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십시오."
A시 민정국 앞에서,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백아진의 아름다운 얼굴에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손에 쥔 호구부가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오늘은 그녀와 남자친구 김강준이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김강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김강준이 약속을 어긴 것이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김강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려올 뿐이다.
백아진이 고개를 숙이자, 휴대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김씨 그룹 CEO 김강준, 공항에 직접 마중 나가 여자친구를 데려오다. 두 사람의 달콤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다.
알림을 누르자 사진이 하나 떴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키가 크고 귀티가 났다. 비록 옆모습만 찍혔지만, 완벽한 얼굴 선은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특히 눈빛에서 묻어나는 부드러움은…
백아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김강준의 이런 부드러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김강준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백월광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전화 한 통이면, 혼인신고처럼 중요한 일도 내팽개칠 수 있으니.
그때,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떴다.
[인터넷 기사 봤지? 눈치 있으면 강준 오빠한테서 떨어져.]
발신자: 임하나.
김강준의 백월광이다.
백아진이 휴대폰 화면을 몇 번 쓸어 올리자, 임하나가 며칠 전 그녀에게 보낸 임신 검사 결과가 보였다.
임신 8주+
어머니란에 임하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아버지란에는 김강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검사 결과를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김강준은 매년 절반의 시간을 임하나가 있는 F국에서 보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임하나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김강준에게 문제가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녀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고, 결혼하자고 말했다.
아마도 포기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대학교 앞에서 김강준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김강준이 김씨 그룹의 태자님이며,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믿지 않고, 뜨거운 열정을 품고 불나방처럼 김강준에게 달려들었다.
김강준을 쫓아다닌 지 3년째, 그녀는 드디어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 없었다.
고백에 성공한 다음 순간, 김강준은 임하나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가운 바람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김강준에게 백월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백아진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강준이 아닌…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바로 연결되었고, 백아진은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 정략결혼을 할게요."
백아진의 어머니 장혜란은 딸이 드디어 마음을 돌렸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드디어 마음을 돌린 거야?"
백아진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언제 돌아올 거야?"
"20일."
말을 마친 백아진은 바로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집에 도착한 백아진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사실, 그녀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7년 동안, 그녀는 김강준과 너무 깊게 얽혀 있었다.
앞으로 남은 보름 동안, 그녀는 김강준과 완전히 정리해야 했다.
밤이 깊어지자…
잠이 든 백아진은 침대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더니, 차가운 품에 안겼다.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귓가에 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백아진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내일 아침 일찍 혼인신고 하러 갈까?"
그때…
침대 옆에 놓인 휴대폰이 환하게 빛났다.
차가운 품이 사라지고, 김강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지 마. 지금 바로 갈게…"
백아진은 뒤에서 옷을 입는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침대 옆 스탠드를 켜고 문으로 향하는 김강준을 향해 말했다. "강준아, 가지 마…"
김강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뒤돌아 문을 열고 빠르게 떠났다.
발소리를 들은 백아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눈가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다음 날 아침, 백아진이 일어나자 집에 낯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김강준의 비서 심정우였다.
"백 아가씨, 이건 대표님께서 아가씨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심정우는 탁자 위에 놓인 보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백아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심정우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김강준이 선물을 보낼 때마다, 백아진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담담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심정우는 직업윤리가 투철한 사람으로, 원인을 캐묻지 않고 바로 떠났다.
백아진은 탁자 위에 놓인 보석을 바라보며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것들은 분명 심정우가 고른 것일 것이다.
김강준은 사과할 때마다 성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마음도 아프지 않을 테니까.
띠링-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떴다.
임하나: [강준 오빠가 보낸 선물 잘 받았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야. 내가 강준 오빠한테 선물이라도 보내서 사과하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면, 강준 오빠는 선물도 보내지 않았을 거야!]
백아진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임하나를 차단하지 않은 이유는, A시를 떠난 후 임하나가 보낸 문자를 모두 김강준에게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강준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임하나가, 사석에서 얼마나 역겨운 사람인지 똑똑히 보게 하려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녀는 빌라를 둘러보았다.
이 빌라는 김강준의 것이고, 백아진의 물건은 많지 않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주로 그녀의 집을 정리해야 했다.
김강준을 열렬히 사랑했던 그녀는, 김강준이 있는 A시에서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가전제품은 팔아도 상관없었다.
백아진이 아쉬워하는 것은 빌라에 있는 골동품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기 전에, 병원에 들러야 했다.
며칠 전부터 속이 좋지 않아 먹는 것마다 토해냈고, 혼인신고를 위해 검사 시간을 미뤘다.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했다.
백아진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병원 입구가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누군가 소리쳤다. "나왔다! 나왔어!김 대표와 여자친구가 나왔어!"
백아진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스포트라이트 아래 임하나를 보호하며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김강준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지난번에는 사진이었지만…
이번에는 현장 생중계였다.
그녀는 김강준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에 긴장과 위협이 담겨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남자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상위자의 압도적인 기세에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김 대표님, 이 여자는 대표님과 어떤 사이입니까?"
비록 외부에서는 임하나가 김강준의 여자친구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김강준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인정한 적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김강준에게 고정되었다.
차 안에 앉아 있는 백아진도 마찬가지였다.
김강준은 대답하지 않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기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대낮인데!
김강준이 미친 걸까?
그것도 한 여자를 위해?! !!
한참이 지나서야 김강준은 안색이 창백해진 기자의 목을 놓아주고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알려주지."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은 없어!"
병원 입구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김강준의 매력적인 목소리만 떠다녔다.
"이 여자는 내가 지키는 사람이야!"
"앞으로 감히 이 여자를 괴롭히면, 그 결과는 너희들이 책임져야 할 거야!"
임하나는 수줍게 고개를 들고 김강준을 우러러보았다.
다른 기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
차에 앉아 있던 백아진은 갑자기 병원에 갈 마음이 사라져 액셀을 밟고 자신의 빌라로 돌아갔다.
회차 2
빌라에 있던 골동품을 옮기는 데만 10대가 넘는 트럭이 동원되었다.
백아진은 텅 비어버린 빌라를 보며 마음까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한 그녀는 떠나기 전날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명절 때마다 임하나는 김강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백아진은 명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래서 생일도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김강준과 헤어지면, 그녀도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희망에 가득 찬 마음으로 잠이 든 백아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김강준과 그녀의 신혼집으로 향했다.
이 집은 원래 김강준이 전액을 지불하고 구매한 집이다.
하지만 백아진은 그와 반반씩 돈을 내겠다고 고집했다.
그녀는 이곳이 두 사람의 집이라고 생각했고,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만 진정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수중에 현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끼던 당삼채 한 쌍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그것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었다.
백아진이 비밀번호를 누르자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알람이 울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밀번호는 그녀가 직접 설정한 것이다.
그녀와 김강준의 생일이었는데
틀릴 리가 없었다.
"누구세요?" 그때, 집 안에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문 뒤에서 의심스러운 얼굴이 튀어나왔다.
백아진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중년 여인도 그녀를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은 또 누구세요?"
백아진이 중년 여인을 밀치자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나오는 임하나가 보였다.
임하나가 그녀의 신혼집에 살고 있다니!백아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누가 너더러 이 집에 들어오라고 했어?"
임하나는 백아진이 나타난 것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이 백아진과 김강준의 신혼집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다.
"강준 오빠가 나더러 이 집에 들어와 살라고 했어. 백아진, 아직도 모르겠어? 강준 오빠 마음속엔 나밖에 없다고!"
임하나는 백아진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백아진은 휴대폰을 꺼내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관리사무소죠? 제 집에 낯선 사람이 불법으로 침입했어요. 관리사무소는 대체 뭘 하는 거예요?"
한 시간 후.
드디어 누군가 나타났다.
하지만 관리사무소 직원이 아닌,
김강준이었다.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들어온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아진을 발견한 그의 눈빛에 짜증이 가득했다.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백아진은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여긴 우리 신혼집이야. 네가 뭔데 내 허락도 없이 임하나를 이 집에 들어오게 해?"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임하나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쏙 들었다.그녀는 흐느끼며 불에 기름을 부었다.
"강준 오빠,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여기가 오빠와 언니의 신혼집인 줄 몰랐어. 지금 당장 이사 갈게… 콜록콜록… 콜록콜록…"
말을 마친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김강준은 빠르게 임하나를 부축했다. "백아진, 제발 이성적으로 좀 생각해."
남자가 임하나의 몸에 손을 올린 것을 본 백아진은 심장이 다시 한번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하나가 이사 갈 필요 없어.
이 집을 살 때 나도 반반씩 돈을 냈으니까, 내 지분을 현금으로 돌려주면 돼."
그녀는 신혼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백아진이 갑자기 이성적으로 변한 모습은 김강준이 원하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 회사에 돌아가면 심정우한테 돈을 보내라고 할게."
"그래."
백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백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강준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안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 감정을 억눌렀다.
백아진은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감정이 상했어도 큰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혼자서도 충분히 감정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오후.
백아진은 김강준이 보낸 돈을 받았다.
무려 10억 원.
그녀가 집을 살 때 낸 돈보다 두 배나 많은 돈이었다.
김강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관대한 사람이었다.
곧바로 김강준의 문자가 도착했다.
[내일 데리러 갈게.]
상의가 아닌 통보였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디에 가는지, 누구와 함께 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에게 한마디라도 더 하면 살이 빠지는 것처럼.
백아진은 문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휴대폰을 던져두고 떠날 준비를 계속했다.
다음 날 오전 10시, 김강준의 차가 정확한 시간에 그녀의 빌라 앞에 나타났다.
백아진이 자신의 빌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란 것 같았다. "천엽에 살고 있지 않았어?"
천엽은 김강준의 빌라였다.
그녀는 김강준과 사귄 지 3년이 되어서야 그 빌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강준은 임하나를 처음 만난 날, 그녀를 천엽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사랑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나 컸다.
"오래 살았더니 질렸어." 백아진은 대충 대답했다.
김강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30분 후, 차는 포르쉐 4S 매장 앞에 멈춰 섰다.
백아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 달 전, 포르쉐에서 새로운 스포츠카 MISSION X를 출시했다.
그녀는 그 차가 마음에 쏙 들었고,
매일 김강준의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이 차는 아직 대량 생산되지 않았고, 현재 전 세계에 단 3대밖에 없었다.
일주일 전, 이 4S 매장에서 한 대를 들여왔다는 소식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백아진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김강준을 따라 4S 매장으로 들어갔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임하나를 발견한 백아진은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가 돌아서려 할 때,
임하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준 오빠, 아진 언니, 왔어요?"
"강준 오빠, 나 차 골랐어. 이 차 어때?" 임하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차는 바로 MISSION X였다.
김강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들면 그걸로 해."
백아진을 돌아본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너도 한 대 골라."
백아진은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가득한 임하나를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이 차로 할래."
김강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차로 골라."
"난 이 차로 할래." 백아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아진이 예전처럼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본 임하나는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녀는 김강준을 돌아봤다.
김강준은 예상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백아진, 억지 부리지 마. 매장에 차가 이렇게나 많은데, 왜 다른 차를 고르지 못하는 거야?"
백아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왜 다른 차를 고르지 못하는 걸까?"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들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농담이야. 내가 어떻게 네가 고른 차를 뺏을 수 있겠어? 난 이 차로 할래."
백아진이 가리킨 방향을 본 임하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919!
100억 원짜리 차였다
회차 3
"사모님!" 임하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매니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때, 매니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임하나의 곁에 다가간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남자는 바로 김강준이었다.
백아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
김강준이 차를 몰고 떠났으니, 그녀는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4S 매장 근처에서 택시를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백아진이 하이힐을 신고 한 시간이나 걸은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택시에 올라탄 그녀는 물집이 잡힌 발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발이 아픈 것이지, 마음이 아픈 건 아니었다.
…
4S 매장에서 있었던 일 이후, 백아진은 며칠 동안 김강준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김강준의 행방을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임하나가 알아서 보고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9:05 강준 오빠가 직접 끓여준 죽 먹는 중이에요.]
[18:23 강준 오빠가 직접 까준 자몽이에요. 너무 맛있어 보이죠? 먹고 싶어요? 아쉽지만, 언니는 평생 먹을 수 없을 거예요.]
아래 사진은 껍질을 깐 자몽이었다.
[22:35 강준 오빠가 내 옆에서 자고 있어요.]
아래 사진은 김강준이 임하나의 침대 앞에 팔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
백아진은 사진을 한 번 훑어보고 휴대폰을 가방에 던져 넣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무감각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임하나가 김강준의 일정을 보고하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마치 광대들이 재롱을 부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아진은 차 문을 열고 LS엔터 회사로 들어갔다.
이 회사는 그녀와 김강준이 함께 설립한 회사였다.
당시 그녀는 김강준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그래야 김강준이 쉽게 이별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회사는 그녀의 족쇄가 되어버렸다.
"A성을 떠나 B시로 돌아가겠다고?" 회사 부사장 유재진이 놀란 얼굴로 백아진을 쳐다봤다. "김강준은 알고 있어?" 백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부사장님도 비밀로 해주세요."
"그래, 그래." 유재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김강준을 많이 사랑하지 않아? 정말 그를 떠날 수 있겠어?"
백아진은 김강준을 7년 동안이나 쫓아다녔다.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김강준에게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아요." 백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떠난 후, 회사 지분 분할은 부사장님께 맡길게요. 수고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 유재진은 고개를 숙이고 눈에 번지는 기쁨을 감췄다. "넌 내 사제잖아. 내가 LS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네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준 덕분이야."
백아진은 유재진을 고마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회사는 그녀의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유재진이었다.
유재진이 없었다면, 회사는 이미 망했을지도 모른다.
백아진은 회사를 한 바퀴 둘러본 후에야 회사를 떠났다.
유재진은 직접 그녀를 회사 아래층까지 배웅했고, 그녀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쉬운 눈빛으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
차 안에서.
백아진은 휴대폰을 열고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인 회사 지분 분할을 메모장에서 지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서산 빌라에서 이사 나오기.
서산 빌라에서 이사 나오면, 그녀와 김강준은 완전히 남이 될 것이다.
백아진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산 빌라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집에 있는 고용인들은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도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들은 김강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서산 빌라에 들어온 이후, 김강준은 집에 돌아오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백아진은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김강준은 각방을 쓰고 있었다.
옷장에는 명품 브랜드의 옷들이 가득했다.
모두 김강준이 그녀에게 선물한 옷들이었다.
하지만 백아진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자신의 캐리어를 꺼냈다.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김 대표님…"
"김 대표님…"
"김 대표님…"
연이어 공손한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김강준이 돌아온 것이다.
백아진은 황급히 캐리어를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겼다.
그녀는 김강준에게 그녀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캐리어를 숨기고 고개를 들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남자의 눈가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잘생긴 이목구비는 복도에 비치는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더욱 완벽해 보였다. 마치 예술 작품 같았다.
백아진은 숨을 멈췄다.
"뭐 하는 거야?" 김강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백아진은 캐리어를 가리고 말했다. "물건을 찾고 있었어요."
김강준은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요 며칠 너무 바빴어. 심정우와 확인해 봤는데, 19일은 괜찮다고 하네. 그날 혼인신고 하자."
또 통보하는 말투였다.
백아진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19일은 내 생일이에요."
그녀는 김강준의 눈에서 스쳐 지나가는 당황스러움을 포착했다.
"그날은 이미 약속이 있어요."
"넌 생일을 챙기지 않잖아?"
'너와 함께 보내지 않을 뿐이야.'
백아진은 결국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럼 다른 날로 정하자." 김강준은 넥타이를 풀고 욕실로 들어갔다.
30분 후, 남자는 욕실에서 피어나는 수증기를 온몸에 두르고 나왔다.
그는 수건 한 장만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물방울이 그의 가슴 근육을 따라 흘러내려 식스팩에 맺혔다.
한때 백아진을 미치게 만들었던 그의 몸매는 이제 아무런 매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강준은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는 백아진을 쳐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근육을 드러내자마자 백아진은 달려와 그의 몸을 만졌을 것이다.
"자자." 김강준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백아진은 어둠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김강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지켜봤다.
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그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바로 그 불안감을 억눌렀다.
'아니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
남은 며칠 동안, 백아진은 김강준을 만나지 못했다.
유재진의 말에 따르면, 김강준은 출장을 떠났다고 했다.
유재진도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백아진에게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녀는 김강준이 없는 틈을 타 서산 빌라에 가서 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서산 빌라에 있는 그녀의 물건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녀가 김강준에게 선물한 물건들이었다.
커플 시계, 옷, 곰 인형…
하지만 김강준은 그녀가 선물한 물건들이 유치하다며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녀는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 캐리어에 넣었다.
그리고 캐리어를 끌고 서산 빌라를 떠났다.
고용인들은 그녀가 출장을 떠나는 줄 알고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19일이 되었다.
백아진은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제 20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이 도시를 떠나면 된다.
저녁.
백아진은 혼자 시내 케이크 가게에 들러 케이크를 산 후, 공원에서 케이크를 먹었다.
케이크는 달콤했다.
그녀는 김강준이 중간에 떠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펑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졌다.
오색찬란한 불꽃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아진의 목이 뻐근해질 때쯤 불꽃놀이가 끝났다.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백아진은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김강준이 보낸 메시지였다.
[불꽃놀이 마음에 들어? 생일 축하해!]
백아진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김강준에게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 날, 드디어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가 메시지를 열고 '고마워'라고 입력하려 할 때,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사진이었다.
임하나가 보낸 사진이었다.
백아진이 사진을 열자, 그릇에 담긴 국수가 보였다.
[강준 오빠가 직접 끓여준 국수예요. 오늘이 언니 생일이라고 해서, 강준 오빠한테 장수면을 끓여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장수면도 못 먹고, 생일인데 너무 불쌍하네요.]
백아진의 눈에 맺힌 눈물이 말라붙었다.
그녀는 김강준의 카톡 프로필을 누르고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이 끓여준 장수면이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