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지난 3년간, 나는 검은색 일기장에 내 결혼 생활이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그건 나의 ‘100점짜리 이혼 계획서’였다. 남편 강태준이 나 대신 그의 첫사랑, 한아리를 선택할 때마다 점수를 깎았다. 점수가 0점이 되는 날, 나는 떠날 것이다.
그가 교통사고로 피를 흘리는 나를 버려두고 떠난 그날 밤, 마지막 점수가 사라졌다. 나는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아이를 임신한 지 8주째였다.
응급실에서 간호사들은 미친 듯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죽어가고 있는 바로 이 병원의 스타 외과 의사인 그에게.
“강태준 교수님, 신원 미상의 O형 Rh- 혈액형 환자가 과다출혈 중입니다. 임신부인데, 산모와 아이 둘 다 잃을 위기입니다. 긴급 혈액 수혈 승인이 필요합니다.”
스피커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짜증이 가득했다.
“안 됩니다. 제 최우선 순위는 한아리 씨입니다. 그 환자는 할 수 있는 만큼만 조치하세요. 지금은 어떤 지원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전 여자친구가 간단한 시술 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제1화
강태준은 그 노트를 발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가장 아끼는 백금 커프스링크를 찾기 위해 부부 공동 옷장 뒤편을 뒤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차서윤의 겨울 부츠 뒤에 숨겨진 신발 상자 속 가죽 표지 다이어리에 스쳤다. 서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다이어리는 언제나 밝은 색이었고, 건축 스케치로 가득했다. 이건 평범한 검은색이었다. 그에게는 좀처럼 들지 않는 감정인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것을 열었다.
첫 페이지에는 서윤의 단정하고 깔끔한 글씨체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100점짜리 이혼 계획서’.
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래에 적힌 규칙들을 읽었다.
시작 점수: 100점.
이 결혼이 실수라는 것을 증명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점수를 차감한다.
점수가 0점이 되면, 예외 없이 이혼 서류를 제출한다.
그는 짧고 의미 없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장난. 아내가 하는 유치한 장난일 터였다. 그는 페이지를 넘겼다. 각 항목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의 소위 ‘잘못’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1점: 그가 또 우리 결혼기념일을 잊었다. 그는 한아리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2점: 한아리의 개가 아프다는 이유로 우리 휴가를 취소했다. 그는 주말 내내 그녀의 아파트에서 보냈다.
-1점: 그가 나를 실수로 ‘아리야’라고 불렀다.
-3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빈티지 와인 마지막 한 병을 사서는, 한아리의 생일 선물로 줘버렸다.
목록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계속되었다. 그의 무관심에 대한 상세하고 고통스러운 연대기였다. 태준은 죄책감이 아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실패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차서윤이 자신의 오랜 친구인 한아리에게 병적으로 집착한다는 증거로 여겼다. 한아리는 그의 첫사랑이었고, 몇 년 전 그녀가 떠났을 때 그를 산산조각 냈던 여자였다.
서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서둘러 서윤과 결혼했다. 좋은 집안 출신의, 편리하고 안정적인 선택지. 그가 커리어에 집중하고, 솔직히 말해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는 동안 태강 그룹의 안주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여자.
그는 노트를 닫았다. 그의 짜증은 얼음장 같은 무관심으로 굳어졌다. 그는 그것을 상자 안에 다시 던져 넣었다. 어처구니없고 유치한 목록.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커프스링크를 찾아 옷장 문을 닫았고, 노트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서류 가방 안에는 한아리를 위해 특별 주문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녀의 갤러리 그랜드 오프닝이었고, 그는 그곳에 가야만 했다.
그는 거실로 걸어 나왔다. 서윤은 소파에 앉아 커다란 패드에 스케치를 하고 있었고, 집중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깃든 희미한 희망의 빛을 그는 오래전에 알아채지 못하게 되었다.
“일찍 왔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곧 다시 나가봐야 해.”
그는 넥타이를 풀며 대답했다.
“아리 갤러리 오프닝이야.”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아. 맞다.”
그는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노트, 그녀의 스케치북 중 하나를 보았다. 펼쳐진 페이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빛으로 가득한 아기 방 그림이었다. 아기 침대, 작은 별들이 달린 모빌, 흔들의자. 그는 가슴에 이상한 통증,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1년 넘게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해왔다.
“클라이언트 일이야?”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윤은 재빨리 스케치북을 닫았다.
“그냥 아이디어 스케치예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의 마음은 온통 한아리에게 가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떠나야 했다. 그는 가장 먼저 그곳에 도착해서, 목걸이를 본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가 그들 사이에 말없는 벽처럼 서 있을 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가장 친한 친구인 민혁이었다.
“태준아! 뉴스 켜봐! 지금 당장!”
민혁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태준은 리모컨을 움켜쥐고 텔레비전을 켰다. 생방송 뉴스 화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밤하늘로 솟구쳤다. 기자의 목소리는 긴박했다.
“소방대원들이 시내에 새로 문을 연 한아리 갤러리 현장에 출동해 있습니다. 그랜드 오프닝을 불과 한 시간 앞두고 대형 화재가 발생했으며…”
태준의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한아리.
세상은 그 단 하나의 생각으로 좁혀졌다. 그는 차 키와 코트를 움켜쥐고 서윤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을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어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그는 보지 못했다.
서윤은 그를 따라나섰다. 왜 그랬는지 자신도 몰랐다. 절박하고 어리석은 어떤 마음 한구석이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핸들을 꽉 쥔 채, 심장이 갈비뼈에 병적으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도시를 가로질러 운전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경찰 통제선, 번쩍이는 불빛, 불길의 굉음. 태준은 차를 버려둔 채 소방관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리가 안에 있어요! 내가 구해야 해요!”
태준은 소방관을 밀치며 소리쳤다.
“선생님, 너무 위험합니다! 건물이 붕괴 직전이에요!”
소방관이 맞서 소리쳤다.
“상관없어! 그녀가 갇혔다고!”
민혁이 그를 말리려 애쓰고 있었다.
“태준아, 진정해! 구조대가 구할 거야!”
“너무 느려!”
태준의 목소리는 서윤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절박함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절대로. 그는 불타는 건물을 마치 자신의 온 세상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서윤은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민혁을 밀치고 입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손!”
그의 팔을 붙잡는 소방관에게 그가 절규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나 강태준이야! 이 손이 수십억짜리 보험에 들어있다고! 기적을 만드는 손이야! 하지만 난 이 손을, 내 커리어 전부를 포기할 수 있어,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만 알 수 있다면! 이거 놔!”
그것은 선언이었다. 고백이었다. 너무나 잔인해서 물리적인 타격처럼 느껴지는 진실이었다.
그때 민혁이 어둠 속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서윤을 발견했다. 그는 경악했다.
“서윤 씨… 저기…”
서윤은 민혁의 아내 지수가 그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맙소사, 오빠. 쟤 고등학교 때부터 한아리한테 미쳐있었잖아. 난 차서윤이랑 결혼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더 심해졌네.”
지수의 말은 모든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었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그들만의 사랑 이야기였다. 자신은 그저 장애물일 뿐이었다. 뒷전이었다.
3년 동안, 그녀는 노력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들의 집을 꾸몄고, 그의 사교 활동을 관리했으며, 긴 수술 후에 그를 위로했고, 그의 가족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결국 그의 오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믿었다.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이었다. 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놓쳐버린 모든 결혼기념일, 취소된 모든 계획, 그녀를 마치 투명 인간처럼 꿰뚫어 보던 모든 순간에.
100점짜리 계획서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줄이었다. 서서히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자신의 사랑을 수치화하는 방법이었다. 자신을 텅 비게 만드는 결혼 생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결승선, 비상 탈출구를 스스로에게 주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다른 여자를 위해 기꺼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 점수들이 거대한 덩어리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태준이 연기 속에서 한아리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그녀는 의식이 있었고, 기침을 했지만, 그 외에는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구급차까지 그녀를 옮기며,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말들을 속삭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서윤을 찾지 않았다.
한아리가 구급대원들에게 안전하게 인계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태준의 몸은 마침내 무너졌다. 아드레날린이 사라지자, 그는 연기 흡입으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원의 살균된 하얀 대기실에서, 서윤의 마음은 과거로 흘러갔다.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던 자선 갈라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본 남자 중 가장 똑똑하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막강한 태강 그룹의 천재 신경외과 의사. 유망한 젊은 건축가였던 그녀는 대담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아리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6개월 후 그가 청혼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헌신이 마침내 그의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고 생각했다.
그 환상은 결혼 1년 만에 산산조각 났다. 한 파티에서, 그녀는 술에 취해 입이 가벼워진 태준의 친구 중 한 명이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태준이 쟤, 한아리가 결혼하니까 그냥 결혼한 거야. 정신 팔 데도 필요하고, 집안 만족시킬 아내도 필요했거든. 저 불쌍한 여자는 쟤가 진짜 자길 사랑하는 줄 알잖아.”
그날은 한아리가 그녀의 마음에 박힌 가시가 된 날, 그녀의 결혼 생활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존재가 된 날이었다. 그날 그녀는 밖으로 나가 평범한 검은색 일기장을 샀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기 보존 행위였다.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질 때까지 그것을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1년 전 한아리가 이혼 후 서울로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가속화되었다. 그녀의 목록에 있는 점수들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한때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심장은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의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생각에 잠긴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
“차서윤 씨? 남편분은 안정적이십니다. 연기를 많이 마셨지만 괜찮을 겁니다. 한아리 씨도 괜찮고요, 그냥 긁힌 상처 몇 군데뿐입니다.”
민혁과 지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서윤 씨, 쟤 정신 차릴 거예요.”
지수가 그녀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태강 그룹에서 서윤 씨한테 잘하도록 확실히 할 거예요.”
서윤은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그들을 뒤로한 채 대기실을 걸어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고요하고 텅 빈 집에서, 그녀는 옷장으로 걸어가 검은색 일기장을 꺼냈다. 그녀는 마지막 항목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5점: 그는 그녀를 위해 불타는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10점: 그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펜 뚜껑을 열었다. 그녀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10점: 그는 그녀를 구한 후 쓰러졌고, 그의 처음과 마지막 생각은 내가 아닌 그녀였다.
그녀는 계산을 했다. 이제 몇 점 남지 않았다. 아주 조금.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회차 2
다음 날 아침, 서윤은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녀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사무실은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유리 고층 빌딩 30층에 있었다. 딱 맞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새로운 관점을 얻고 있었다.
그녀는 혼전 계약서와 자산 요약서가 담긴 파일을 건넸다.
“이혼 소송을 하고 싶어요.”
그녀는 차분하고 고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결정하는 순간 바로 서명할 수 있도록 지금 서류를 준비해두고 싶어요.”
김 변호사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여성은 직업적인 동정심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사모님. 모든 서류를 작성해두고 신호를 기다리겠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며 서윤은 이상한 가벼움을 느꼈다. 행복은 아니었지만, 해방감이었다. 그녀는 작은 카페에 들러 닭고기 수프 한 통과 태준이 아플 때 좋아하던 뜨거운 차가 담긴 보온병을 샀다. 그것은 습관이었다. 그녀가 몇 년 동안 해왔던 의무의 유령이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태준의 병실 밖에서 잠시 멈췄다. 문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그녀는 한아리가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수프를 먹여주려 애썼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서툴렀다. 그녀는 그의 환자복에 한 숟가락을 흘렸고, 깨끗한 하얀 시트에 또 한 숟가락을 흘렸다.
“어머, 미안해, 태준아!”
한아리가 냅킨으로 얼룩을 닦으며 외쳤다.
“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나 봐.”
“괜찮아.”
태준의 목소리는 쉬었지만 부드러웠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냥 수프일 뿐이야.”
“하지만 나 때문에 다쳤잖아.”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의사 선생님이 연기 흡입이 심각했대. 폐나 손, 네 커리어에 손상을 줄 수도 있었다고…”
“쉬이.”
그가 그녀를 달랬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네가 안전하다면.”
한아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크고 숭배의 빛으로 반짝였다.
“넌 항상 신경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잖아. 그걸 위해 화가의 꿈도 포기했고.”
태준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포기한 게 아니야. 너 때문에 외과 의사가 된 거야.”
한아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고등학교 때 그날 기억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관람석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부딪혔잖아. 거의 1분 동안 의식을 잃었었어. 내 인생에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어. 그날 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어. 최고의 의사. 그래서 네가 필요할 때 언제든 널 구할 수 있도록.”
수프 용기가 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져 부드러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 말들이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의 모든 커리어. 그의 인생의 야망. 그것은 모두 한아리를 위한 것이었다.
한아리는 숨을 헐떡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태준아… 난 몰랐어.”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던져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오, 태준아.”
그는 무언가 감지한 듯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주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사랑과 헌신의 완벽하고 고통스러운 그림이었다.
서윤은 가슴에 날카롭고 숨 막히는 통증을 느꼈다. 시야가 흐려졌다. 그녀는 돌아서서 조용하고 무감각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수프와 차를 그의 병실 문밖에 두고 떠났다.
아래층 병원 로비에서 그녀는 태준의 동료인 이 교수와 마주쳤다. 그는 서류 뭉치를 손에 들고 서두르고 있었다.
“사모님! 마침 태준이 보러 가던 길이었는데. 걔는 좀 어때요?”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다행이네요. 저기, 제가 지금 응급 수술이 있어서요. 이거 좀 전해주실 수 있어요?”
그는 그녀의 손에 서류 봉투를 쥐여주었다.
“연구 위원회 사직서예요. 서명해야 하거든요.”
“사직서요?”
서윤이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태준은 연구 위원회 직책을 무척 아꼈다.
“네, 새로운 개인 클리닉 자금을 대려고 그만둔대요. 미쳤죠? 자기 연구를 희생하다니… 근데 중요한 사람을 위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 교수의 호출기가 울렸다.
“가봐야겠네요!”
그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윤은 북적이는 로비에 홀로 서서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열었다. 안에는 태준의 공식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새로운 클리닉의 사업 제안서가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최첨단 정신 건강 및 웰니스 시설이었다. 제안서에 기재된 주요 수혜자이자 책임자는 한아리였다.
세상이 기울어졌다. 그의 과거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의 모든 부분은 한아리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의사가 되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위한 안식처를 짓기 위해 그의 명망 높은 연구직을 포기하고 있었다.
서윤은 그저 혼인 증명서에 적힌 이름일 뿐이었다. 대리인. 자기 인생의 유령.
그녀는 그가 획기적인 수술 기법으로 칭송받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 똑똑하고 헌신적인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그녀는 역겨울 정도로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 순간조차도 한아리의 것이었다는 것을. 모든 성취, 모든 성공은 그가 첫사랑에게 돌아가는 길의 또 다른 발걸음일 뿐이었다.
그 길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자신만의 길을 찾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병원을 나와 눈부시고 가차 없는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몇 년 동안 걸지 않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박지민. 건축학과 시절 가장 친한 친구. 그녀에게 강태준의 아내가 되는 것 이상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항상 말해주던 친구였다.
지민은 두 번째 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서윤아? 너 맞아?”
“나야.”
서윤이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항상 꿈꿔왔던 건축사무소 있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흥분으로 가득 찬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서윤이 평생 처음인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나 태준 씨랑 이혼할 거야. 시작할 준비됐어.”
“아, 진짜 다행이다!”
지민이 소리쳤다.
“내가 사무실 공간부터 알아볼게! 서울에, 네 집 근처로, 네가 편하게?”
서윤은 한때 자신이 설계하기를 꿈꿨던 우뚝 솟은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녀는 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 말고. 새로운 곳.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회차 3
서윤은 지민에게 이혼할 것이며, 그들의 회사 ‘피닉스 건축사무소’를 제주도에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언제나 충실한 지민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즉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삶.
다음 한 주 동안, 서윤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녀는 현대 디자인, 건축 법규, 경영에 관한 책들을 샀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온라인으로 최고의 건축가들의 작품을 연구했고, 그녀의 마음은 몇 년 동안 억눌러왔던 창의적인 에너지로 다시 활기차게 움직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자신의 일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태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왜 남편 곁에 있지 않느냐고 따지는 시어머니의 문자도 무시했다. 그녀는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듯, 자신의 심장 주위에 방화벽을 치고 있었다.
일주일 후, 그들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에 태준이 집에 왔다. 그는 서재에서 책 더미와 설계도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놀란 듯 보였다.
“이게 다 뭐야?”
“다시 일 시작하려고요.”
서윤은 제도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지민이랑 우리 회사 차릴 거예요.”
“그거… 잘됐네.”
그는 기쁘기보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그녀의 삶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익숙했다.
“이제 내 수술 후 회복식 챙겨줄 시간은 없겠네.”
서윤은 마침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했다.
“네. 없을 거예요.”
그는 그녀가 예전에 자신을 어떻게 안절부절못하며 챙겼는지 기억했다. 아주 작은 종이 상처에도 그의 손에 붕대가 감기고 일주일 내내 그녀의 걱정스러운 관심을 받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무관심은 이상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는 피곤했다.
“뭐, 난 널 지지해.”
그 말은 그 자신에게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네가 취미를 갖는 건 좋은 일이지.”
취미. 3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는 여전히 그녀의 평생의 열정을 취미로 보고 있었다.
“태준 씨.”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시작했다.
“만약 제가 이혼하자고 하면, 반대할 건가요?”
그가 대답하기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힐끗 보니 한아리였다.
“잠깐만.”
그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서윤은 그가 결코 자신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부드럽고 달래는 톤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설계도로 돌아섰고, 그녀의 결심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그날 저녁 늦게, 그가 서재에서 나왔다.
“결혼기념일이니까 외식하러 가자.”
그가 선언했다.
그녀는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그들을 시내의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주차하고 올게. 먼저 들어가 있어.”
그녀는 차에서 내려 그가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분 후, 그가 혼자가 아닌 채로 돌아왔다. 그는 커다란 흰색 치자꽃다발과 아름답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아찔한 순간, 그녀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꽃을 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태준 씨…”
그녀는 오래되고 어리석은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며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한아리가 그의 곁에 나타나 그의 팔짱을 꼈다.
“서윤 씨! 만나서 반가워요.”
한아리는 밝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준 씨가 제 갤러리 재개장 성공 축하 파티에 같이 와준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다정하시네요.”
희망의 불꽃은 꺼져 재가 되었다.
태준은 서윤의 얼어붙은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한아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건 널 위한 거야.”
그가 그녀에게 꽃과 선물을 건네며 말했다.
“축하하는 의미로 작은 선물이야.”
한아리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한아리를 위한 것이었다. 저녁 식사, 꽃, 선물. 그녀는 그저 들러리일 뿐이었다. 그들의 완벽한 사랑 이야기 속 소품.
“어머, 태준아, 기억했구나.”
한아리는 치자꽃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인데.”
그녀는 선물을 풀어 그가 그토록 기대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건… 지난달에 내 위시리스트에 핀 해놨던 바로 그거잖아. 어떻게 알았어?”
“그냥 운이 좋았지.”
태준은 한아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서윤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한아리의 손에서 꽃다발을 받아들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들어드릴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힘겹게 짜낸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아리는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서윤 씨. 정말 좋은 아내네요.”
그 말은 조롱이었다. 서윤은 그때 알았다. 태준이 단지 그녀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녀를 이용했다. 그는 그들의 결혼기념일을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축하하기 위한 핑계로 삼았다.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변명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