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아들의 기일에, 나는 남편이 자신의 임신한 내연녀와 함께 있는 신성한 별장을 찾아냈다.
그는 내게 그들의 청첩장을 보냈다. 내가 아들을 잃은 트라우마로 ‘더럽혀졌다’고 말하는 녹음 파일과 함께. ‘순수한’ 후계자를 얻기 위해 나를 몰래 불임으로 만들었다는 고백도 담겨 있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했다. 나는 그 결혼식에 참석해 그의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기로 결심했다.
제1화
서이현 POV:
강태준과 내가 만든 첫 번째 규칙은 서로의 전화는 무조건 받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것은 우리가 텅 빈 위장과 야망으로 가득 찬 주먹밖에 없던 어린 시절, 비에 젖은 서울의 뒷골목에서 피와 절망으로 새긴 규칙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기일에 남편의 전화가 다섯 번이나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을 때, 나는 그가 단지 바쁜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매년 오늘, 우리는 세상과 담을 쌓았다.
어떤 거래도, 회의도, 전화도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깨끗한 돈 10억을 벌어 산, 북쪽으로 두 시간 거리의 호숫가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우리의 성역이었다. 우리가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아들을 위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허락된, 조용하고 신성한 땅이었다.
우리는 하얀 초 하나를 켜고 낡은 나무 현관에 앉아 해가 수평선 아래로 잠겨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물을 물들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었다.
숨 막히는 상실의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조용한 약속.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킹사이즈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떴다. 그의 쪽 시트는 차갑고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뱃속에 얼음덩이가 맺히는 기분이었다.
정오가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얼음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세 시가 되자, 그건 내 폐를 짓누르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었다.
몇 년 전, 그가 경쟁 조직의 칼날로부터 나를 보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강철 칼날이 그의 등을 깊게 파고들었고, 영원히 남을 흉터를 남겼다.
그는 내 위로 쓰러졌고, 그의 피가 내 뺨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는 속삭였다.
“나 여기 있어, 이현아. 언제나 여기 있을게.”
그는 늘 그랬다.
20년 동안, 강태준은 혼돈으로 점철된 내 인생의 유일한 상수였다.
그는 내 파트너이자 전략가였고, 우리가 무에서부터 쌓아 올린 제국의 설계자였다.
이제 그는 그냥… 사라졌다.
“준호 씨.”
나는 위험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기에 말했다.
“강태준 차, 위치 추적해. 지금 당장.”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GPS 신호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울렸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별장에 있었다.
나 없이 혼자 그곳에 갔다.
운전하는 동안 앙상한 겨울나무와 잿빛 하늘만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내 부하들이 탄 검은색 SUV들이 내 차를 호위했다.
그들은 묻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리고 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내가 적대적 인수를 앞두거나, 우리를 배신한 놈을 부숴버리기 직전에 짓는 표정이었다.
전쟁을 준비하는 여왕의 얼굴이었다.
자갈이 깔린 긴 진입로에 들어서자 타이어가 뼈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그의 검은색 세단이 현관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다른 차가 있었다. 싸구려에 낡아빠진 소형차.
별장의 소박한 우아함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마치 의도적인 모욕처럼 느껴졌다.
나는 부하들에게 대기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차에서 내렸다.
공기는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보았다.
강태준이 벽난로 옆에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작고, 검은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흐트러진 채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가 지난 생일에 선물한 부드러운 회색 캐시미어 셔츠.
그것은 그녀의 가녀린 몸에 헐렁하게 걸쳐져 있었고, 소매는 그녀의 손을 삼켜버렸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귀 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가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할 때 나를 만지던 방식과 똑같았다.
내 심장을 사랑으로 아프게 만들던, 다정하고 소유욕 넘치는 그 몸짓.
그가 다른 여자에게 그러는 것을 보는 것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킥킥거렸다. 가볍고 공기 같은 소리가 내 고막을 긁었다.
그리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에게 키스했다.
세상이 기울었다. 폐 속의 공기가 재로 변했다.
이것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이것은 모독이었다.
그는 그녀를 여기에 데려왔다. 우리의 장소에. 우리 아들의 장소에.
순수하고 눈을 멀게 하는 분노가 나를 덮쳤다.
나는 정문을 지나 물가에 우리가 지은 작은 돌 기념비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하준’이라는 이름 하나만 새겨진 단순하고 평평한 돌이 있었다.
그 옆에는 내가 임신했을 때 강태준이 한 달 동안 깎아 만든 작은 목마가 있었다.
그는 모든 왕에게는 군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작은 목마를 보았다. 그것의 칠해진 눈은 잿빛 물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창문 너머, 우리 집의 온기 속에서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내 남편을 보았다.
내 발이 튀어나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목마를 찼다.
그것은 얼어붙은 땅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나무는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머리는 깨끗하게 부러져 내 발치에 굴러와 멈췄다.
소리는 충분히 컸다.
별장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강태준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굳어 있다가 이내 차갑고 계산적인 무언가로 변했다.
그 여자, 가을이 그의 뒤에서 엿보았다. 그녀의 눈은 두려움과 반항심이 뒤섞여 커져 있었다.
그녀의 싸구려 꽃향수 냄새가 따뜻한 공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역겨울 정도로 달콤해서 토할 것 같았다.
내 부하들은 이제 차에서 나와 무기에 손을 얹고 내 뒤에 조용하고 위협적인 벽을 형성했다.
강태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부하들로, 그리고 부서진 목마 조각으로 옮겨갔다.
고통 같은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사라졌다.
“이현아.”
그가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우리 아들 기일이라서 왔어.”
내 목소리는 낮고 위험하게 울렸다. 나는 턱으로 그 뒤에 움츠리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넌 누굴 데려온 거고?”
그 여자, 가을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너무 어리고 연약해 보였다.
마치 세상이 내게서 모든 부드러움을 앗아가기 전의 내 모습 같았다.
강태준은 그녀를 부드럽게 자기 뒤로 더 밀었다. 그 보호적인 몸짓이 내 배 속의 칼을 비틀었다.
그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하곤 했다. 그는 나의 방패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한심한 변명을 시도했다.
“아니라고?”
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네가 우리 아이를 애도하는 곳에 네 창녀를 데려왔잖아. 우리가 지은 집에서 네 셔츠를 입게 했고. 말해봐, 태준아. 내가 이 상황에서 뭘 오해하고 있는 거지?”
그는 움찔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었다.
그는 항상 열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가였다.
하지만 이번 수는 보지 못했다. 내가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름은 가을이야.”
그는 마치 그게 중요한 것처럼 말했다.
“그년 이름 따위는 상관없어.”
나는 뱉어냈다.
“상관있는 건 그년이 여기, 우리 집에, 바로 오늘 있다는 거야.”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10초 줄게. 내 눈앞에서 저 애 치워. 그러고 나서 너랑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는 가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순간, 내 심장의 마지막 조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너무 낮아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아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이, 여기 있을 거야.”
내 세상은 그냥 기울어진 게 아니었다.
아예 회전을 멈췄다.
그는 그녀를 선택했다.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 내 부하들 앞에서. 우리 아들의 유령 앞에서.
나는 그를,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쳐다보았다.
등에 흉터가 있는 남자, 내가 굶주렸을 때 나를 위해 빵을 훔쳤던 남자, 우리가 아이를 잃은 후 사흘 내내 나를 안아주었던 남자.
나는 더 이상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좋아.”
얼어붙은 공기 속에 그 한마디가 매달렸다.
나는 부하들을 향해 돌아섰다. 내 목소리는 여왕이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맑고 단호했다.
“저 애, 끌어내.”
회차 2
서이현 POV:
그 말은 얼어붙은 공기 속에 매달렸다. 명령이자 사형 선고였다.
내 부하들은 내가 수년간 길러온 충성과 폭력의 완벽한 집단처럼 한 몸으로 움직였다.
강태준의 몸이 긴장했고,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항상 총을 두는 허리 뒤쪽으로 향했다.
“이현아, 하지 마.”
그가 낮은 으르렁거림으로 경고했다.
침착한 전략가는 사라지고, 우리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궁지에 몰린 짐승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경고를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신뢰는 20년 동안 굳건하고 움직이지 않는 산과 같았다.
단 하루 오후 만에, 그는 그것을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손을 뻗으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일단 얘기부터 하자.”
나는 그의 손길이 나를 태울 것처럼 움찔하며 물러섰다.
“감히 내 몸에 손댈 생각 마.”
나는 쉭쉭거렸다.
“그년한테 닿았던 그 손으로.”
그 여자, 가을이 그의 뒤에서 흐느꼈다. 그녀의 크고 갈색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보였다. 십자선에 걸린 새끼 사슴처럼.
연기 한번 잘했다.
“우린 끝났어, 강태준.”
나는 산성 같은 맛이 나는 말을 뱉었다.
“이거, 우리, 이 제국… 다 끝났어. 이혼하고 싶어.”
그는 정말로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혼? 이현아,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이성적?”
쓴웃음이 내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이성적인 걸 원해?”
나는 코트 안에 숨겨둔 권총을 꺼냈다. 차가운 금속이 손안에서 익숙한 위안을 주었다.
나는 그를 겨누지 않았다. 그녀를 겨눴다.
“이성적인 건, 내 가족의 기억을 모독한 네년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는 거지.”
공기는 긴장감으로 터질 듯했다.
내 부하들도 무기를 뽑아 들었고, 우리의 폐허가 된 성소의 문 앞에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가을은 작고 질식할 듯한 흐느낌을 터뜨렸다.
“비켜, 강태준.”
내가 명령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근육과 분노의 벽이 되어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
“나를 먼저 쓰러뜨려야 할 거야.”
“날 시험하지 마.”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겨울의 정적 속에서 귀를 먹먹하게 했다.
총알은 그녀를 맞히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총알은 그녀의 머리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나무 문틀에 박혔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을은 날카롭고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이가 갈렸다.
그녀는 강태준에게 쓰러지듯 기댔고, 몸을 주체할 수 없이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움직였다.
몇 년 만에 본 것 중 가장 빠르게.
그는 두 번의 긴 걸음으로 우리 사이의 공간을 가로질렀고,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꽉 움켜쥐며 내 팔을 아래로 눌렀다.
그의 악력은 엄청나고 무자비했다. 날카롭고 짜릿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만해.”
그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이를 갈며 말했다.
한때 나를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의 검은 눈은 이제 차갑고 단단한 흑요석 조각 같았다.
손목에 가해지는 압력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등에 있는 흉터를 보았다. 그가 나를 위해 얻은 상처.
지금 내게 이토록 큰 고통을 주는 이 손은, 우리의 옛 삶의 잔해에서 나를 몇 번이고 끌어내 주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내 눈에서 흘러나와 차가운 뺨을 타고 내렸다.
나는 팔의 통증 때문이 아니라, 가슴속의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을 보자, 그의 무언가가 흔들렸다. 그의 악력이 아주 잠시 느슨해졌다.
그것이 내가 필요했던 유일한 틈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가 보호해야 할 소녀가 아니었다.
나는 여왕이었다.
나는 그의 추진력을 역이용해 몸을 비틀었고, 무릎으로 그의 배를 세게 찼다.
그는 신음하며 뒤로 비틀거렸고, 그의 손은 내 손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내 팔은 쓸모없는 각도로 매달려 있었고 손목은 비명을 질렀지만, 내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바로 세웠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걱정스러워 보였다.
“손목.”
그가 내게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어디 봐봐.”
그는 다시 내게 손을 뻗었다. 내 상처를 고쳐주려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습관.
우리가 어렸을 때 그가 내 상처를 닦고 붕대를 감아주던 방식과 같았다. 그의 손길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저리 가.”
나는 뒤로 물러서며 으르렁거렸다.
그는 멈춰 섰다. 그의 손은 우리 사이의 허공에 머물렀다.
“이현아, 너 다쳤어.”
“날 다치게 한 건 너야.”
나는 쏘아붙였다.
“이건,”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좋은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고칠 수 있어. 네가 저 안에서 한 짓은,”
나는 별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고칠 수 없어.”
내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이 그에게 와닿은 듯했다.
그의 눈에 서린 걱정은 익숙하고 지친 체념으로 바뀌었다.
그는 나를 알았다. 내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선을 그었을 때를 알았다.
나는 그의 너머, 현관에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를, 내 세상의 전부였던 남자를 보았다.
“끝났어, 강태준.”
나는 속삭였다. 그 말은 내 영혼에서 찢겨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별장에게,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20년에게 등을 돌렸다.
나는 순전히 의지력만으로 내 차를 향해 걸어갔다.
내 오른팔인 준호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회장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으로 가.”
나는 마지막 단어에서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차가 멀어지면서 나는 백미러를 보았다.
강태준은 여전히 거기에 서서 내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막으려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떠나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고 그의 팔에는, 울고 있는 여자를 안고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선택을 끝냈다.
회차 3
서이현 POV:
나는 우리 펜트하우스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서울의 도시 불빛이 흩어진 다이아몬드처럼 아래에서 반짝였다.
이혼 서류는 광택 나는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서명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이틀. 변호사는 세 번이나 전화했다.
강태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우리가 만든 삶의 모든 구석을 채우는 숨 막히는 존재.
나는 싸움, 협상, 전쟁을 예상했다.
원나잇 스탠드처럼 잠수 이별을 당할 줄은 몰랐다.
사흘째 되던 날, 소포가 도착했다.
택배 기사가 배달한 작고 우아한 상자. 강태준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반송 주소는 일반 사서함이었다.
나는 흔들림 없는 손으로 그것을 열었다.
안에는 검은 벨벳 위에 은색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강태준과 가을의 사진이었다.
그들은 별장에 있었다. 그는 현관 그네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그의 무릎에 웅크리고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대중에게 보이는 계산된 미소가 아니라, 눈가에까지 번지는 진심 어린 부드러운 미소.
그가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던 그런 미소였다.
그의 손은 그녀의 배 위에 보호적으로 얹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섬세하고 동그란 필체로 쓴 쪽지가 있었다.
‘오빠가 내가 당신을 닮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늙었고, 더는 그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잖아요. 나는 할 수 있어요. 미래는 우리 거예요.’
쪽지 안에는 초음파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막 시작된 생명의 작고 흐릿한 이미지.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이미지를 응시했다. 차갑고 체계적인 분노가 내 안에서 쌓여갔다.
그는 나를 대체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 아들을 대체하고 있었다.
“준호 씨.”
나는 인터콤에 대고 말했다.
“그 여자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여자 찾아내.”
그녀가 일했던 시내 커피숍의 고용 기록에 적힌 이름은 김가을이었다.
그 아이러니는 너무나 지독해서 역겨웠다.
그는 내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자를 찾았다.
싸구려 모조품.
내 계획은 간단했다.
강태준이 서류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좋아.
내가 이유를 만들어 주지.
나는 그의 소중한 새 미래를 빼앗고, 그가 지켜보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이틀 후, 산부인과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를 찾아냈다.
내 부하들은 프로였다. 그녀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검은 밴에 실렸다.
만남의 장소는 낡은 조선소였다. 도시 변두리의 녹과 폐허의 장소.
우리가 많은 거래를 성사시키고 많은 목숨을 끝냈던 곳.
하늘은 납빛이었고, 내 영혼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무겁고 억압적인 회색이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은 진눈깨비가 내릴 것을 예고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가을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크레인에 하네스로 묶여, 출렁이는 얼음장 같은 운하 물 위 6미터 상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하고 눈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나를 보자 그녀의 두려움은 한심한 허세로 변했다.
“이것 때문에 오빠가 널 죽일 거야!”
그녀는 바람에 맞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태준 오빠가 널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라고!”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부두 끝으로 걸어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바람에 불꽃이 흔들렸다.
“강태준은 여자는 안 죽여.”
나는 연기를 내뿜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그의 몇 안 되는 규칙 중 하나거든.”
“난 그냥 여자가 아니야!”
그녀는 하네스 안에서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난 그의 아이를 가졌어! 이제 내가 그의 가족이야! 넌 그가 버리는 늙은 암캐일 뿐이라고!”
나는 거의 웃을 뻔했다.
그녀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다.
그녀는 아기가 우리 세계에서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했다.
제국의 운명이 걸렸을 때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지 전혀 몰랐다.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갈랐다.
강태준의 세단이 부두 입구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는 크레인에 매달린 가을을 보고, 이내 나를 발견했다.
“이현아, 제발!”
그가 내게 다가오며 포효했다.
“저 애 내려줘!”
나는 담배를 천천히 한 모금 빨았다.
“서류에 서명해, 강태준.”
나는 준호가 근처 상자 위에 놓아둔, 돌로 눌러놓은 이혼 서류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가 내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서 소리쳤다.
“그래?”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날 이렇게 가르친 건 너잖아. 레버리지. 상대가 가장 사랑하는 걸 찾아내서, 그걸 쥐고 흔드는 것.”
가을은 이제 히스테릭하게 울고 있었다.
“태준 오빠! 살려줘! 아기! 우리 아기!”
그녀의 말은 물리적인 타격이었다.
아기. 우리 것이었어야 할 아이.
그가 내게서 훔쳐 그녀에게 준 미래.
“저 애가 나보고 늙은 암캐래, 태준아.”
나는 속삭임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날 버린다고 했어. 이게 그런 거야? 20년 세월이, 새 모델 때문에 지워지는 거냐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쥔 채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이 모든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고 날카로운 얼음 알갱이가 내 얼굴을 찔렀다.
“서류에 서명해.”
나는 다시 말했다. 내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된 채 평탄했다.
“아니면 저 애는 물에 빠질 거야. 네 선택이야.”
그는 나에게서 물 위에서 매달려 우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새로운 삶이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20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는 나를 괴물처럼 쳐다봤다.
어쩌면 내가 괴물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를 만든 건 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