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질듯한 굉음이 장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어머, 어떡하면 좋아. 기둥이 완전히 무너졌잖아. 빨리 사람부터 구해야지!"

임시로 설치한 무대 기둥이 무너지면서 두 명의 주연 여배우와 수십 명이 넘는 댄서들이 바닥에 쓰러져,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끊어진 나무판자에 다리가 끼인 안채린이 안간힘을 쓰며 다리를 빼내고 있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소란을 뚫고 들려왔다. "다들 빨리 밖으로 나와. 조명을 매단 줄이 끊어질 것 같아."

당황한 안채린이 고개를 들자 화려한 샹들리에가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서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샹들리에가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분명 크게 다칠 것이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안채린은 판자 아래 파묻힌 다리를 빼내려고 애를 썼다.

다리를 잡아당길 때마다, 가녀린 다리가 날카로운 파편에 베여 빨간 피가 흘러 내렸다. 만약 억지로 다리를 빼낸다면, 피부 전체가 벗겨질지도 모른다.

무력감에 무대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는 익숙한 그림자가 빠르게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약혼자 박운재였다.

희망을 느낀 그녀가 손을 내밀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려 할 때, 박운재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달려간 그는 이유비를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유비야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운재 오빠!" 이유비는 서럽게 흐느끼면서 박운재의 목을 꼭 껴안았다.

박운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유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더니,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안채린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고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분명 안채린이 그와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쓰러졌고, 그녀야말로 그의 약혼녀인데...

운명은 그녀에게 왜 이리도 가혹한 걸까? 갑자기, 조명 끈이 끊어지면서 무대 전체가 암흑에 빠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박운재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안채린은 힘을 다해 간신히 다리를 빼냈다. 그 순간, 판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왼쪽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안도감도 아주 잠깐,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단숨에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샹들리에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본능적으로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안채린은 또 다른 누군가가 이미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조명이 환하게 켜진 무대, 상황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본 안채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결국 박운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샹들리에가 그녀의 몸에 떨어지는 중요한 순간에도, 그는 이유비를 다정하게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가 변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유비의 가녀린 팔은 여전히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안채린은 씁쓸한 기분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박운재가 다시 그녀를 구하러 온 건 아닐까 기대를 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 순간, 무대 아래에서 감독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명 감독 어디 있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조명이 사람 몸에 떨어졌으면 큰 사고로 번질 뻔했다고!"

감독의 잔뜩 화난 모습을 발견한 조명 감독은 잘못을 다른 스태프에게 돌리기에 바빴다.

소란 속에서, 드디어 안채린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박운재가 그녀의 왼쪽 다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안채린은 그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때, 그의 품에 안긴 이유비가 겁먹은 얼굴로 외치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안채린, 너 정말 날 죽이려고 했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안색이 확연히 굳어진 박운재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유비가 눈물을 쥐어 짜내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채린이 조명을 설치할 때 와이어에 손을 쓰는 것을 봤어. 그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나한테 이번 연극 주인공 자리를 두고 경쟁할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어. 난 그저 준비한 시간이 아까워 시도만 해보려 했을 뿐인데..."

이유비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박운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그냥 내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뿐인데, 채린이 이런 수단까지 쓰면서 날 쫓아내려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학교의 연극 동아리의 최신작 '파랑 나비'가 곧 공연을 앞두고 있다. 이 연극에 출연하는 학생은 명문 국립 극단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므로 누구나 연극에 출연하고 싶어 했다. 특히, 여주인공을 뽑는 오디션은 그야말로 치열했고, 결국 안채린과 이유비가 후보에 올랐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고 한 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무대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조명은 이유비가 섰던 곳에 떨어졌을 거야."

"어머. 만약 연습하고 있을 때, 조명이 떨어졌다면 당장에 즉사했을 수도 있었단 말이잖아. 고작 여주인공 자리 하나 때문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여주인공 자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박 대표님은 이유비한테 호감이 있지만, 박씨 가문에서는 안채린을 박 대표님의 약혼녀로 점 찍으니까 안채린은 더 기고만장해서 이유비를 계속 괴롭혔던 거고. 어쩌면 이번 연극 여주인공 자리 때문이 아니라도 조만간 이유비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라."

그 댄서의 말을 들은 이유비의 두 눈에 승리의 불꽃이 번뜩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박운재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운재 오빠,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좋겠어."

이유비는 가녀린 모습으로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정의감에 불타오른 사람들은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모두가 안채린을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그녀를 거세게 비난했다.

적대감에 찬 사람들의 태도에 안색이 확연히 굳은 안채린은 주먹을 꼭 쥔 채 결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경찰에 신고해. 하지만 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인정할 수 없어!'

회차 2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노에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박운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모자라?"

그의 말에 안채린은 범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 나는 것을 느낀 안채린은 소매 아래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의 말조차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가 이토록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아차렸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안채린이 입술을 꽉 깨물며 단호한 눈빛으로 박운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박운재는 그녀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감독을 돌아봤다. "오늘 일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곧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손목은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 병원에 데려다 줄게."

수줍게 얼굴을 붉힌 이유비가 그의 품에 얼굴을 살짝 파묻었다. 두 사람은 모두의 시선을 뒤로한 채 다정하게 밖으로 나섰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홀로 남겨진 안채린은 뼛속까지 저미는 오한이 덮치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그녀의 약혼자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에 고민도 하지 않고 그녀를 버렸던 것이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진 것을 느낀 그녀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감독은 그녀를 연극단에서 쫓아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박운재가 나서서 오늘 사건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연극단에서 꽤 인기가 있었던 안채린은 한 순간에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 되었다.

웃음과 활기로 가득 찼던 공간에 적막만 가득 남았다.

그녀는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힘겹게 이끌고 절뚝거리며 간신히 밖으로 나갔다. 왼쪽 다리를 타고 흐르던 핏자국은 이미 말라 있었고, 상처 주위에 박힌 나무판자 파편은 보고만 있어도 섬뜩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계단에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눈 부신 조명처럼 비춰졌다. 계단 바로 앞에 멈춰 선 세단 뒷문이 열리며, 차가운 인상의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 그 남자의 얼굴에 비친 조명 덕분에, 그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남자를 발견한 안채린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서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삼, 삼촌?"

그 남자는 박현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박운재의 삼촌이다. 안채린은 박운재와 약혼한 사이였기에, 박씨 가문 일원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안채린." 박현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마력이 묻은 듯, 안채린은 잠시나마 고통을 잊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이내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내가 널 안아서 차에 태워줄까?"

그녀의 의사를 묻는 담담한 말투였지만, 안채린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당혹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전 괜찮아요."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은 박현진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빼어난 외모와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에 비하면 박운재는 감히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고, 사람들 모두 박현진을 박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오해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과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날카로운 인상에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박씨 가문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안채린조차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우아하게 팔을 들어 올리자 정교한 커프스 단추가 조명에 반짝이며 빛을 냈다.

"내가 부축해 줄게."

안채린은 그의 호의를 거부하려는 순간, 그의 엄지손가락 아랫부분 근처에 미처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그의 손을 움켜잡고 충동적으로 손을 뒤집어 보니, 손바닥에 금방 생긴 것으로 유추되는 상처가 가득 나 있는 것이었다.

사고 당시 조명이 다시 밝혀졌을 때, 누군가 그녀의 다리를 누르고 있던 나무판자를 힘으로 부러뜨린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며 코가 시큰해 난 안채린은 자기도 모르게 움켜쥔 손에 힘을 줬고, 그러자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언제까지 쳐다볼 거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연하고 담담하기만 했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안채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죄, 죄송해요. 제가 깨끗하게 닦아드릴게요." 당혹감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심한 결벽증이 있는 박현진은 다른 사람이 그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신체 접촉은 아예 허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조차도 그의 개인 공간을 침범할 수 없었고, 하인들이 실수로 그의 몸을 다치는 날이면, 그는 샤워를 몇 시간 동안이나 했었다.

이것은 박씨 가문 일원이라면 누구나 상기해야 할 금기사항이었다.

서둘러 주머니를 뒤진 안채린은 오늘 물티슈를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잠깐 편의점에 다녀올게요." 그녀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살짝 섞여 있었다.

그러나 박현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아래로 내려 상처를 감췄다.

"난 괜찮으니까, 먼저 차에 타. 병원에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야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안채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는 박현진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 양호실에서 간단하게 치료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 생각을 말하기도 전에, 박현진은 이미 뒷자리에 올라탔다.

널찍했던 뒷자리가 그의 긴 다리 때문에 비좁게 느껴졌다.

은은한 우디 향과 함께 차가운 공기가 전해졌지만, 따뜻한 온기가 마음에 가득 퍼졌다.

티 나지 않게 옆으로 몸을 움직인 안채린은 작은 손으로 치마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삼촌,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다시 시동을 건 차가 출발하며 칸막이를 올리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창백한 얼굴을 한 안채린은 이마에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창 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무서워?" 침묵을 깨고 들려오는 박현진의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전해졌다.

"아니요!" 달리는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한 안채린이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녀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어색하게 눈치를 살폈다. "삼촌이 극단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어요..."

회차 3

박씨 가문에서 후계자 수업을 듣는 자제는 많았지만, 박씨 어르신은 박현진을 제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박현진은 박씨 그룹을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 자리를 쟁탈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배신하는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외에서 사업체를 운영해 가문의 그늘 밖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안채린은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박운재와 약혼했지만, 박현진을 만난 횟수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박현진을 그리워하는 박씨 어르신이 간간히 소식을 전해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선보이는 연극인 만큼, 아무리 학교 총장님이라 할지라도 감히 박현진을 초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안채린을 가만히 쳐다보는 박현진은 그녀의 대답을 갈구하는 듯했다.

사실, 안채린은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을 무마하기 위해 일부러 그 말을 했을 뿐, 박현진의 일정을 꼬치꼬치 캐물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안채린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중요하지 않아요."

짙은 속눈썹 아래 피어 오른 감정을 감춘 박현진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빠르게 달린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다.

고작 피부가 긁힌 상처였지만, 박현진은 외과에서 실력이 제일 훌륭한 의사를 불러 진료하게 했다. 검사를 마친 후, 단순 마찰상에 춤을 추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까지 듣고 나서야 안도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안채린은 작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과분하고 낯선 VIP 대접에 두 볼이 수줍게 물들었다.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간 후, 간호사에게 소독약과 거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그녀는 손에 일회용 장갑을 끼고 박현진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삼촌, 손 내밀어 보세요. 최대한 살이 닿지 않게 조심해서 할게요."

조금 전, 간호사가 박현진의 손바닥을 치료해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녀를 구하려다가 난 상처이기 때문에, 안채린은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한참을 설득해야 할 줄 알았으나, 박현진이 순순히 손을 내밀자 그녀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는 최대한 살결이 닿지 않게 치료를 끝낸 후, 거즈로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완벽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안채린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반짝이는 두 눈에는 아까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느낀 절망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가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박현진이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를 따라 병원을 나선 안채린은 계속 박현진의 신세를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에 멈춰 서서 손을 내저었다. "삼촌, 조심해서 가세요."

우뚝 자리에 멈춰 서 뒤를 돌아보는 박현진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다시 학교에 안 돌아가?"

안채린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에 그녀는 바로 통화를 거절했다.

호기심에 그녀의 핸드폰을 흘깃 쳐다본 박현진이 다시 물었다. "어딜 가려고? 내가 태워다 줄게."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고, 이번엔 통화가 아니라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안채린은 눈살을 깊게 찌푸리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는 마침 병원 앞에 멈춰 서 있는 택시에 망설임 없이 올라탄 후 박현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주먹을 세게 움켜쥔 채 그 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그의 손에 난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택시에 올라탄 안채린이 주소를 말하자 택시는 빠르게 병원을 벗어났다.

소품 팀 스태프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 이유비가 무대 조명 줄을 건드리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녀가 무대를 설치하는 스태프를 매수해 무대 기둥 몇 개를 설치하지 말라 시켰다고 주장했다.

제보자는 직접 만나서 거래를 하고 싶다면서, 돈을 챙겨오면 증거 영상을 주겠다고 했다.

박운재의 차가운 반응에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이대로 죄를 뒤집어쓸 수 없는 노릇이다.

어두운 조명만 희미하게 밝혀진 룸에 차림새가 불량한 남자 여섯 명이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그 중 한 남자가 바로 소품 팀 스태프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안채린이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증거 영상 어디 있어? 영상만 확인하면 600만 원 바로 입금할게."

안씨 가문은 박씨 가문만큼 대단한 재벌 가문은 아니었지만, 꽤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리하여 안채린은 고민도 하지 않고 600만 원을 입금하기로 했다.

"이유비가 선을 넘은 행동을 해서, 나도 눈감아줄 수 없었어." 그 스태프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태블릿을 건네주며 계속해서 말했다. "분명하게 말해두지만, 네가 이유비한테 어떻게 복수하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이 문을 나가면 우리 거래는 없던 일이고, 절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거야."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 안채린은 그 스태프가 건넨 술잔을 받아 들고 잔을 부딪치더니 한 모금에 술을 비운 후,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태블릿의 영상 파일을 클릭한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결정적인 증거를 영상으로 남길 준비까지 마쳤다.

갑자기 화면을 가득 채운 기괴한 영상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당장 태블릿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룸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 떨어진 태블릿에서 새어 나오는 남자의 저속한 말과 여자의 끈적한 신음소리가 안채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도망치려 할 때, 거친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안채린, 넌 오늘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어... 악!"

안채린은 두 손으로 그의 어깨와 팔을 둘러멘 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남자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발 밑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키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이것 참 안타깝게 됐어. 오늘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을 거야. 내가 평소보다 약을 3배나 더 탔거든. 10분도 안 돼서 태블릿에서 본 여자처럼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게 될 거야."

안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계속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등 뒤에서 들리는 벨트를 푸는 소리와 조롱 섞인 웃음소리에 그녀는 더욱 공포감에 휩싸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절망과 후회의 물결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 작은 희망마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굉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리며 번개처럼 나타난 그림자가 단숨에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어두운 조명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와 살기 가득한 눈빛은 저승사자가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촌, 절 도와줘요." 안채린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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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없어,작은 삼촌의 애인이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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