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당연하지."
남자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본 안서영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나와 유 대표님은 오늘 밤부터 정식 약혼 관계가 되는 사이니까 당연히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지."
은은한 달빛 아래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얼른 우리를 놔줘! 그렇지 않으면… 앗!"
안서영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을 차에서 끌어내더니 차 문에 밀어붙였다.
"서영아!"
그 모습을 본 박태준은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달려가려 했지만, 최강수와 다른 경호원들에게 잡혀 바닥에 얼굴이 눌릴 정도로 강하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 개자식아! 당장 서영이 놔줘!"
얼굴이 바닥에 내리 눌린 박태준은 여전히 뒷좌석 쪽을 노려보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계속해서 소리질렀다.
갑자기 밀려든 남자의 뜨거운 체온과 낯선 향기에 안서영은 두려움에 떨며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뭐하는 짓이야!?"
그녀의 몸이 굳어지고 떨리는 것을 느낀 유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서영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남자를 어떻게 기쁘게 하는지 알아?"
안서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당장 날 놓아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 안서영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을 덮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젤리처럼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강압적인 남자의 입술과 혀가 그녀의 입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안서영은 눈을 크게 뜨고 저항하는 것조차 잊은 채 조각처럼 굳어버렸다.
한참 후에야 남자가 그녀의 입술을 떼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키스도 할 줄 몰라?"
"짝!"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밤하늘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태준을 누르고 있던 최강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현우의 곁에서 4, 5년간 일해왔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따귀를 맞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를 때린 사람은… 힘없어 보이는 연약한 여자였다.
강한 충격에 유현우의 얼굴이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혀로 어금니를 꾹 누르고 안서영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간이 부었군."
"이건 네가 날 모욕한 대가야!"
안서영은 자신의 얼얼한 손을 거두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태준 씨를 풀어주고 우릴 돌려보내.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해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유 대표한테 전부 다 말해버릴 거야. 그럼 너희들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지!"
유현우는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유현우를 만나보기는 했어?"
"만나보지 않고 약혼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안서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나의 약혼자인 유 대표님은 나한테 첫눈에 반해서 약혼을 서둘렀고, 일주일 뒤에 바로 결혼도 할 예정이야."
"그분은 나를 평생 아끼고 보호해주고, 어떤 억울한 일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하셨어."
여자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너, 눈치껏 우리를 보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분이 화나면 아무도 널 못 지켜줄 테니까!"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치맛자락 옆에서 하얗게 질리도록 쥔 주먹이 그녀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유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웃었다. "최강수, 두 사람을 돌려보내."
30분 후.
안서영이 박태준을 부축하고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박정훈과 장미화 부부가 황급히 달려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장미화는 달려와 박태준의 다른 한쪽 팔을 부축하며 걱정과 다그침이 섞인 목소리로 연이어 물었다. "너희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이게 무슨 꼴이니?"
박태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저는 서영이가 시집 가는 게 싫어서…"
"제가 태준이한테 잠깐 바람 좀 쐬고 오자고 했어요."
박태준이 두 사람에게 혼날 것을 염려한 안서영이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차에서 내리다가 태준이가 실수로 넘어져서 바로 돌아왔어요."
"드라이브는 언제든지 갈 수 있는데, 왜 하필 지금이야?" 장미화는 바로 얼굴을 굳히고 꾸짖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영아, 너는 늘 제일 속 깊은 애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때에 철없이 굴 수가 있니?"
"하객들이 모두 도착했는데, 너희 두 사람이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박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안서영은 아무 변명 없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박태준은 그녀가 억울하게 혼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자신이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려 했다.
"서영아, 네가 왜 사과를 해? 분명 내가…"
그때,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박정훈이 그들의 말을 잘라버렸다. "됐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며 서둘러 말했다. "약혼식이 곧 시작한다. 지금 이런 얘기 할 때가 아니야."
그리고 곧바로 곁에 서 있던 하인에게 명령했다. "둘째 도련님 모시고 가서 처치해주고 옷 갈아 입혀 드려라. 서영이는 대기실에 가서 화장 좀 고치고."
안서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 위치를 물어보려 할 때, 어느새 그녀 앞에 다가선 검은 그림자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내가 데려다 줄게."
박경한이었다.
안서영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꽉 깨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맞춤 정장을 입은 그의 뒷모습에서는 고귀하면서도 차가운 분위기가 흘러나와, 누구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할 거리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안서영이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의 뒷모습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는 한때 박경한과 약혼하고 결혼하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다.
비록 오늘 그녀는 약혼을 하고 있지만, 약혼식의 남자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도착했어."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안서영의 상념을 깨뜨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어느새 분장실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그녀는 나지막이 인사하고 분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서영아." 안서영이 의자에 앉기도 전에, 박경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왜 돌아왔어?"
남자는 어둡고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 기회에 그냥 떠나버릴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왜 돌아온 거냐고."
안서영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와 3년 동안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며 미래를 약속했던 남자를 담담하게 쳐다봤다.
"박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약속 드렸으니까. 난 너처럼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기 싫어."
회차 3
안서영의 담담하지만 날이 선 말에, 마치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박경한은 그녀의 손을 놓고 말았다.
분장실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안서영은 더 이상 박경한을 상대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박경한은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박경한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서영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지키지 못한 약속이 너무 많아..."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거울에 비친 안서영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좀만 더 줘. 반년 안에 박씨 가문의 경제 위기를 꼭 해결할게."
"그때가 되면, 예전 네게 했던 약속들을 전부 다 지킬게. 모든 사람들한테 우리 관계를 당당하게 공개하고 결혼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안서영은 화장을 고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말을 그녀는 너무 많이 들어왔다.
그녀와 박경한이 몰래 연애를 시작한 날부터, 그는 곧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하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3개월, 반년, 1년… 3년 동안 그를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녀에게, 박경한은 아직도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하고 있다.
탁, 소리와 함께 쿠션 팩트 뚜껑이 닫혔다.
고개를 든 안서영은 거울에 비친 박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고하청 씨는 어떻게 할 거야? 반년 후면 그 여자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이야?"
고하청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분장실 안은 다시 한번 냉기 가득한 적막에 휩싸였다.
고하청은 박경한의 옛 연인이었다.
고하청은 한때 박경한을 버리고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 박경한을 찾아와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당시 박경한은 안서영과 사귀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는 고하청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그러나 그날 밤,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던 고하청은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박경한은 고하청이 겪은 모든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3년 동안 그녀를 돌봐왔다.
상태가 좋지 않은 고하청의 감정을 자극할까 봐 그는 자신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공개할 수 없었다.
고하청의 병세가 위중했기 때문에, 연애 기념일이든 안서영이 정성껏 준비한 데이트든, 그는 언제나 안서영을 버리고 고하청의 곁으로 달려가곤 했다.
3년 동안, 고하청은 안서영과 박경한 사이에 놓인 깊은 골짜기 같았다. 안서영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골짜기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골짜기를 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안서영은 몸을 돌려 박경한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서영아."
그녀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박경한이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약속할게. 반년 동안만 고하청을 돌볼게."
"반년 후에 네가 유현우와 이혼하고 박씨 가문으로 돌아오면, 그 여자 일은 절대 신경 쓰지 않을게!"
뒤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체온에 안서영은 눈을 꼭 감고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그 여자가 코피 났을 때, 39도 고열에 시달리는 나더러 혼자 운전해서 병원에 가게 했을 때도 마지막이라고 했어."
"그리고 우리 기념일에. 나 혼자 룸에서 꽃과 선물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을 때도, 다시는 그 여자 신경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을 감싼 그의 손가락을 한 마디 한 마디 굳게 떼어냈다.
"박경한, 유현우 씨와 나의 결혼을 허락한 사람이 바로 너야. 그리고 똑똑히 기억해 둬. 오늘부터 난,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완전히 밀쳐내고는 차갑게 말했다. "자중해 주세요."
박경한의 눈빛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서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박경한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업무용으로 설정한 벨소리였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드는 순간, 가까이 있던 안서영의 눈에 화면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 '유현우'라는 세 글자가 들어왔다.
박경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안서영이 도망칠 것을 우려한 그는 손을 뻗어 문을 잠그고 자신의 몸으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박 도련님." 전화 너머에서 장난기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약혼식 준비는 잘 돼가나요?"
박경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정식 예식은 10분 뒤에 시작됩니다. 모든 준비는 마쳤고, 잠시 후 비서를 통해 예식 영상과 사진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전화 너머에서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씨 가문이 내 약혼녀를 홀대하거나 절차를 대충 넘기진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럴 리 없습니다. 유 대표님, 염려 놓으십시오."
"내 약혼녀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잘 챙겨주세요."
박경한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두 남자의 통화 내용을 들은 안서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전화 너머 유현우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통화를 마친 박경한이 안서영과 대화를 이어가려 할 때, 분장실 문이 밖에서 두드려졌다.
이어서 박태준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서영아, 화장만 고치면 되는데 왜 문을 잠갔어? 빨리 문 열어."
안서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문을 가로막은 박경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켜."
박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문 옆으로 비켜섰다.
이것은 그와 안서영이 3년 동안 지켜온 불문율과도 같았다.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절대 누구 앞에서도 함께 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경한이 익숙하게 몸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안서영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도둑질하듯 몰래 연애를 한 지 벌써 3년이라니.'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문을 열고 문 앞에 선 박태준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왜? 아저씨랑 아주머니께서 날 기다리셔?"
"아니, 그건 아니고." 박태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차에서 네 남자친구한테 연락해서 널 데리러 오라고 했잖아. 그 사람 지금 어디쯤이래?"
"그 사람, 이제 안 와." 안서영은 분장실에 숨은 박경한을 흘깃 쳐다보며 입 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우리 헤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