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이른 아침, 눈을 뜬 소예림은 옆에서 자고 있는 낯선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황에 빠진 그녀는 제일 먼저 이불을 들춰보았다. 다행히 옷차림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당혹감과 후회가 뒤섞인 감정으로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이제 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예림은 어젯밤 일을 기억하려 애썼다.
부모님의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냐는 물음에 웃으며 대답했던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남자친구가 사촌언니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큰 충격에 휩싸인 그녀는 그 길로 곧장 술집으로 향했다. 믿어왔던 남자친구 김동민의 배신은 너무나 큰 상처였다. 하지만 그 이후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잔뜩 술에 취해 낯선 남자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모양이었다.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간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
남자가 깰까 봐 그녀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 나오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우아한 노부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노부인은 방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소예림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노부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장 할머니...?"
자신을 알아본 그녀는 깜짝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소예림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눈치였다. '아, 예전에 그 여자애구나.'
소예림은 5살 때 우연히 가족과 떨어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마침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던 장미선과의 인연은 그때 시작되었다. 똑똑하고 밝았던 소예림에게 그녀는 금세 애정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 뒤 두 사람은 연락이 끊겼다.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예림이? 예림이야? 어머, 숙녀가 다 됐네!" 장미선의 차가운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괜찮니? 이 나쁜 놈은... 어?"
장미선은 침대 위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다 말고 멈칫했다.
남자는 잠에서 깨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배고픈 짐승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먹잇감을 노려보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예림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서둘러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할머니, 너무 걱정마세요. 저희 아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미선은 위로하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두드렸다. "얘, 걱정하지 마. 이 할미만 믿으렴!" 장미선은 손자 한도겸이 아직 짝이 없어 늘 걱정스러웠다. 낯선 여자의 정체가 소예림이었을 줄이야! 그녀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두 사람을 엮을 작정이었다.
소예림을 대할 때와 달리 손자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투가 싸늘했다. "한도겸!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야? 할미를 매일 걱정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이게 예림이처럼 착한 여자애나 건드리고 말이야. 그것 밖에 안 되는 애였니?"
장미선은 손자를 나무란 뒤 좀 더 사무적인 어조로 자신의 속뜻을 밝혔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 두 사람은 최대한 빨리 결혼하도록 하려무나."
한도겸과 소예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할머니!" 한도겸이 항의했다. 그가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장미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싫다고 할 권리가 없어. 남자라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예림이만 괜찮다면 둘이 결혼하도록 해."
항상 통제적이었던 할머니의 지시를 당장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못했다. 당황한 한도겸은 고개를 살짝 돌려 소예림에게 눈치를 주었다.
긴장감이 팽팽한 두 사람 사이에 낀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알고 보니 이 낯선 남자가 장 할머니의 손자였다니, 세상도 참 좁다. 어쩜 이런 우연이!
마침 결혼을 압박하는 부모님을 떠올린 그녀는 남자를 다시 차분히 살펴보았다. 외모도 준수하고, 다른 남자들보다 더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정말 그와 결혼한다면 장미선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편이 되어줄 터였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소예림은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결혼할게요."
회차 2
결국 두 사람은 30분 만에 혼인 신고를 마쳤다.
"이제 만족하세요?" 한도겸은 우울한 목소리로 장미선에게 물었다. 누가 봐도 불만족스러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장미선은 화를 내며 손자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렇게 좋은 여자랑 결혼한 건 행운인 줄 알아라!"
그제서야 소예림은 현실을 맞닥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남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그는 똑똑하고 잘나 보였다. 남자다운 인상에 부담스럽지 않은 이목구비가 조화로웠다. 키도 거의 190은 되는 듯했다. 큰 키와 몸집에서 오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때였다. 한도겸이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돌아서서 소예림과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당황해 하며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에 장미선은 이번 결혼에 대해 아주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을 제대로 소개하려는 순간, 소예림의 전화가 울렸다.
할머니의 전화였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잠시 자리를 이동해 재빨리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너 대체 어디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어떻게 아무 말 없이 외박을 해! 지금 당장 집으로 와!"
수화기 너머로 할머니 조순자의 씩씩대는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순자는 소예림이 뭔가 설명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소예림은 통화 종료음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두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그러렴. 도와줄 거 있으면 도겸이한테 연락하고."
장미선은 그녀를 붙잡는 대신 두 사람이 번호를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거듭 사과한 뒤 그녀는 택시를 불러 탔다.
한도겸은 택시가 떠나자마자 경멸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할머니,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아무 여자하고나 결혼 시키다니, 이게 말이 돼요?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장미선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상한 애가 아니야. 옛날에 자원봉사자로 일했던 고아원에서부터 알고 지냈단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착했지. 그 모습 그대로 큰 것 같더구나. 훌륭한 아내감인 데다 너도 조만간 좋아하게 될 거야."
"말도 안돼요." 그는 비웃었다. "결혼 생활은 딱 1년만 할게요. 그때까지 서로 마음이 없으면 이혼할거예요."
장미선은 눈을 굴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자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좋아. 하지만 올해는 예림이와 같이 살아야 해."
굳어진 표정의 한도겸의 두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바로 그때 장미선은 문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말했다. "참, 나이가 드니 깜박깜박하는구나. 예림이를 집에 바래다줬어야 했는데. 누군지 몰라도 전화를 받고 와서 기분이 꽤 안 좋아 보이던데. 혹시 모르니 예림이 집에 한 번 가봐."
그는 원치 않았지만 고집 불통 할머니를 꺾을 재간이 없었다. 결국 혼인신고서에 적어두었던 그녀의 집 주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예림이 거실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컵이 날아왔다.
깜짝 놀랐지만 제때에 고개를 숙여 다치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 당장 무릎 꿇어!"
거실 소파 중앙에 앉은 할머니가 잔뜩 성이 나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 옆에는 금테 안경을 쓴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제 사촌과 바람을 피우다 걸린 전 남자친구 김동민이었다.
그제서야 소예림은 왜 그렇게 할머니가 화를 내는지 깨달았다.
"전 아무 잘못도 없어요. 왜 저한테 그러세요?" 그녀는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두 사람을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할머님, 예림이 옷 좀 보세요. 밤새 밖에 있었나 봐요. 어휴, 술 냄새! 대체 어떤 놈이랑 있었던 거야? 하긴 이제 할머니 말도 듣지도 않겠네요." 김동민은 뻔뻔스럽게도 아무렇지 않게 할머니에게 그녀를 험담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할머니를 막을 길은 없었다.
"대체 고아원에서 뭘 배워먹은 거냐? 지 아비를 똑 닮아서 말도 더럽게 안 듣지. 어디 가서 내 손녀라고 하지 마!"
회차 3
"남자랑 놀아났냐고요? 배은망덕? 제가 더럽다고요?"
비웃음과 함께 소예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의 말을 되풀이 했다. 그녀는 분노를 삼키며 휴대폰을 꺼내 전날 찍은 영상을 찾아 재생을 눌렀다.
"여기서 더러운 사람은 너야, 김동민. 이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뻔뻔스럽게 나오는 네 모습이 너무 역겨워 참을 수가 있었어야지 말이다. 우리 할머니까지 당신 편으로 끌어들이다니 대단해.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짐승같은 너라고!"
영상 속에서는 헐벗은 두 남녀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굳이 화면을 보지 않아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김동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예림! 너 대체... 할머님 앞에서 뭐 하는 거야?"
환갑을 갓 넘긴 조순자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런 음란한 물건을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했다. 조순자는 바로 옆에 있는 쿠션을 집어 들어 그녀에게 힘껏 던졌다.
"이 망측한... 대체 내 앞에서 무슨 짓이야! 네 아버지가 이렇게 가르치더냐?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더니! 친 엄마는 가진 것 없이 홀몸으로 들어왔다가 일찍 죽기나 했지. 쓸모 없는 새 어미는 시집온 지 몇 해나 되었는데 애새끼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데다가 계집애를 낳지 않나. 그것도 아파서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애를! 어휴, 지겨워! 그리고 너! 이제 부모 없으니 네 맘대로 하겠다, 이거니?"
쿠션에 맞은 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할머니가 손녀인 자신에 대한 창피와 혐오야말로 그녀의 마음을 쿡쿡 찌르며 아프게 했다.
할머니는 항상 큰아들을 편애했고 큰 아버지의 자식들만 예뻐했다.
같은 손녀였지만 소예림은 늘 골칫덩이 취급 받았다.
이제는 익숙해져 큰 상처는 되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됐다. 김동민이 먼저 배신을 하고 소자윤과 바람을 폈는데 왜 소예림이 후과를 감당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가? 게다가 부모까지 모욕당하다니! 이번에는 할머니가 선을 넘었다.
'왜 항상 나만 참아야 하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낀 소예림은 김동민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우리 부모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뻔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동민과 소자윤이죠. 절 배신하고 바람 핀 인간들이니까요!"
이 말을 들은 조순자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김동민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야?"
그는 당황해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한편 소자윤은 위층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그녀는 아래층으로 달려가 재빨리 소예림의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알몸으로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소자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재빨리 변명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이건 제가 아니라 얼굴을 합성한 거예요. 요즘에 AI같은 거 많잖아요. 소예림이 일부러 우리 골탕 먹이려고 저러는 거예요. 저는 항상 할머니 말씀 잘 듣잖아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전 절대로 임자 있는 남자 안 만나요. 그런데 소예림은 일부러 우리 집안 명예를 떨어뜨리려고 해요."
그녀는 피해자 행세를 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눈물을 닦으러 얼굴로 손을 올리며 그녀는 몰래 김동민을 향해 눈짓했다.
그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저와 동민 오빠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건 제가 아니라 소예림이라고요. 거기서 그쳤으면 그만인데 지금 이걸 보세요. 밤새 다른 남자랑 놀다 왔잖아요. 할머니, 저 믿죠?"
소자윤은 더욱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김동민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절 먼저 속인 건 소예림이라고요!"
조순자는 항상 소자윤을 예뻐했다. 그녀가 소예림 말을 믿을 리 만무했다. "이렇게 악독할 수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네? 악독하다고요?" 소예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울뿐인 가족에 실망만이 가득했다.
"이 영상 인터넷에 올릴 거예요. 가짜인지 아닌지는 전문가가 말해주겠죠."
소자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조순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할머니, 제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면 우리 집안 이미지가 실추될까 봐 걱정돼서요."
할머니를 어떻게 구워삶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조순자의 평생 관심사는 오직 집안의 명예 뿐이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것만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소예림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어느 집안 사람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해? 자존심은 없어도 집안 명예는 지킬 줄 알아야지. 원하는 게 대체 뭐니?"
"저는..."
하지만 조순자는 그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입 다물어! 그만하자, 이제. 다신 얘기 꺼내지도 마."
그때 거실 쪽에 키 큰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실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