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권서연, 부모님이 나를 집에 데려왔는데, 아직도 네 자리가 남아 있을 것 같아? 내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 집에 더 이상 네 자리는 없어."
수영장 변두리에 아슬하게 선 권현미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하더니 입 꼬리를 끌어 올려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후 몸을 뒤로 살짝 젖히더니 주저 없이 수영장에 몸을 던졌다.
엄청난 물보라가 터져 나오며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두 팔을 휘두르며 발길질하는 권현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겁에 질린 권현미의 목소리가 텅 빈 수영장에 높게 울려 퍼졌다.
수영장 바로 옆에 선 권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권현미를 내려다봤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권서연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안색이나 다정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권민덕과 진미화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딸 권현미를 환영하기 위해 오늘 파티를 열었다.
권현미가 사라진 18년 동안, 두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지만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 이후 그들은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권서연을 입양했다.
성인이 된 후 다시 권씨 가문에 돌아온 권현미 때문에 권서연은 하루아침에 권씨 가문의 쓸모 없는 존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현미야!" 진미화의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가 저택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그녀를 따라 나온 권민덕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피어 올랐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권현미와 무표정한 얼굴로 수영장 바로 옆에 선 권서연을 번갈아 쳐다보던 진미화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권서연, 이 배은망덕한 년! 네가 어떻게 현미를 물에 빠뜨릴 수 있어?!"
권민덕은 잘못을 따지지 않고 바로 물에 들어가 권현미를 구했지만 진미화는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이제 넌 여기서 지낼 자격도 없어!"
"저는 현미를 물에 넘어뜨리지 않았어요." 권서연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권현미가 스스로 수영장에 뛰어든 거예요."
"헛소리 지껄이지 마!" 진미화의 목소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떨려왔다. "현미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우리가 너를 보육원에서 데려와 정성껏 키워줬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야?"
그때, 권민덕은 수영장에 빠진 권현미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생쥐 꼴이 된 권현미는 권민덕의 품에 가만히 안겨 눈물을 쥐어 짜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빠, 엄마. 언니를 너무 비난하지 마세요. 제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제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권현미가 흐느끼며 말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음이 약해진 진미화는 권현미를 품에 안고 달랬다. "현미야, 너는 너무 착해서 문제야."
그리고 권서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장 짐을 챙겨서 우리 집에서 나가!"
곁에서 잠자코 있던 권민덕은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서연이를 데려왔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키우겠다고 원장님과 약속했어.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
권민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진미화가 버럭 화를 내며 반박했다. "오해할 게 뭐가 있어요? 현미는 하마터면 물에 빠져 죽을뻔했단 말이에요. 죽을 뻔한 사람은 당신 딸인데, 오해는 무슨 오해에요? 설마 당신은 권서연이 현미를 물에 빠뜨리지 않았다는 말을 믿는 거예요?"
작게 한숨을 내쉰 권민덕은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서연이를 돌려보내면 되잖아."
잠시 후, 그는 보육원을 운영하는 문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권서연을 입양했다. 그녀를 입양하면 나라의 보조금 60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돈은 권씨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친딸인 권현미가 다시 돌아왔으니 권서연은 하루아침에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녀를 쫓아내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곁에서 모든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는 권서연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큰 키에 선명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아름다웠지만 냉랭한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서 서러움이나 원망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무감한 눈빛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통화를 마친 권민덕은 어색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서연아, 문 원장이 곧 오겠다는구나. 전에 우리가 너에게 사준 물건은 모두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돈은 꼭 필요할 때..."
"필요 없어요." 권서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권민덕의 말을 가로챘다.
진미화의 품에 얌전히 안긴 권현미의 두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가득 차올랐지만 순수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내가 집에 돌아와서 화난 거야? 난 그저 그 동안의 아쉬움 때문에 부모님 곁에서 추억을 쌓고 효도하고 싶었을 뿐이야..."
"현미야,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사과는 그 동안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권서연이 해야지." 진미화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진미화와 권민덕을 한참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번갈아 쳐다본 권서연이 입을 열었다.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두 분이 제일 잘 알고 있잖아요. 저는 권현미를 물에 빠뜨리지 않았어요."
추궁에 가까운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기에 두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권현미의 편을 들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야." 권민덕이 눈살을 가득 찌푸리고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진미화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 할 때, 정원에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멈춰 섰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며 중년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공손하게 먼저 말을 걸었다. "권민덕 씨, 서연이를 데리러 왔어요."
권민덕은 흠칫 놀란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아, 문 원장과 함께 가면 돼. 이제부터 문 원장이 너를 챙겨줄 거야."
빠르게 거실을 가로질러 다가온 문 원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권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아, 너를 데리러 왔어.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더 좋은 가족의 품에서 지낼 수 있게 내가 최선을 다할게."
문 원장은 말을 하면서 권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었다. "지난 번에 네가 보육원에 왔을 때, 미소가 유독 아름다웠던 육순희 사모님을 기억해? 그 사모님이 너를 정말 많이 예뻐했었지. 내가 너의 사정을 말했더니, 꼭 너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문 원장의 말에 권서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육순희 사모님이라면 미소 짓고 있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지던 그 사모님이 아니던가?
문 원장은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 했다. "육순희 사모님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어. 너만 원한다면 사모님의 가족이 되어 함께 지낼 수 있을 거야."
잠시 뜸을 들인 문 원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네가 그 집에서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
상부는 문 원장에게 권서연을 위해 마땅한 입양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네 번 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권서연은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제야 안도감을 느낀 문 원장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회차 2
권서연과 문 원장이 앞장서고 권씨 가문 사람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얼굴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두 눈에는 경멸감으로 얼룩진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권서연을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에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밖에 세워진 차를 발견한 순간 호기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크래치와 렌터카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자동차는 한눈에 봐도 낡고 초라해 보였다. 렌터카 옆에는 체구가 조금 우람진 남자가 서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지고 실크 셔츠에 먼지가 묻었지만 우아한 기품은 무시하지 못했다.
렌터카 옆에 선 남자를 발견한 권서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남자가 입은 셔츠가 맞춤 제작 셔츠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셔츠 한 벌은 권씨 가문이 몇 달 동안의 소비와 맞먹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둔 권서연은 자신을 데리러 온 남자가 결코 평범한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권서연을 흘깃 훑어본 허영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언뜻 스쳤다.
소심한 성격에 잔뜩 겁먹은 소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녀는 차분한 얼굴에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재미있군.'
허씨 그룹의 최고 권력자인 허영찬은 세계 각국에 영역을 뻗어 비즈니스를 처리하고 있었다. 권씨 가문과 같은 사람들이 쉽게 만날 수 없는 상업계 유명 인사였다.
허영찬은 육순희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해서 아들 두 명을 낳았지만 육순희는 귀여운 딸을 원했다.
6개월 전, 보육원에서 권서연을 만난 육순희는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지만 당시 권서연은 이미 권씨 가문에 입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육순희는 언젠가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확신하며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 전, 문 원장이 전화로 전한 소식을 들은 육순희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마터면 기쁨의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이후 그녀는 남편 허영찬에게 직접 권서연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 시각 천문학적인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던 허영찬은 더 캐묻지 않고 당장 권씨 가문으로 향했다. 도중에 교통사고가 일어났지만 다행이 그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을 확인한 허영찬은 바로 옆 건물에서 운영 중인 렌터카 업체를 발견하고 차를 빌린 뒤, 권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여 눈앞에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허영찬의 '평범'한 옷차림과 낡아빠진 렌터카는 권씨 가문의 조롱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애초에 권서연이 입양 갈 가족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지만 이렇게 형편없을 줄은 몰랐다. 조금 해진 것 같은 셔츠와 낡아빠진 렌터카의 모습은 권씨 가문 사람들에게 더욱 강한 확신만 남겨줄 뿐이었고, 권서연은 앞으로 힘든 날을 보내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권현미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권현미는 앞으로 권씨 가문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랄 것이지만, 권서연의 미래는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이제 그녀는 시궁창과 같은 집에서 고된 삶에 지쳐 허우적거릴 것이다.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문 원장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육순희는 엄청난 실력을 보유한 가문의 사모님으로, 만날 때마다 부와 재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문 원장은 분명 오해나 실수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문 원장은 권서연과 함께 앞으로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허영찬 씨, 안녕하세요. 이 아이가 바로 제가 말한 권서연입니다."
권서연을 빤히 내려다본 허영찬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지만 친근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허영찬은 그제야 자신의 아내가 왜 권서연을 한 번 보고 계속 잊지 못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때로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기기도 했다.
허영찬은 권서연이 분명 자신의 가족들과 잘 지낼 것 같다는 확신을 느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내가 여러 번 말하더군요."
그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문 원장은 권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서연아, 허영찬 씨는 육순희 사모님의 남편 분이야."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권서연은 허영찬의 준수한 얼굴에 가득 묻어난 자신감과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엄숙한 얼굴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 친절함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권서연은 마음속에서부터 호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쪽 입 꼬리만 살짝 올라간 권현미가 가식적인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언니, 이 아저씨가 렌터카를 타고 온 것 같은데 아빠한테 데려달라고 하는 건 어때?"
연신 눈을 깜빡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권현미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은 숨겨지지 않았다.
권서연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그럴 필요 없어, 난 렌터카도 충분히 좋으니까."
권민덕은 슬픈 표정을 연기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아, 새집에 가면 눈치를 많이 살피고 미움 받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비록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지만 성적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 되거라."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은 권민덕의 말속에 의도가 분명했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권민덕을 쏘아본 허영찬은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 성적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허씨 가문에 넘쳐흐르는 것이 돈이니, 내 딸은 세상을 여유롭게 즐기면 돼. 우리는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해 줄 생각이다."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진 권씨 가문 사람들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허영찬의 터무니없는 대담함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권씨 가문도 재벌 가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과 자금을 손에 넣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어떻게 감히 그들 앞에서 이런 허세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해진 옷에 낡은 렌터카를 타고 온 그는 무슨 자신감으로 재벌 흉내를 내는 걸까?
권현미는 권서연이 다시 버림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조용한 거리에 웅장한 배기음이 가까이에서 들려오며 세 대의 롤스로이스 세단이 연달아 허영찬 뒤에 멈춰 섰다.
곧바로 차에서 말끔한 정장 차림인 경호원이 동시에 여러 명 내리더니 허영찬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대표님과 서연 아가씨를 댁에 모셔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권씨 가문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에 눈만 크게 떴다. '롤스로이스 세단에 개인 경호원까지!'
권현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허영찬을 바라봤다.
'잠깐, 허 대표님? 이 남자가 허씨 그룹을 통솔하는 허영찬 대표라고?!'
회차 3
권민덕과 진미화의 놀란 표정을 뒤로한 채, 권서연을 돌아보는 허영찬의 두 눈에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어서 가자. 네 엄마가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허영찬의 말에 권서연은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을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손끝에 스친 따사로운 햇살이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피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문 원장은 권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며 물었다. "서연아, 허 대표님이 너를 데리러 왔는데 대표님과 함께 갈래?"
권서연의 맑게 빛나는 두 눈이 허영찬의 깊은 눈동자를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아저씨의 집에 가면 갑자기 쫓겨나는 날이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허영찬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초에 그는 딸을 입양한다는 사실에 큰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단지 아내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함일 뿐이었다. 더욱이 국가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허씨 가문에서 아이를 한 명 더 키우는 것은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권서연의 얼굴에서 허영찬은 아내의 젊은 시절을 엿보았다. 이 순간, 그는 권서연을 딸로 인정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허리를 약간 숙인 그가 엄숙하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권서연을 바라봤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허씨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이 사실은 절대 변함없을 거야."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음 졸인 문 원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영찬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다.
권서연은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허영찬과 함께 고급 세단을 향해 걸어갔다. 권씨 가문 사람들은 권서연이 고급 세단에 타는 모습을 충격에 빠진 얼굴로 지켜봤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녀는 누구나 함부로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허씨 가문의 일원으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랄 것이다.
권씨 가문 사람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권서연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은 권서연을 쫓아내는 이 순간이 축제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재벌 가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권서연같이 성격이 괴팍한 아이는 머지않아 다시 보육원에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육원에 버려진 사람의 운명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급 세단 몇 대가 빠르게 거리를 가로질러 시내 방향에 들어섰다.
세단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권서연은 작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가방 안에는 몇 벌의 갈아입을 수 있는 옷과 작은 노트북, 그리고 디자인이 독특한 휴대폰 한 대가 전부였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권서연이 빠르게 휴대폰을 잠금 해제하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문 원장이 새로운 가족을 소개시켜 줬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그녀의 답장은 짧고도 간단했다. "맞아."
상대방은 그녀의 무심한 답장이 익숙한 듯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허씨 가문은 결코 호락호락한 가문이 아니에요. 애초에 우리 계획에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권서연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새로운 메시지가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알겠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권서연은 이번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권씨 가문의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도록 해. 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잘 해낼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가 더 이상 도와줄 필요도 없지."
권수연이 처음 권씨 가문에 입양됐을 때, 당장이라도 몰락하는 권씨 가문에 엄청난 양의 자금을 투자해 권씨 가문이 재벌 가문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했다.
바로 그때, 곁에 앉은 허영찬의 휴대폰이 울렸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육순희의 들뜬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여보, 딸을 데리고 오는 길이예요? 우리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려주면 주방 아주머니한테 미리 만들어 놓으라고 할게요."
허영찬은 룸미러로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권서연을 흘깃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 데리고 가는 길이야. 우리 딸은 정말 특별한 것 같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3시간 달리고 나서야 겨우 목적지 가까이에 도착하는 듯 차가 속도를 줄였다.
허씨 저택은 황금 지역이라고 불리는 도시 중심의 운정원에 위치해 있다. 운정원은 엄청난 영향력과 자금을 보유한 사람들이 모여 지내는 곳으로 진정한 재벌 가문의 영역을 그대로 보아낼 수 있었다.
땅 한 조각만 있어도 3대가 부유하게 지낼 수 있는 지역에 허씨 저택은 넓은 정원과 오후 햇살에 빛을 반짝이는 인공 호수가 펼쳐졌다.
몇 년 전, 권민덕도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지만, 문턱도 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고급 세단이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러 지나자 권서연은 창문을 통해 황성에 버금가는 화려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먼저 차에서 내린 허영찬이 직접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며 정원으로 안내했다. 구불구불한 정원을 지나는 그녀는 갖가지 꽃이 만발하여 곱게 핀 모습을 천천히 살펴봤다.
허씨 가문 사람들은 일찍이 저택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노부인이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기세를 뿜어냈다.
잔머리 하나 없이 완벽하게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카락과 조명에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를 한 노부인은 모든 허씨 가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심영실이다.
심영실의 오른쪽에는 큰아들 허태성과 그의 가족이 앉아 있었다. 허영찬은 노부인의 둘째 아들이고, 막내 허미란은 남편과 줄곧 해외에서 지내고 있었다. 깔끔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노부인의 곁에 선 심슬기는 노부인의 친정에서 허씨 가문에 보낸 가까운 친척으로 노부인이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 이 아이가 바로 제 딸 서연이에요." 허영찬은 평소에 듣기 어려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우아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 권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태연한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나 불안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난한 흰색 블라우스는 화려한 조명과 저택에서도 눈에 띄었으며 가냘픈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한 분위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허씨 가문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보육원에서 자란 것도 모자라 몇 번이나 파양 당했다는 말에 분명 볼품없는 소녀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온몸으로 뿜어내는 권서연의 자신감에 모두들 말문이 막혔다.
고급스러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육순희가 빠르게 앞으로 다가오더니 권서연을 품에 꼭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서연아, 소중한 내 딸.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엄마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꿈만 같아.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을 거야."
육순희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사실 그녀는 권서연이 다시 고아가 되어 그녀가 입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육순희의 품에 안긴 권서연은 은은한 향수 냄새와 따뜻한 온기에 온몸에 잔잔한 물결의 파도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처음으로 가족의 정이 어떤 느낌인지 똑똑히 느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