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지영아, 네 동생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지 않더냐, 네가 없는 동안 수년간 하영이가 우릴 극진히도 보살폈다. 그러니 네가 이번에 세운 군공과 포상은... 그 하영이에게 양보하는 게 어떻겠느냐?"
익숙한 목소리에 소지영은 번쩍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소씨 저택의 대청이 틀림 없었고 아버지 소동성과 어머니 허복희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분홍빛 비빈복(妃嬪服)을 입고 곱게 단장한 소하영이 허복희의 품에 기대앉아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지영의 뇌리 속에 천둥이 울렸고 도저히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환생을 한 것인가?'
그녀가 비참한 운명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전생, 뻔뻔한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가 목숨으로 맞바꾸어 온 군공과 포상을 그녀의 동생 소하영에게 양보하라 요구했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심장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듯한 증오가 마치 용암처럼 그녀의 혈관을 타고 온몸에 흐르는 것 같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고 그 날카로운 통증에 소지영은 간신히 경악과 분노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전생, 북쪽의 만족들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왔고 조정은 즉시 조서를 반포했다.
무릇 5품 이상의 대신들의 가문은 은 100냥을 바치거나 그들 자제들 중 한 명을 군에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가문에 마땅한 남자가 없을 시 여자가 대신 출정해도 되며 세군 군공은 모두 가문의 이름으로 기록된다고 명시돼 있었다.
소씨 가문은 후손이 번창하지 않았고 가문을 이어 받을 아들 조차 없었다. 게다가 여동생 소하영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달고 살아 많이 병약했던 터라 소지영은 자진하여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다.
그렇게 장장 5년 동안, 그녀는 피를 흘리며 전장에서 싸웠고 몇 번이고 죽음의 문턱을 헤매었다. 그녀가 매번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소지영은 부모님이 당연히 이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고 어릴 적 혼약을 맺었던, 평생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그 소년도 자신이 승리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공을 세우고 돌아왔을 때,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했던 따뜻한 위로는 없었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터무니없는 요구들뿐이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세운 군공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그 군공 하나하나는 그녀의 피와 눈물로 쓰여졌는데 어떻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양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은 혈육의 정을 논하며 그녀의 군공에 소하영의 이름을 적었다.
그렇게 그녀가 세운 모든 군공은 전부 소하영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미 군공록(軍功錄) 에 소하영의 이름이 올라간 이상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황제를 기만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심하면 소씨 전체가 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 속에서 사무치는 울분을 토해낼 곳도 없었다. 군에서 지냈던 5년간,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시종일관 가면을 쓰고 있었던 탓에 이제 와서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길도 없었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약혼자 서정진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군공을 소하영에게 물려주라 그녀를 설득 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그녀는 그 터무니없는 요구에 승낙을 하고 말았고 소하영은 즉시 그 군공을 빌미로 황제에게 서정진과의 결혼을 하사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제야 그녀는 둘이 이미 자신을 등지고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소하영은 현주(县主)작위를 하사 받았고 후부에 시집가 세자비가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반면 소지영은 예전에 전장에서 싸우느라 입은 상처를 제때에 치료받지 못했던 탓에 고질병을 얻었고 병상에 누워 시름시름 앓았다.
그녀가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소하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눈보라가 휘몰아 치던 밤. 그 밤은 소지영에게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 되었다.
당시, 소하영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하인들을 시켜 거의 죽어가는 그녀를 낡아빠진 침상에서 억지로 끌어내렸다.
"언니. 이제 언니만 사라지면 이 세상에서 군공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여봐라! 이 년의 사지를 잘라 인적 드문 눈밭에 던져 버려라. 멀리 던질 수록 좋다."
그렇게 사지가 잘린 그녀는 어딘지 알 수 도 없는 눈밭에 버려졌고 하늘에서 내리는 거위 털 같은 눈송이가 천천히 그녀의 눈과 입을 덮어버렸다.
극심한 통증과 추위 속에서 의식이 점차 흐려졌고 그녀의 몸에서 흘러 나온 선혈이 새하얀 눈을 빨갛게 물들였다...
"지영아, 너와 나의 혼약은 이미 정해졌으니 가문을 위해 생각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하영이는 몸도 약하고 어디 기댈 곳도 없는 아이야. 나중에 제대로 된 집에 시집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군공은 하영이에게 양보하는 게 좋을것 같구나. 그러면 하영이 앞길도 걱정이 없을 테고 너도 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느냐?"
청아한 목소리가 그녀를 피가 넘실대는 기억의 바다 속에서 끌어냈다.
'서정진!'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 마시며 끓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고 눈에 비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감췄다. 그제야 그녀는 천천이 입을 열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역시 우리 딸은 속이 깊구나!"
소씨 부부는 금세 활짝 웃으며 만족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소하영의 눈빛엔 놀라움과 기쁨이 서렸다. 그녀는 한걸음에 다가와 소지영의 팔을 잡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언니!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서정진 역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다정한 시선은 시종일관 소하영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소지영의 눈빛에 냉기가 스쳤다.
'소하영이 그토록 원하는 이 군공? 주면 그만이다!'
'허영심에 사로잡혀 서정진과의 혼사를 넘본다고? 성사 시켜 줄 것이다!'
이번 생에도 소하영이 과연 명이 길어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북쪽 만족들의 야심은 결코 한번의 전쟁으로 잠재 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국경에서 전쟁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번엔 달라, 두 번 다시 부모들의 간청에 마음이 약해져 동생을 위해 해골이 즐비한 전장에 다시 발을 들이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회차 2
궁중연회.
눈부신 불빛 속, 술잔이 오가고 있었다.
소지영은 대전 한구석에 홀로 앉아, 싸늘한 시선으로 소하영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전까지 나아가 상을 하사받는 걸 지켜봤다.
경제는 칭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하영이라 했느냐? 큰 공을 세웠으니, 어떤 상을 받고 싶은지 말해보거라."
"폐하의 은혜에 감사 드리옵니다! 신녀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사옵니다."
소하영은 바닥에 꿇어앉아 고개를 약간 숙였는데, 겸손해 보이는 자세와 달리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녀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저 폐하께서 신녀와 진북후 세자 서정진과의 혼인을 하사 해주시길 바라옵니다."
소하영이 말을 마치자마자 서정진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소하영 옆에 공손히 꿇어앉아 입을 열었다.
"폐하, 신과 하영이는 서로 마음을 확인한 사이입니다. 폐하께서 부디 신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가 소하영을 바라보는 눈빛은 물처럼 부드럽고 정이 넘쳐 흘렀다. 누구라도 천생연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경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구심을 담아 말했다.
"서정진, 짐이 기억하건대, 너는 소씨 가문의 큰 아가씨와 이미 혼약을 정하지 않았더냐?"
서정진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황급히 설명했다.
"폐하, 신과 소지영의 혼약은 어른들의 명에 의한 것이지, 신은 그녀와 아무런 정분도 없사옵니다. 신의 진심은 오직 하영이 한 사람에게만 향하고 있사옵니다…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폐하! 신녀가 할 말이 있사옵니다."
말고 깨끗한 목소리가 갑자기 대전에 울려 퍼지며 서정진의 말을 끊었다.
소지영은 구석에서 침착하게 걸어 나왔고, 순간 대전 전체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어서 물러나지 못 할까?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이냐!"
소동성이 겁에 질려 새하얘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질책했다.
옆에 있던 허복희도 놀라 혼비백산하여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다.
서정진과 소하영 역시 동시에 돌아서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전 중앙으로 걸어가 황제에게 깊이 절하며 말했다.
"폐하, 신녀는 세자와 혼약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세자와 제 여동생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으니, 신녀는 자진하여 물러나 그들을 이루어 주겠사옵니다."
이 말이 나오자, 대전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서정진은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소지영이 분노하여 군공의 진실을 까발릴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소지영은 되려 그와 소하영의 혼사를 도와줬다.
경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꿇어앉아 있는 소지영을 살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신녀가 어찌 감히 폐하를 속이겠사옵니까."
소지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다만 신녀는 감히 폐하께 한 가지 은혜를 바라옵니다."
"음?"
경제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말해보거라."
소지영은 수많은 사람들의 놀란 시선 속에서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대전의 귀족들을 가로 질러 대전 한구석을 향했다.
"신녀는 폐하께서 신녀와 예왕 전하의 혼인을 하사해 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순식간에 그녀의 말은 깊은 연못에 던져진 거대한 돌처럼 수천 겹의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왕 강운혁을 택했다고?
두 다리를 쓰지 못하고 성격이 음침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그 예왕을?
조정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왕부는 마치 용담호혈과 같아 그 곳으로 들어간 여자들 중 좋은 끝을 맞이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람들은 소지영이 상심이 컸던 탓에 정신이 혼미해진 거라 생각했다.
놀랍기는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은 소지영의 침착한 얼굴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대전 한구석에 있는 강운혁에게로 향했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착잡했다. 그의 일곱번째 아들이 한때 얼마나 탁월했던가!
예왕은 소년 시절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고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3년 전, 그는 황제를 대신하여 출정했고 양양한 의기로 북부 변경의 전란을 평정하고 영원히 후환을 없애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영추곡 전투에서 적의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고 그는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여 철통 같은 포위망을 뚫고 피의 길을 열었으나, 결국 힘이 다해 낙마를 하고 말았고 그 탓에 두 다리가 부러져 폐인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후 그의 성정은 크게 변했고, 후부에 틀어 박혀 은둔하며 사람들을 멀리했다.
경제도 예왕에게 왕비를 하사하고 싶었으나 온 경성의 규수들은 예왕의 이름만 들어도 아연실색했고 예왕 본인도 혼사를 거절했다. 하여 그의 혼사는 계속 미뤄졌고 나중에는 경제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세속의 시선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왕과의 혼사를 하사해 달라는 소지영을 바라보니 경제는 기쁘면서 한편으론 위안을 받았다.
예왕 강운혁은 현재 서른이 다된 나이다. 여느 황자들은 그 나이면 자식들이 이미 학문을 시작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운혁은 여전히 외톨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로서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지영이 어떤 이유로 이 혼사를 원하는지를 막론하고 그녀가 진정 예왕과의 혼사를 원한다면 그녀가 방금 파혼을 당했을지언정 경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좋다! 네 뜻이 그러하다니 짐은…"
"잠깐! 본왕은 궁금하구나, 너는 왜 이 불구인 나에게 시집을 오려 하는 것이냐."
한겨울의 샘물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대전을 가르며 경제의 어명을 잘라 버렸다.
회차 3
륜의(轮椅,휠체어)가 거울처럼 매끄러운 바닥 위를 천천히 가로질렀고 강운혁은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이 촛불 아래에 드러나자, 주변의 휘황찬란한 빛마저 빛을 잃었다.
륜의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고귀한 기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요염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깊게 패인 이목구비와 뚜렷한 윤곽은 마치 극지의 얼음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듯 차갑고 완벽했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게 하는 것은 봉황의 눈을 닮은 그의 눈매였다. 눈꼬리는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고, 눈동자는 짙은 먹색으로 최상급 흑요석보다 더 깊고 그윽했으며 시선은 차갑고 냉정하여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지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눈을 마주했고, 만감이 교차했다.
'누가 이런 영웅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이나 할까?'
반년 후 북부 야만족이 다시 침략했을 때, 강운혁은 병든 몸을 이끌고 다시 갑옷을 입고 직접 삼천 철기병을 이끌고 적의 후방을 기습하여 승리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그는 오래된 부상이 재발하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전장에서 피를 뿌리며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그녀도 철기병 중 일원이었다. 그의 단호하고 비장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며 깊은 충격을 받았다.
소지영은 이번 생에서는 강운혁의 목숨을 구하기로 결정했고 뿐만 아니라 그의 다리까지 고쳐 주어 이 나라의 기둥인 그가 너무 일찍 쓰러지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전 전체에 들릴 정도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신녀는 전하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 해 영추곡,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전하는 적장을 베어 사기를 높이셨지요. 전하가 아니었다면 이 주나라는 북쪽 만족들에게 침략을 당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겁니다. 전하, 전하의 공적은 필시 역사에 길이 빛날 겁니다."
그녀의 눈빛은 불꽃 같았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비록 다리를 다치셨지만 굳센 기개와 드높은 위엄은 여전하시니 범부(凡夫)들은 차마 전하를 쳐다 보지도 못할 겁니다. 폐하께서 혼인을 하사해 주시어 전하를 곁에서 모실 수만 있다면 그건 신녀가 모든 걸 다 바쳐 바라는 바입니다."
그녀의 우렁찬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전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강운혁은 말없이 그녀를 깊이 바라봤다. 그녀의 말 속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 알아내려는 듯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경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대전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박장대소하며 소지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감탄이 가득했다.
"공적이 필시 역사에 길이 빛난다라. 말 잘 했다! 탁월한 견식과 큰 뜻을 가진 아이로구나!"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즉시 입을 열었다.
"어명을 내리겠다. 소씨 가문의 적녀 소지영은 현명하고 도리를 알며, 남다른 혜안을 지녔다! 특별히 예왕 강운혁의 정비로 혼인을 하사하겠노라! 또한, 소지영에게는 금와 보석으로 된 머리 장신구, 남해야명주 일곡, 강남비단 열 필, 황금 천 냥을 상으로 내릴테니 혼수로 삼도록 하라."
"신녀, 폐하의 성은에 감사 드리옵니다!"
소지영은 깊이 절하며 단아한 자세를 유지했다.
소지영이 황제의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한 상까지 받는 것을 지켜보는 소하영의 눈은 질투로 번뜩였다.
소하영은 오늘 경성에서 이름을 떨치기 위해 온갖 계략을 다 꾸몄지만 정작 사람들의 이목은 전부 빌어먹을 소지영에게 집중되었다.
서정진의 또한 표정 어두웠고 가슴 속에서는 말 못할 초조함과 상실감으로 뒤섞였다.
그는 소지영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그녀의 얼굴에서 불만이나 내키지 않는 표정을 찾아내려 했지만,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평온하고 담담한 모습뿐이었다.
궁중 연회는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고, 소지영은 인파를 따라 궁문을 나섰다. 늦가을 밤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며 그녀의 가슴속 답답함을 씻어냈다.
소씨 가문의 마차로 향하던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검은색 마차가 고요히 멈춰 서 있었는데, 마치 숨어 있는 그림자 같았다.
마차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강운혁이었다.
'날 기다리고 있는 건가?'
소지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고 마차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소녀, 전하를 뵙습니다."
강운혁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밤이 되자 봉황 같은 두 눈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었고, 옥처럼 조각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지영, 폐하 앞에서 한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본 왕은 깊이 따지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면, 본 왕이 부황께 말씀 드려 명을 거두도록 할 수도 있다."
소지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상대방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몸을 숙이고, 거의 유혹하는 듯한 어조로 나지막이 되물었다.
"전하께서는 신녀의 결심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전하 본인의 매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신 겁니까?"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흩날렸고, 강운혁의 귀를 간질였다.
강운혁의 몸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살짝 굳어졌다. 이내, 그는 휙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소지영은 그의 귀 끝에 번지는 홍조를 포착했고, 눈가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너는 참… 말재주가 좋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은근한 불쾌감이 배어 있었다.
소지영은 빙긋 웃으며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과찬이십니다. 전하."
강운혁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은 듯 이내 허리춤에 찬 옥패를 풀었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그저 창문 밖으로 무심히 손을 내밀었다.
"받거라."
소지영은 다소 놀랐지만 이내 두 손으로 받았다.
옥패를 만지자 온기가 느껴졌고, 색깔은 먹처럼 차분했으며, 그 위에는 복잡한 기룡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딱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옥패를 들고 왕부에 찾아 오거라."
강운혁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소지영은 기분이 좋았다.
이 옥패는 강운혁의 인정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소지영은 손가락 끝으로 옥패에 새겨진 문양을 가볍게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봤다.
"전하, 이것은 혹시 정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