이었다.
가슴 한 켠이 쓰라렸다.
외적으로도 우한결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우한결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우한결은 건너편 소파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여기 와 앉아."
고진아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폴더 하나를 내밀었다. "서명은 왜 안 했어?"
펜을 잡은 고진아는 화제를 돌렸다. "조이진이 삼촌 여자친구예요? 그 여자랑 결혼하게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소파에 나른히 몸을 기댔다. "아까는 반응이 왜 그렇게 큰 거야? 요즘 TV에 그런 장면 다 나오지 않나? 네 나이가 몇인데? 알 거 다 알 텐데."
자신을 놀리는 듯한 남자의 미소에 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고진아는 펜을 꽉 쥐었다.
자신의 성생활을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 걸 보면 자신을 조카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조이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고 애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듯한 그의 모습에 아직 조이진이 여기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곧 결혼 할지도...
"숙모 생기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찌르는 그의 질문에 고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모...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녀는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은 우한결의 연인이 되고 싶었다.
씁쓸한 시선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서명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출국은 두 달 뒤야.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내일은 시간 내서 본가에 인사 드리러 오고."
가까스로 인사를 한 고진아는 막 눈물이 쏟아 나올까 봐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고진아가 자리를 뜨자마자 그는 안경을 벗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한편 그녀의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이런 저런 괴로운 생각들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결국 몸을 일으켜 가장 자리에 걸쳐 앉았다.
순간 눈을 반짝이며 시선이 옷장으로 향했다.
얼마 전 곽아남과 함께 쇼핑을 하다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란제리 원피스를 하나 구입했던 기억이 났다.
우한결은 정말 그녀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걸까?
어차피 떠날 마당에 한 번 질러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실패하더라도 해외로 가버리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