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에이펙스 그룹의 CEO 라운지.
노주은은 침대에서 일어나 재빠른 몸짓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셔츠와 미니 스커트를 입었다. 조금 전의 전희가 일렁이는 매혹적인 눈빛이 얼핏 보였다. 노주은과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에이펙스 그룹의 CEO로, 노주은의 상사이자 후원자인 주태오였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관계는 CEO 라운지에서만 이뤄졌다. 라운지 밖에서 노주은은 주태오의 비서에 불과했다.
"대표님, 더 시킬 일이 없으면 저는 이만 업무를 보러 가 보겠습니다." 노주은이 연습했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과 함께 노주은이 긴 머리를 만두머리로 올려 묶자, 유혹적이었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엄격하고 전문적인 커리어 우먼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좀 전까지 남자와 몸을 섞었다고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주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섬세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이가 돌아왔어."
라운지 문을 열고 나가려던 노주은은 주태오의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몸은 경직되었고,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노주은은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6년 동안 기다려온 주태오의 첫사랑 류우연이 돌아왔다. 주태오에게 노주은은 욕구 해소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난 2년 동안 주태오는 노주은이 살아갈 유일한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침대 위에서 함께하는 순간 뿐이라는 것을 노주은은 잘 알고 있었다.
주태오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있는 바지를 찾아 입으며 말했다.
"너랑은 상관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노주은에게 셔츠를 건네주자,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셔츠를 입혀주기 시작했다.
정교롭게 만들어진 단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주태오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다시 울렸다. "이혼 합의서 만들어 와."
노주은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주태오의 날카로운 턱선과 얇은 입술을 살펴보았다.
"그 여자, 나 때문에 6년이라는 긴 시간을 허비했잖아. 충분하지." 그는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끌어올리며 노주은에게 건넸다. "어떻게 생각해?"
노주은은 아무 말도 없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넥타이를 받아 들었다.
주태오는 지금 그의 아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비서이자 애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노주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바로 주태오의 비밀 아내.
6년 전, 노주은의 어머니는 암을 선고 받아 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치료비는 비쌌고,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된데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았던 노주은에게 주씨 가문은 친절하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다.
그 고마운 은혜에 대하여 노주은은 줄곧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이후 주태오의 약혼자 류우연이 그를 떠나 해외로 이주했고, 그로 인해 여러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급히 주태오는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아내가 필요했다. 그때, 주태오의 할머니가 노주은을 찾아왔고, 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하게 되었다.
노주은은 주씨 가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무 요구도 없이 주태오의 아내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결혼 후에도 어머니의 치료비를 계속 대야 했던 노주은은 작은 회사를 떠나 에이펙스 그룹에 입사했다.
그제서야 노주은은 주태오가 에이펙스 그룹의 CEO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태오는 결혼식 날 겨우 한 번 본 노주은을 알아보지 못했다.
회차 2
하지만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에이펙스 그룹에 머물러야 했다. 노주은은 주태오와 마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두 사람은 술에 취해 함께 밤을 보내고 말았다. 그 날 밤 이후로 주태오는 노주은을 자신의 비서로 승진시켰다.
노주은이 마음에 든 주태오는 몇 번이나 자신과 잠자리를 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그녀를 자신의 배드 파트너로 만들고 말았다.
주태오가 부를 때마다 노주은은 군말 없이 그와의 잠자리에 응했다. 애완동물을 키우듯 주태오는 때때로 노주은에게 원하는 보상을 주기도 했는데 돈이 필요할 때는 직접 돈을 요구했고 돈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그를 거절하기도 했다.
노주은은 주태오 앞에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냥 비즈니스 관계로 치부하기는 싫었다.
노주은은 몇 번이고 이런 관계를 끝내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막대한 치료 비용으로 인해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주태오를 사랑하게 되었다.
노주은은 자신이 주태오에게 맞는 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그를 위해 헌신하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이제 류우연이 돌아왔다.
주태오의 비서 자리도 아내 자리도 다 그 여자에게 내줘야 했다.
열심히 지켜온 두 역할, 그 어느 하나도 주태오에게 유일한 존재로 남지 못했다. 노주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를 알아차린 주태오는 혼란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는 거지?" 그가 물었다.
노주은은 주태오의 넥타이를 고쳐 맨 다음 까치발을 하고 그의 옷깃을 정리했다.
"기뻐서요. 대표님이 사랑하는 분이 돌아오셨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노주은은 심호흡을 한 다음 뒤로 물러나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주태오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몰려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모범적인 비서야, 노주은." 그가 말했다.
노주은이 매번 저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주태오는 자신의 매력을 의심하곤 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미소를 지으며 모른 척 대답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녀가 떠나려고 몸을 돌리자, 주태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합의금 40억 줘." 그가 말했다.
노주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혼 후에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합의하셨는데요."
주태오가 입을 열었다. "자그마치 6년이야. 집안 사정도 안 좋은 것 같던데. 그냥 주고 끝내."
주태오는 지시를 내린 후 라운지 밖으로 나갔다.
책상 앞에 앉은 그는 6년 전 구청 입구에서 만났던 소심한 젊은 여성을 떠올렸다.
당시 자신을 강제로 결혼시킨 가족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주태오는 아내가 될 사람에게는 조금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결혼 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지난 6년 동안 그에게나 주씨 가문에게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노주은과 비슷했다.
그 결과 아내를 매우 좋게 본 주태오는 그녀에게 40억의 이혼 합의금을 주기로 했다.
이혼 합의서 작성을 마친 노주은은 주태오에게 합의서를 전송했다. 그의 승인이 떨어지자 노주은은 합의서를 프린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태오와 노주은은 류우연을 데리러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은 함께 모여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과 여행을 앞두고 기대에 부푼 얼굴로 짝을 지어 걸음을 옮기는 커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 틈에서 주태오와 노주은은 단연 돋보였다.
주태오는 정교하게 재단된 슈트를 입고 있었다. 날렵한 이목구비와 아우라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회차 3
그는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도착 게이트를 바라봤다.
노주은은 침착하게 그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진 긴 머리와 가벼운 메이크업으로 그녀의 이목구비가 더욱 돋보였다. 주태오가 자신을 데리고 공항에 갈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노주은은 신경 써서 옷을 차려 입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주태오가 그녀를 보고 놀라는 걸 보니 마냥 시간낭비는 아닌 것 같았다. "평소보다 낫네."
그 말에 노주은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갑자기 도착 게이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주은은 사람들을 살피며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물결치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캐리어를 끌며 걸음을 옮겼다.
선글라스 너머 여자의 시선은 주태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여자는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주태오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류우연은 캐리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주태오에게 달라붙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나 왔어. 미안해..."
그들의 포옹을 목격하자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곤두박질쳤다.
노주은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 류우연의 캐리어를 찾기 시작했다.
캐리어가 꽤 멀리 날아가서 분주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조금 어색한 몸짓으로 캐리어를 챙겨 돌아온 노주은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야 할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지 고민하며 망설였다.
류우연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주태오의 손길을 느끼며 마치 그가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그의 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노주은은 점점 더 평점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한 침대에서 살을 부볐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다행히도 아까 바른 립스틱 덕에 창백한 얼굴을 숨길 수 있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 오빠는?" 류우연이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해 보였다.
노주은은 류우연의 상대가 안 됐다. 옷차림은 물론이고, 류우연처럼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애교를 떨지도 못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주태오가 부드럽게 말했다. 바로 그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주은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 주태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류우연은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바라보며 후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잘 할게."
"늦었어. 가자." 주태오는 자책하는 듯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노주은은 준비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대표님, 류우연 씨, 이쪽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주태오가 앞장 서며 말했다. "가자." 노주은은 캐리어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수년 동안 그와 함께한 탓에 주태오의 빠른 보폭에 맞추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류우연은 두 사람의 걸음 속도에 맞추기 위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빠르게 걸어야 했다.
"태오 오빠 비서 분이세요?" 류우연이 살짝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노주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일을 정말 잘 하시겠네요. 우리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친하게 지내요. 제가 나중에 카카우톡 친구로 추가할게요." 류우연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