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어둠이 짙게 깔린 침실,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남자의 차가운 석상처럼 굳은 얼굴이 보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주나연은 진흙처럼 온몸의 힘이 쭉 빠져 침대에 늘어졌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경자 아주머니를 통해 최경호가 이미 출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주나연의 몸에 가득한 멍 자국과 흔적을 본 경자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장님도 참, 너무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말을 마친 경자 아주머니는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몸에 살살 발라주었다.

주나연은 자신의 몸에 남은 엉망인 흔적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씁쓸함이 가득 번져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본가에 계신 할아버지를 뵈러 간 주나연은 가사 도우미가 건넨 차를 마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이상하게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이후 운전기사는 그녀를 저택으로 데려다주지 않고 외진 길로 차를 돌렸다.

그녀는 뒷좌석에서 몰래 휴대폰으로 최경호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그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행히 중간에 차가 추돌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주나연은 그날 최씨 가문의 가장 치욕스러운 오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택에 돌아온 그녀는 최경호가 화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완벽하게 공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에게 단 한 번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4년 동안 부부로 지내왔지만, 그녀가 외박을 해도 최경호는 한마디도 묻지 않을 사람이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자신의 옷을 거칠게 벗어 던진 채, 그의 등에 매달렸다.

남자의 반응은 예상 외로 빨랐다. 그는 즉시 화상 회의를 종료하고

밤새도록 미친 듯이 탐닉한 후,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본가의 그 차 한 잔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명백했다. 그녀의 명예를 훼손하고 최씨 가문에서 치욕스럽게 쫓아내기 위한 함정이었다.

주씨 집안과 최씨 집안의 이 결혼은 본질적으로 허울뿐이었다.

몇 년 전, 주나연의 할아버지인 주성덕이 위기에 처한 최강택 어르신을 구해주었고, 세월이 흐른 후 그 은혜는 손녀의 혼인을 통해 갚아지게 된 것이다.

최씨 가문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반기는 사람은 최강택 어르신밖에 없었다.

최경호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주나연에게 그런 약을 타줄 수 있었겠는가.

그날 이후, 최경호는 한 달 동안 출장을 떠났고, 그 기간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한 연예 뉴스 헤드라인에서였다.

그가 멀리 떨어진 경해에서 수백 대의 드론을 동원해 한 여성에게 환상적인 불꽃 쇼를 선물했다는 내용이었다.

카메라에 잡힌 모습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주나연은 그 여자의 옆모습만으로도 그녀가 과거에 큰 스캔들을 일으켰던 최경호의 전 여자친구라는 것을 알아챘다.

최씨 가문 경호원의 여동생, 백서아였다.

뉴스 화면을 바라보던 주나연의 입가에서 힘없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4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 순간도 제대로 얻지 못한 최경호의 다정함과 로맨스는, 이미 다른 여자에게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극심한 슬픔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고, 최근 몸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택시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검사 결과지를 들고 잠시 침묵하더니, 담담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임신 4주 차입니다, 주 여사님."

의사의 말에 주나연은 머릿속이 하얘지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책상 위에 놓인 검사 결과지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요…"

그녀는 최경호와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지만, 실제로 함께 잠자리를 가졌던 밤은 한 달 전 그날이 유일했다. 게다가 그날조차 최경호는 피임 조치를 했다.

의사는 검사지를 가리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결과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혈당 증상이 심하니, 영양 보충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주나연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병원 로비에 서서 그날 밤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검사지를 손에 꼭 쥔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는 순간, 최경호의 차갑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시야 저편에서 익숙한 두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남자는, 평소의 차가운 모습과는 달리 눈빛이 유난히 부드러웠고 전화를 받으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을 자꾸만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서아의 수수한 민낯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고, 헐렁한 원피스도 그녀의 불룩한 배를 가리지 못했다.

아마 임신 3, 4개월 정도 된 것 같았다.

주나연은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의 혈액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었다.

최경호가 백서아의 임신 검사지를 행복한 마음으로 손에 쥐고 바라보던 모습을 상상하니, 주나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전화기 너머에서 최경호는 참을성 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말해. 왜 전화했어?"

머릿속이 하얗게 멍한 상태에서, 주나연은 간신히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지금 어디야?"

최경호는 냉랭한 어조로,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며 답을 회피했다.

"나 바빠.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나연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 서서 두 사람이 산부인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 허울뿐인 결혼을 이제 끝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사랑을 위한 발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전화기에 대고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면 보자. 할 말이 있어."

회차 2

주나연은 감정을 억누른 채 택시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녀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최경호는 서재에서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최경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냉랭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떨어졌다. "기본적인 가정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나? 방에 들어올 때 노크도 안 해?"

주나연은 입안에 쓴맛이 가득 퍼지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굳힌 채 뒤로 물러나 문을 쾅 하고 세게 닫았다. 그리고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힘이 얼마나 센지 건물 전체를 흔들어 부술 기세였다.

5분이 지난 뒤, 방 안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주나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가 최경호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진에 찍힌 사람, 당신 맞아?" 최경호는 화면을 스쳐 보더니, 당연하다는 듯 냉랭하게 한마디 뱉었다. "눈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내가 맞을 거야."

주나연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나한테 설명할 말은 없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본 최경호의 잘생긴 얼굴에는 서리 같은 냉기가 여전했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나와 너 사이, 속임수를 써서 억지로 얻어낸 결혼관계에서, 내가 네게 무슨 해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 순간, 주나연의 시선이 최경호의 목덜미 쪽에 선명하게 남은 빨간 자국에 고정되었다. 여자가 물어뜯은 자국이 분명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최경호…"

그녀의 멍한 표정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최경호는 시선을 다시 서류 더미로 돌리며 말했다. "할 말 다 했으면 내가 방금 벗어놓은 옷이나 다려놔."

그 말을 듣자, 주나연은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은 곧 단호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최경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혼해. 당신이 지겨워한 이 생활, 나도 이제는 지쳤어."

최경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이혼, 이혼하자고. 당신과 백서아의 기사, 당신이 백서아를 산부인과에 데려가는 모습, 나 전부 똑똑히 봤어. 더 이상 서로를 속이면서 연기할 필요 없어. 우리 둘 다 너무 지쳤잖아."

주나연은 매주 최경호와 함께 최씨 본가에 들렀다.

할아버님 앞에서 사이좋은 부부 연기를 하는 것도 이제는 몹시 지겹기만 했다.

비록 처음에는 은혜를 빌미로 결혼했지만, 4년 동안 그녀는 진심으로 최경호를 사랑했다.

돌멩이도 반응을 보일 세월이었지만 최경호는 한 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여자와 아이까지 생겼다.

주나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최경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여전히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또 뭐가 문제야? 서아가 마침 산부인과 검진을 받으러 간다고 해서, 기분 전환도 시켜줄 겸 불꽃놀이를 보러 갔어. 그런 것까지 트집을 잡겠다는 거야?" 최경호의 차가운 목소리는 그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단 한 번도 주나연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적이 없었다.

주나연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날 밤, 내가 본가에 갔을 때, 차를 마신 후 어디로 끌려갈 뻔했는지 알아? 만약 추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난 최씨 가문의 치욕스러운 오점이 되어 빈털터리로 쫓겨났을지도 몰라."

최경호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봤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주나연의 가슴 깊숙이 꽂혔다.

"너의 할아버지께서 그 빚진 은혜를 내세워 널 나에게 시집보냈어. 만약 네가 정말 최씨 가문에 오점을 남겼다면, 우리 집안에서 너를 쫓아낼 때, 너는 거절할 자격도 없을 거야."

최경호는 백서아와의 일을 주나연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나연은 문득 최경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대학교 강단에서 정장을 입고 자신 있게 강연하던 그의 잘생긴 얼굴과 우월한 학벌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홀딱 반해버렸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3년간의 짝사랑과 4년간의 결혼 생활... 결국 그녀의 사랑은 줄곧 짝사랑에 머물러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중병으로 쓰러지셨을 때, 그녀는 홀로 모든 짐을 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곧바로 재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할머니를 돌봐야 하는 책임감에 짓눌려 있던 그녀는 최경호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그것도 일종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이미 밖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할아버지께서 증손자를 재촉할 때마다 당신이 왜 그렇게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는지 이제야 알겠네. 내가 눈이 멀었어. 최경호 씨가 성 기능에 문제라도 있는 줄 알고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최경호는 미간을 찌푸렸고 시선이 날카로워지며, 낮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너랑 잠자리를 가졌을 때, 네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건 기억 나? 그때는 왜 내 성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

주나연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날 밤의 고통스럽고도 수치스러운 기억이 스치자,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한 번 가지고 뭐가 대수라는 거야."

최경호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서서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일곱 번. 콘돔을 두 상자나 썼지. 게다가 넌 한밤중에 물을 두 번이나 마시겠다고 난리를 피웠지…"

주나연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최경호는 그녀를 향해, 항상 그러했듯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만해. 어차피 우리 이혼할 거니까 당신이 누구랑 아이를 낳든 나랑 상관없어. 마침 할아버지께서도 증손자를 안고 싶어 하셨으니 잘 됐네."

최경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문에 밀어붙였다.

"최씨 가문에 시집오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쓴 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이혼한다고?"

주나연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은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남이 먹던 건 난 즉시 쓰레기통으로 버려."

주나연은 돌아서서 방을 나서려다 화가 풀리지 않는지 다시 돌아와 최경호의 책상 위에 놓인 선인장 화분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최경호가 장시간 컴퓨터로 일하며 시력이 나빠질까 봐, 전자파 차단에 좋다고 해서 주나연이 고르고 고른 끝에 사 온 것이다.

지금 그녀는 선인장을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릴 생각이었다.

최경호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서재를 뛰쳐나온 주나연은 침실로 들어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변호사에게 연락해 이혼 합의서를 작성할 준비를 했다. 그때, 가방에서 작은 카드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주나연은 카드를 주워 들었고 남성 클리닉이라는 글자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병원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건넨 카드였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밀어 잠금을 해제했다.

회차 3

주나연이 사라졌다.

꼬박 24시간 동안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읽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최경호가 회사에서 막 업무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할아버지의 전화 폭격이 시작되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할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연이 전화가 왜 안 돼? 너도 연락이 안 되고. 너희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최경호는 고막이 터질 것 같아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떼었다.

그는 무심한 어조로 짧게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연이가 네 처인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이번 주말에 연이를 안 데리고 오면, 너도 집에 발 들일 생각 마라."

'뚝'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호기롭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최경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졌다.

비서 성안준이 조용히 들어와 계약서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미간을 꾸준히 찌푸리고 있는 상사의 얼굴을 보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흔적이 역력했다.

성안준은 살며시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그 헤드라인 기사... 사모님께 해명하셨습니까?"

최경호는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냉랭하게 되받았다. "내가 그 사람에게 해명할 의무라도 있다는 거야?"

성안준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법적인 부부시잖아요. 서로에게 충실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대표님 스캔들 기사가 나면 사모님께서 오해하실 수밖에 없는데, 남자가 여자를 울게 만드는 건 옳지 않죠."

성안준은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침대 위에서 울리는 건 빼고요."

최경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는 게 많네. 예전에 찍어봤어?"

질문이 다소 뜻밖이었다.

성안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뭘... 찍어봤다는 말씀이신지요?"

최경호는 짧게 대꾸했다. "야동 말이야."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주나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성안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모태 솔로였기에 그런 걸 찍어봤을 리가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다가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쭤보자면요... 지난번 사모님을 모시고 이동 중 일어난 그 추돌 사고 말입니다. 사실 대표님이 지시하신 거라고 사모님께는 말씀하셨습니까?"

최경호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관심사가 참 넓구나. 차라리 최씨 그룹 대표 자리에 네가 앉는 게 어때?"

눈치가 빠른 성안준은 즉시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대표님의 개인 비서로서 제 자리를 지키는 게 제 분수에 맞는 일입니다."

최경호는 왠지 모를 기분에 사로잡혔다. 주나연과 서로 침범하지 않고 지낼 때는 모든 것이 평온했다.

그녀는 매일 집에서 그의 식사를 챙겨줬고 세탁을 맡았으며 주말이면 그를 따라 본가에 가서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고 집안일을 도왔다.

어떤 문제도, 어떤 마찰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 후, 무언가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녀는 물처럼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뜨거운 열정을 마음껏 표출했다.

그 뜨겁고 격렬한 반응에,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그의 욕망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공백기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아니면 여자에 대한 기준이 너무 낮았던 걸까. 그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욕망에 조종당했다.

성안준은 나가기 전, 주머니에서 알레르기 약 한 통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번 대표님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으셨을 때, 이 약 바르니 효과가 좋더라고요. 목에 긁힌 자국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떤 여자가 키스 마크라도 남긴 줄 알겠어요."

최경호는 그 약을 흘끗 쳐다보았다. 직원들이 지방 특산물로 선물한 복숭아 몇 개를 한 번 만졌을 뿐인데 온몸에 두드러기와 따끔거림이 생겼었다.

연고통 뚜껑을 열자, 코를 찌르는 약 냄새가 퍼지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나연도 향을 조제할 줄 알았다. 그가 출장을 떠날 때마다 그녀는 작은 향 주머니를 그의 가방에 넣어주었고, 호텔에 도착해 화장실에 걸어두면 은은한 향기가 며칠간 지속되곤 했다.

집에도 항상 달콤한 귤 향이나 은은한 계화 향이 배어 있었다.

최경호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연고통을 다시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그는 성안준을 올려다보며 빈정대듯 말했다. "사람 찾으라니까 한 달째 소식도 없고, 이런 약 챙기는 건 빠르네. 집안이 대대로 약장수냐?"

성안준은 말문이 막혔다. 지난달 사모님께 사고가 났을 때, 대표님은 사모님의 구조 요청 메시지를 받았지만 긴급한 국제 회의가 잡혀 있었고, 게다가 그때 대표님과 사모님의 관계가… 다소 경색된 상태였기에, 그에게 직접 사모님을 모셔오라고 지시했었다.

그는 휴대폰 위치 추적을 통해 사모님이 타고 있던 차량을 찾아냈고, 그 차량의 뒤를 들이받는 방식으로 강제로 멈추게 했다.

운전 기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쥐새끼처럼 풀숲으로 도망쳐 버렸다.

성안준은 서둘러 보고했다. "소식 있습니다. 그 놈이 한 달 동안 잠복하다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은행 카드로 마사지샵에서 결제한 기록이 떠서 이미 애들 보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로 현행범으로 잡아 올 수 있을 겁니다."

곧 있을 회의를 앞두고 최경호는 시간을 더 낭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성안준은 대표님 대신 전화를 끊으려다 실수로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버렸다.

전화기에서 밝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최경호 고객님 맞으시죠? 어제 저희 조루 클리닉에 상담 신청을 해주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전문의 선생님의 무료 촉진 상담이 가능한데, 시간은 언제께 편하신가요?"

회의실 전체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주주들은 충격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최경호를 바라봤다. 젊고 건장해 보이는 대표님이, 그런 쪽에... 문제가 있다고?

성안준은 허둥지둥 전화를 끊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해명했다. "보이스피싱입니다! 이름이 우연히 같았나 봅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최경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안준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번호는 철저히 비공개된 개인 번호였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는 사람은, 그 겁 없는 여자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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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녀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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