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서지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서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혹시 환각인가? 배혁준이 왜 여기 있지? 임예정이 해외에서 막 귀국했는데, 사랑하는 그녀와 짜릿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배혁준은 서지하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자 얼굴을 찌푸렸다.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몰골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처량해 보였다. 창백한 뺨에 착 달라붙은 긴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배혁준의 말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방금 호텔에서 임예정을 대하던 다정하고 애정 넘치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서지하는 가슴 한구석이 알알해났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을까.
서지하는 씁쓸함을 감추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요. 우산이 없어서 조금 젖은 것뿐이에요."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코가 간질거렸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러나 배혁준은 그녀를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인상을 구겼다.
"정신은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이제 어린애도 아니잖아. 비를 맞았으면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지. 일일이 다 말해줘야 돼?"
서지하의 미소가 굳어졌다. "미, 미안해요⋯"
"빨리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안 그러면 감기 걸려." 배혁준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굳어진 얼굴로 그녀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감기? 그제야 서지하는 자신이 임신한 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아프면 안 되었다.
그 생각에 그녀는 서둘러 방으로 가서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닿자 몸 속의 한기가 빠져나가며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서지하가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김이 가득 찬 욕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막고 서 있는 배혁준과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수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배혁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챈 그가 무심하게 물었다. "왜 긴장하는 거야?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잖아."
서지하는 그 동안 함께 보냈던 뜨거운 밤들을 떠올리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배혁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감기약과 물컵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먹어."
서지하는 약을 보며 잠깐 망설였다. 임신 중에 함부로 약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비를 많이 안 맞았어요."
하지만 배혁준의 말투는 타협의 여지가 없이 단호했다. "거울이나 보고 말해. 얼굴이 귀신처럼 창백하잖아. 내일 할머니 뵈러 가야 되는데 아픈 모습을 보여야겠어?"
그러나 서지하는 아기가 걱정되어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따뜻한 물을 마시면 돼요. 정말 괜찮아요."
배혁준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약과 물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혁준씨, 지금 뭐 하는⋯⋯아악!" 서지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혁준이 그녀의 가녀린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한 다음 입술을 덮쳤다.
그가 입에 머금고 있던 약과 물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가 약을 삼켰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서지하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온몸이 나른해났다.
부드러운 입술에 자극 받은 배혁준이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그가 몸을 일으켜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려다 보는 그의 눈빛은 강렬한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그의 뜨거운 시선을 마주한 서지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안 돼!"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었다.
"응?" 배혁준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의아해하며 동작을 멈췄다.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지만, 서지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했다.
"혁준씨, 우리⋯" 그녀는 침을 삼키며 잠깐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 "우리 이혼해요."
"뭐라고?" 그녀의 말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배혁준의 몸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잔뜩 화가 난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다시 말해 봐."
서지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두려움을 억지로 억누른 채 배혁준의 무서운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우리 이혼해요."
배혁준의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왜?"
서지하는 그의 질문에 당황했다.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왜냐고? 당연히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하도록 놔주려고 그러는 거지.
"그게⋯"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서씨 가문에 또 문제가 생긴 거야? 돈이 필요해?" 배혁준은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지하, 주제나 알고 까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말하라고.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는 건 딱 질색이니까."
서지하는 조용히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 남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혼을 빌미로 내세운다고 생각하는구나.'
씁쓸하게 웃는 그녀의 눈에서 평소와 달리 결단력이 비쳤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혼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까요. 혁준씨, 우리 어차피 이혼할 거잖아요.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뭐가 달라져요?"
배혁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침묵에 서지하는 혼란스러웠다. 불안한 와중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닥의 희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혁준씨는 혹시⋯ 이혼을 원하지 않는 건가요?"
회차 3
서지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가슴이 설렘으로 요동쳤다. '이 남자가 그래도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구나. 나한테서 마음이 완전히 떠난 건 아니었어.'
그녀의 기대에 찬 눈빛과 달리 배혁준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 "서지하, 착각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내가 이혼을 거부할 거라고 생각해?"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억해, 서지하. 이혼을 요구한 건 너야. 후회해도 소용없어. 나중에 질질 짜면서 다시 기어들어오려고 꿈도 꾸지 마."
그 말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서지하는 침대에 누운 채 절망에 빠졌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배에 손을 올리자 작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원래는 이 기쁜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몇 시간 만에 이혼얘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녀는 결국 배혁준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헤어지더라도 혼자서 아기를 키울 생각이었다.
한편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녀의 직업은 배혁준의 "비서"였다. 배혁준의 할머니가 두 사람을 맺어주기 위해 그렇게 안배한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비서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서지하가 부영 그룹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수다쟁이 동료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지하 씨, 아침 내내 기다렸어요! 배 대표님과 임예정 두 사람 무슨 사이에요? 둘이 사귀는 건가요?"
"슈퍼모델 임예정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배 대표님이 파티를 열었다는 소문이 밤새 파다하게 퍼졌어요. 심지어 수많은 친구들도 초대했다면서요. 조만간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려는 건가 봐요!"
"파티가 끝나고 둘이 뜨거운 밤을 함께 보냈다고 들었어요.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갈까요? 지하 씨는 더 아는 게 없나요?"
서지하는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잘 몰라요."
동료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럴 리가요, 지하 씨! 배 대표님의 비서인 지하 씨가 어떻게 내막을 모를 수가 있어요?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서지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다들 그녀가 배혁준의 비서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가 배혁준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배혁준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것을 꺼려했다.
서지하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몰라요. 이제 됐죠? 그리고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각자 할 일이나 해요."
동료들은 가십거리를 캐내지 않고서는 순순히 물러날 눈치가 아니었다. 서지하는 그들이 뭐라고 더 하기 전에 말을 잘라버렸다. "말할 게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더 묻지 말아요. 다들 잡담하려고 회사에 왔나요? 어서 일하러 가세요!"
그녀의 딱딱한 표정에 동료들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그녀의 말이 맞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요."
서지하가 자리를 뜨자 그들은 뒤에서 낮은 소리로 숙덕거렸다.
"쳇!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거만하긴. 흥! 비서가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맞아. 그녀가 3년 전에 낙하산으로 입사했을 때, 얼굴도 예쁘고 해서 대표님의 비밀 애인인 줄 알았지. 근데 배 대표님은 저 여자한테 아예 관심도 없더라고. 회의나 미팅에 데려가는 것도 한 번도 못 봤어. 그저 잡무나 처리하는 말단 비서일 뿐이야. 그게 다지, 뭐!"
"사실 여기서 일할 날도 얼마 안 남았어. 배 대표님과 임예정이 결혼하면, 서지하가 제일 먼저 쫓겨날 걸? 하긴, 누가 자기 남편 주변에 예쁜 비서를 두겠어?"
"맞아!"
그들의 웃음소리와 거침없는 대화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지만, 서지하는 무시하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일에 몰두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과 맞붙어 논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처지가 참 우습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다른 비서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서지하도 퇴근하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그녀의 절친인 함은서에게 전화가 왔다.
"지하야, 오늘 아침 뉴스 봤어. 도대체 혁준 씨랑 임예정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냥 소문일 뿐이지?"
함은서의 불신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지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이야."
"뭐라고?!" 전화기 너머로 함은서의 충격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하루 종일 많은 생각을 한 서지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우리 결혼은 정략 결혼이었어. 그가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나와 결혼했을 뿐이야. 이제 그의 첫사랑이 돌아왔으니, 나도 이 결혼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어. 그들이 함께 하도록 놔줄 거야."
함은서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아기는 어쩌고? 혁준 씨에게 깜짝 기쁨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깜짝 기쁨? 아마 그에게는 끔찍한 충격일 걸?" 서지하는 본능적으로 평평한 배를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결심했다는 거야. 이혼하고 혼자서 이 아이를 키울 거야. 그 사람이 알 필요는 없어."
"너 진심이야? 정말 이혼할 거야?" 함은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면 일도 그만둬야 하잖아. 부영 그룹에 계속 있다간 조만간 들통날 거야. 배가 점점 불러올 테니까."
"걱정 마, 이미 대비하고 있어. 곧 사직할 거야. 그리고 내 꿈을 다시 시작할 거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떠올리자 서지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지하야, 너 다시 디자이너로 복귀하기로 결심한 거야?" 함은서는 제 일처럼 기뻐했다. "잘 생각했어! 난 항상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었어! 넌 천재 디자이너이니까! 덤벼라, 세상아! 패션 디자인계의 전설인 해오름이 온다! 넌 배혁준의 비서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아까운 애야. 그 동안 고생 많았어!"
"해오름⋯" 서지하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을 듣고 멍해졌다.
배혁준을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왔다.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서지하."
그때 갑자기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란 서지하가 몸을 돌리자 무표정으로 서 있는 배혁준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