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남자는 여전히 고귀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으며, 예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5년 전, 김유나가 시골에 사는 삼촌 집에 놀러 갔을 때, 삼촌은 산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진 남자를 구해줬다. 그 남자가 바로 서이준이었다.

서이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성씨인 서씨는 성북에서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서씨 가문이었다.

명망 높은 재벌가문, 신분이 귀하기로 하늘을 찔렀다.

서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그는 북쪽 경제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었고 황태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차창을 통해 흘러 든 햇빛이 그를 금색으로 물들였다.

통화를 마친 김유나가 싱긋 미소 지으며 서이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빠,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서이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김유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지혁 오빠가 출세했네. 서이준 같은 황태자 친구도 사귀고.'

차 뒷좌석에 올라탄 김유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정자세로 앉았다.

마치 담임 선생님을 마주한 초등학생처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꾸중을 들을까 바싹 긴장한 모습이었다.

대기업 회장은 역시 대기업 회장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차 안에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흘렀다.

호텔 앞에 도착한 김유나는 서이준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둘러 차 문을 열었다.

서이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압박감이 다시 밀려왔다.

서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삼촌은 잘 지내셔?"

날씨가 습했던 탓일까? 잠시 멈칫한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 졌다. "삼촌은 반년 전에 돌아가셨어."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났다.

삼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녀는 오랫동안 상심했다.

당시, 만약 삼촌이 그녀와 엄마를 거두어주지 않았다면, 모녀는 길거리에 나앉았을지도 모른다.

서이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해외에 머물렀고 최근에야 귀국했다. 그래서 국내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아쉬움이 스치더니 손을 들어 김유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서이준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김유나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3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닫히지 않은 특실을 지나던 김유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서이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특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환호하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케이크 앞, 여자가 등을 돌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김유나는 눈이 시큰해지더니 눈시울이 빨개졌다.

서이준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는 사람이야?"

"응."

김유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태연하게 말했다. "케이크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내 남편이고, 저 여자는 남편의 내연녀이자 내 이복동생이야."

고승주가 김은설에게 걸어준 목걸이는 고승주가 몇 달 전부터 주얼리 매장에 가서 예약한 한정판으로, 김유나의 생일 때, 선물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목걸이를 다른 여자에게 선물했다.

이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집안의 추문은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최근 몇년 간, 고승주가 밖에서 여자 여러 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비밀로 했다. 어느새 그녀는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는 대상이 되어 버렸고 한 줌의 체면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한 달 후면 정식으로 이혼할 예정이다. 그러니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김유나는 마음속에 밀려오는 씁쓸함을 억누르고 시선을 거두며 다른 특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몇 초 동안 지켜보던 서이준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김유나."

그의 목소리에 김유나는 뒤를 돌아봤다.

"삼촌은 돌아가셨지만, 난 여전히 삼촌의 은혜를 갚아야 해.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서이준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줄 게."

김유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라? 나한테 이런 행운이 나타나다니?!'

'우리 황태자님 좋은 분이시잖아.'

김유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오빠."

룸에 도착한 김유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삼촌, 이모, 정한 오빠. 안녕하세요."

진미희는 김유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더니 살이 더 빠진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속상해 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일 때문에 바빠서 제때 밥도 챙겨 먹지 못한거야?"

김유나는 자신의 손바닥만한 얼굴을 매만지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일에 몰두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끼니를 거르다 못해 위액이 역류할 때가 되어서야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위약을 챙겨야 했고 위통이 발작할 때마다 한 알씩 먹었다.

지난주 건강검진에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김유나는 자신이 이미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여태 그녀는 그저 평범한 위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의사는 위암의 이유로 그녀의 불규칙한 식습관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짚었다.

나중에 의사는 그녀더러 마음을 편히 먹고 화를 적게 내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예전, 김유나의 어머니는 김은설의 어머니에게 남편을 빼앗겼고 지금에 와서 김유나마저 김은설에게 남편을 빼앗겼다.

김유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남자와 여자를 위해 암에 걸리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그녀는 이제 항암제를 먹는 것 외에도 규칙적인 식습관을 유지하고 제때 밥을 먹어야 하며,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했다.

그 쓰레기 같은 둘에게서 신경을 끄자 그녀의 어두웠던 세상이 다시 밝아지는 것 같았다.

김유나가 대답하지 않자 진미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나야, 내 말 듣고 있어?"

정신을 차린 김유나가 진미희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이모, 저 밥 잘 먹어요. 여름이잖아요. 옷을 적게 입어서 말라 보이는 거에요."

그때, 셋째 삼촌 김준혁이 김유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유나야,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정한이가 계산 할거야. 이 자식 돈을 아껴 줄 필요 없어."

"오늘 승진도 했겠다. 크게 한턱 내는 건 당연한 거야."

메뉴판을 건네 받은 김유나는 김정한을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정한 오빠, 축하해."

김정한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너무 예의 차리지 마.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김유나는 메뉴판을 훑어보고 비교적 저렴한 요리 몇 가지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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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잘해줘도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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