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오늘 결혼식 정말 떠들썩하네요. 소문 들었어요? 허 변호사의 첫사랑이 호텔 옥상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다던데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서지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유나가 자살 소동을 벌인 건 이번이 아흔아홉 번째였다.
그녀는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녀와 허준혁의 결혼식이었다.
진유나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걸 보자, 이번에도 자신이 한 발짝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5년을 사귀는 동안, 진유나 역시 5년 내내 자살 소동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허준혁은 가장 먼저 달려가 그녀를 달랬다.
그러다 보니 서지안은 오히려 자신이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든 불륜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허준혁이 자신을 두고 진유나에게 갔을 때 분명히 말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그의 '마지막'이라는 말을 믿었기에, 오늘 결혼식까지 올리게 된 것이다.
"죽고 싶으면 그냥 죽으라 그래! 나한테 전화해서 뭐 어쩌라는 거야?"
그 말에 서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발코니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허준혁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투신? 걔 그런 배짱이 없어! 자살 소동이 몇 번째야. 진짜 피라도 본 적 있어?"
이어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작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허준혁이 전화를 끊고 뒤돌아보자 서지안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낀 서지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엔 진유나를 찾아가지 않았어… 그럼, 날 속인 건 아닌 걸까? 그때 정말 마지막인 걸까?'
"뭘 그렇게 쳐다봐? 곧 결혼식 시작이야. 준비 다 됐어?" 허준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지안은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허준혁이 선천적으로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호감에서 시작해, 지금의 진심 어린 사랑까지.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고 믿었다.
'나는 준혁이한테 특별한 존재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겠어?'
서지안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고, 눈꼬리가 행복하게 휘어졌다. "준혁아, 우리 드디어 결혼하네…"
허준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알고 있어."
그때, 대기실 문이 활짝 열리며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식장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신랑,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서지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허준혁의 팔짱을 끼고 단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허준혁의 휴대폰 벨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사회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객들은 이미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서지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유나 전용 벨소리이었다. 그녀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소리였다.
허준혁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또 왜?"
사회자는 당황한 듯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몇 년간 사회를 맡아 왔지만 이런 돌발 상황은 처음인 듯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한마디를 남긴 허준혁은 성큼성큼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바로 갈게."
순식간에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가지 마…" 서지안은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채 그의 뒤를 쫓으며 애원했다."그때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득실을 따지는 듯 잠시 침묵했다. 몇 초 후,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가 진짜로 뛰어내렸대. 내가 가봐야겠어. 넌 하객들 좀 진정시키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허준혁!" 서지안은 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힘을 주었다. "지금 가면, 나 이 결혼 안 해!"
허준혁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후회하지 마."
그 한마디에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서지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준혁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아주 조금 흔들렸지만, 결국 서지안이 한 발 물러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늘 그랬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나를 쉽게 놓지 못했잖아.'
그는 서지안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곱게 자란 재벌가 아가씨가 가족과 인연까지 끊고 경성까지 내려와, 자신의 곁에서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슨 일이 생기든 그녀는 늘 자신의 편이었다. 서지안의 가장 큰 소원이 허준혁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진유나가 자살 소동을 벌일 때마다, 뒤에서 수습해주는 것도 서지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을 협박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진유나 쪽은 이번에야말로 실제 사고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는 서지안의 감정에 휘둘려 있을 수 없었다.
허준혁이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순간, 하객들은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신랑은 왜 도망간 걸까?'
결혼식장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서지안은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린 뒤, 멍하니 서 있는 사회자의 손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결혼식은 취소되었습니다…"
순간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더 이상 그 소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늘 이후, 자신이 경성에서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두가 서지안이 허준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재벌가 자제들의 구애를 거절하고, 가난한 그를 따라 고생을 선택했다는 사실도. 그런데 마침내 결실을 맺는 날, 그녀는 버림받았다.
서지안이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갔을 때, 호텔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멀지 않은 곳, 에어 매트리스 위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진유나가 누워 있었다. 허준혁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진유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다. "준혁아… 어떻게 나를 혼자 두고 가? 우리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만해."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진유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짙은 먹물처럼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싫어!"
서지안은 진유나의 행동을 보고 허준혁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자신도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얼굴 만지는 거 싫어."
차가운 목소리에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허준혁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진유나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마음대로 어루만지도록 그대로 두었다. 결국 진유나는 울음을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서지안은 그동안 허준혁의 감정 표현 장애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차갑고 무심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진유나를 품에 안은 채 구급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허준혁의 얼어붙은 마음도 자신이 곁에 있으면 녹아내릴 거라고 믿었다. 그러면 그 맑고 서늘한 눈동자에도 자신을 향한 기쁨과 다정이 스며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뺨을 후려치듯 가혹했다.
알고 보니 허준혁에게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서지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대체 뭐였을까? 서지안, 너 정말 어리석고 한심해. 지난 5년은 그저 한바탕 꿈이었을 뿐이야. 이제 꿈에서 깼으니 정신 차릴 때도 됐지.'
서지안은 대기실로 돌아와 웨딩드레스를 벗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결혼식 파토의 후폭풍은 거셌다. 서지안이 로펌으로 돌아오자,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원래 체면 같은 건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법학과 천재로 불리던 허준혁을 먼저 따라다니며 고백했고, 그때 이미 학교 전체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럼에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제야, 뼈아픈 상처를 입고 나서야 허준혁이 자신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지안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에서 사직서를 인쇄하고 서명한 뒤, 허준혁의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사직서를 내려놓자마자 휴대폰이 진동했다.
허준혁의 전화였다.
"결혼식 취소했다며? 왜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해? 이게 로펌에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
"그럼 취소하지 말았어야 해? 그 많은 하객들을 호텔에 앉혀 두고, 네가 영웅 놀이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게 할까?"
허준혁은 몇 초간 침묵했다. 서지안이 이렇게 정면으로 맞설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두 사람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부터, 서지안은 작은 태양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며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늘 활기가 넘쳤고, 얼굴에는 언제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화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잘못이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허준혁은 언제나처럼 이성적이고 차분했다.
서지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겁도 없는 철부지였지. 타고나길 감정에 무딘 사람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사직서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허준혁, 내 사직서…"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아, 허리가 너무 아파. 빨리 와서 주물러 줘."
"나 지금 바쁘니까, 이만 끊는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휴대폰 너머로 차가운 통화 종료음만이 길게 울렸다.
회차 2
서지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억지로 삼키고 사무실 통창 밖을 내다봤다.
화창한 날씨 아래,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경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득, 경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서한 법률사무소가 처음에는 작은 사무실 하나로 시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의 명의로 된 유일한 집을 팔아 허준혁이 사무실을 임대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날이었다.
이제는 이 건물 한 층 전체가 허준혁의 것이 되었다.
사무실을 계약하던 날도 오늘처럼 맑은 날씨였다.
"우리 사무소 이름, 서한으로 할까?"
"뭐든 상관없어. 네가 정해." 허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서지안이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품에 안기자, 그는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몸을 떼어냈다. "난 누가 안는 거 싫어."
그래도 서지안은 해맑게 웃으며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난 안을래."
그녀는 한때 호기롭게 말했다. 반드시 그를 경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허준혁은 대수롭지 않게 상관없다고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그녀의 행복이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지키지 않았다.
얼마 후, 서지안은 사무실에 쌓인 짐을 정리하느라 반나절이 지나도록 손을 놓지 못했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늘 허준혁의 뒤에서 방향을 잡고 문제가 생기면 조용히 수습해 왔다.
회사는 그의 이름으로 운영됐지만, 동시에 그녀의 피와 땀이 스며든 곳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서지안이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이미 들은 눈치였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허준혁은 그들의 사장이었고,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지안이 모든 짐을 정리한 뒤 이삿짐센터에 연락하려던 순간, 휴대폰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허준혁의 어머니가 건 전화였다.
서지안은 입술을 꼭 깨물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지안 씨 맞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가정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 씨가 전화를 안 받아요. 부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세요?"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서지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허준혁의 어머니 왕미정은 병상에 앉아 가정부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병실에 들어오는 것을 본 왕미정의 창백한 얼굴에 초조함과 분노가 번지더니 바로 그녀를 꾸짖었다. "서지안, 너 준혁이랑 어떻게 된 거야? 결혼 같은 큰일을 두고 이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어? 결혼식 당일에 취소라니, 이 소문 퍼지면 얼마나 창피한지 알기나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지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래도 왕미정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일 기력이 있는 걸 보니 당장 큰일은 아닌 듯했다. 아마 결혼식 취소 소식을 듣고 화가 치밀어 지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어머님, 일단 진정하세요."
"내가 어떻게 진정하니?" 왕미정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준혁이 원래 고집 센 거 알잖아. 너라도 말렸어야지. 어떻게 걔가 저러는 걸 그냥 둬?"
서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차분히 설명했다. "저희가 결혼식 올릴 때, 진유나 씨가 투신했어요."
"뭐라고?" 왕미정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유나 괜찮니?"
"네, 괜찮아요. 준혁이가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왕미정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큰일 안 나서 다행이네."
사정을 듣고 나서야 안심한 왕미정은, 허준혁에게 폐가 가지 않도록 결혼식 취소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라고 서지안에게 당부했다.
반나절 내내 속을 태운 탓인지 기력이 떨어진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
"서지안 씨, 죄송해요. 제가 부인님 곁에 있을게요. 바쁘신 일 보세요." 가정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서지안은 병상에 누워 잠든 왕미정을 잠시 바라봤다. "앞으로 어머님 일로는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저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정부가 급히 말을 이었다."서지안 씨, 화 푸세요. 아까 부인님께서 하신 말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부인님 원래 성격이 그러세요. 진유나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거의 직접 키우다시피 하셨잖아요. 그래서 더 편을 드시는 거예요. 그래도 부인님, 서지안 씨도 정말 좋아하세요…"
서지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가정부 눈에도 보일 정도구나. 어머님이 누구를 더 아끼는지.'
"어머님께 화난 거 아니에요. 저, 허준혁이랑 헤어졌어요. 이제 그 사람 일은 저랑 상관없어요. 어머님 일은 직접 허준혁한테 연락하세요."
말을 마친 서지안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뒤에서 가정부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허준혁과 진유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지안은 허준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몇 번을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 저 얼굴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빠져들 수 있었을까?'
"왜 결혼식 취소에 대한 여론을 빨리 처리하지 않아? 전화가 다 나한테까지 오고 있어." 허준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지안의 가슴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허준혁은 정말 나를 좋아한 적은 없구나.' 그는 결국 자신의 뒤를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서지안은 바보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모든 행동을 자신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믿어 왔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 기억들만큼은, 서지안에게 여전히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서지안은 끝까지 이 사랑을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내야 했다.
"지안 언니, 오늘 정말 미안해요. 언니랑 준혁이 결혼식 망쳐서… 제가 사과할게요." 진유나는 조금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며 허준혁의 팔짱을 꼈다. 이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준혁아, 나 사과했으니까 이제 화 풀 거지…?"
"응." 허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서지안을 흘끗 바라봤다.
서지안은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진유나는 이런 얄팍한 수법을 늘 써왔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맞서 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서지안은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회사에 아직 정리할 짐이 남아서, 먼저 갈게."
허준혁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지안이 뒤를 돌아보자 허준혁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할 말이…"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유나가 갑자기 휘청이며 허준혁의 품으로 쓰러졌다.
허준혁은 재빨리 그녀를 끌어안고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 괜찮아?"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수혈받은 지 오래돼서 그런가 봐…"
'수혈'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서지안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진유나는 선천성 조혈 장애를 앓고 있어 일정 주기마다 수혈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RH-혈액형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서지안 역시 같은 혈액형이었다.
어릴 적, 처음으로 수혈을 해주겠다고 나섰을 때만 해도 진유나가 허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이후에도 허준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여러 번 수혈을 해줬다.
그때의 그녀는 참 어리석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끼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아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몇 번이나 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허준혁은 무의식적으로 서지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안아, 준비해. 이따 유나한테 수혈해야 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준혁이 자신과 함께한 이유가 단순히 곁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어쩌면 진유나를 위해 언제든 불러 쓸 수 있는 '이동식 혈액팩'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싫어!"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허준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유나 상태 특이한 거 알잖아. 지금 당장 수혈 안 하면 죽어."
"그럼 그냥 죽게 놔둬."
회차 3
그 말에 허준혁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서지안의 입에서 그런 단호한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말이라면 늘 따랐고, 단 한 번도 반박한 적이 없었다.
허준혁은 그녀가 주사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온 몸을 떨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되곤 했다.
그런 그녀가 그를 위해 진유나에게 수혈을 해왔다.
잠시 망설이던 허준혁이 서지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안 언니…" 허준혁이 말을 잇기도 전에, 옆에 있던 진유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끼어들었다. "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예요?"
서지안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진유나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악독하고 편협한 데다 연기까지 능숙했다. 매번 허준혁을 속여 넘겼다. 어쩌면 그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지안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수혈이 필요하면 딴 사람 찾아. 앞으로 나는 너한테 수혈 안 해줄 거니까."
진유나는 허준혁의 팔에 매달린 채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혁아, 지안 언니를 좀 봐. 나보고 죽으라잖아. 내가 엄마랑 같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 속이 시원하냐고?"
진유나의 어머니 진정숙은 5년 전 허준혁을 구하려다 중환자실에 누운 뒤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그 일 이후로 허준혁은 진유나에게 늘 죄책감을 안고 있었고, 그래서 더 감싸고 돌았다.
진유나는 그 점을 알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머니를 꺼내 들었다. 허준혁은 그때마다 아무 말 없이 받아주며 다시 그녀 편에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진유나가 엄마를 언급하자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5년 전, 통제력을 잃은 트럭이 달려오던 순간 진정숙이 그를 밀쳐내고 대신 쓰러지던 장면을 그는 잊지 못했다.
하지만 서지안은…
허준혁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지안의 마음속에 작은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가 자신의 편에 서 준다면 지난 몇 년이 전부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고 스스로를 달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안아, 유나한테 한 번만 더 수혈해 주면 안 될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할게." 허준혁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어두운 눈동자에 서지안의 얼굴이 비쳤다.
서지안의 마음에 스며들던 기대는 금세 식어버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정말 바보야. 아직도 그에게 기대를 하다니. 그는 늘 같은 선택을 했고, 나는 언제나 이익의 저울질에서 버려지는 쪽이었지.'
진유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서지안을 돌아보며 눈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안 언니, 이번에도 언니가 저한테 수혈해 줘야겠네요. 정말 고마워요."
서지안은 그녀를 흘깃 쳐다봤다. '그는 진유나한테 정말 잘해주는구나…'
예전의 그녀라면 괜한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허준혁이 조금씩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언젠가는 자신을 돌아봐 줄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늘 그래왔듯 차갑고 무심한 태도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람은 평생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서지안은 시선을 거두고 허준혁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그 여자한테 수혈 안 한다고."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눈빛이 낯설 만큼 차가워 마음이 불편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여름 햇살이 쏟아지던 날, 그녀의 웃음은 햇빛보다 눈부셨다. '언제부터 지안이는 웃지 않게 된 걸까?'
"어떡해? 지안 언니가 수혈 안 해주면 나 죽는단 말이야." 진유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허준혁을 바라봤다. "준혁아, 네가 우리 엄마한테 나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 알아볼 테니까 걱정 마."
진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허준혁을 쳐다봤다. "만약 못 찾으면 어떡해? 지안 언니가 몇 번이나 해줘서 혈액형도 맞고 거부반응도 없는 거 알잖아. 왜 굳이 사람을 바꾸려는 거야?"
허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유나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좋아. 네가 안 도와주면 그럼 내가 직접 미정 이모 찾아갈 거야!"
그녀는 말을 마치자 울면서 병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왕미정이 진유나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막 잠에서 깬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녀가 진유나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지안을 스쳐 지나가는 눈빛에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준혁아, 유나 좀 그만 괴롭혀라. 유나 엄마가 너 구하려다 식물인간이 된 거잖아. 지금 지안이가 피 좀 수혈해 주는 것뿐이야. 큰일도 아니고. 그동안도 몇 번이나 했잖아, 별일 없었어. 근데 유나는 지금 당장 수혈 못 받으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허준혁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지금 당장 다른 사람 알아보겠다고 했잖아요. 혈액 창고에도 피가 있어요. 꼭 지안이 피를 써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이모님, 보세요. 준혁이는 지안 언니만 챙기고 저는 하나도 안 챙겨줘요!" 진유나는 서지안까지 끌어들였다.
왕미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허준혁은 아무 표정도 없이 날 선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이 한 번 마음먹으면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서지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안아, 우리 유나한테 수혈 좀 해주면 안 되겠니? 내가 부탁할게, 응?"
서지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진유나가 떼를 쓸 때마다 물러난 건 늘 서지안이었다. 미래의 시어머니가 될 왕미정 역시, 매번 같은 선택을 했다.
'하긴, 애초에 먼저 매달린 건 늘 나였지.'
그녀는 왕미정을 처음 만났던 5년 전 겨울 방학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어느 날 밤, 학교에 너무 늦게 돌아온 그녀는 술에 취한 남자에게 끌려가 골목길에 갇혔다. 위급한 순간,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그녀를 구해줬다. 상대방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남자가 칼에 찔리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퇴원 후, 그녀는 허준혁의 몸에서 그날의 상처를 발견했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서지안은,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그라는 사실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더욱 쫓아다녔다.
서지안은 법학과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이었지만, 체면도 잊은 채 그를 쫓아다녔다.
그 후 긴 겨울방학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 몰래 기차표를 끊어 그를 찾아갔다.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 자라 형편도 넉넉했던 그녀는 고생 한 번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허준혁을 찾아갔을 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눌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놈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산에 늑대가 있다잖아. 손 할머니가 물린 거 못 봤어? 지금 올라가면 죽으러 가는 거야!"
"네 엄마도 아마 산에서 늑대를 만난 것 같아. 이미 신고는 해 놨어. 경찰 오면 같이 올라가자. 괜히 혼자 뛰어들지 마."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허준혁은 바닥에 짓눌려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옷에는 풀잎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는 말없이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지만, 눈빛은 마치 미쳐 날뛰는 야수 같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서지안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허준혁을 붙잡고 있던 두 남자를 밀쳐냈다.
"어디서 나타난 계집애야? 왜 와서 난리야? 우리가 다 걔 좋으라고 말리는 거잖아! 곧 해 지는데 지금 산에 올라가면 늑대 밥 되는 수밖에 더 있겠어?"
허준혁은 바닥에 앉아 손을 꼭 움켜쥐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해 지기 전에 다 같이 산에 올라가 찾아보면 되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는 것보다 낫잖아요!"
그 말에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늑대를 마주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막지도 마세요!" 서지안은 허준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자. 내가 어머님 찾는 거 도와줄게."
허준혁은 바닥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봤다.
"빨리 가자!" 그녀는 그의 손을 끌고 산으로 향했다.
그때, 하늘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준혁아, 걱정 마. 내가 꼭 어머님 찾을게." 서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어두운 산길을 바라봤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요동쳤지만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머님을 찾고 나면 우리 같이 격투기랑 태권도 배우자. 그러면 다음엔 누구도 네가 하려는 거 못 막게 하자."
조금 전 마을 사람들에게 눌려 있던 허준혁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고, 그 장면은 서지안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늘 오만하고 뛰어나기만 하던 허준혁에게도 무력하고 절망적인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빛을 발하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존재여야 했다.
다행히 상황은 최악으로 흐르지 않았다. 해가 거의 질 무렵, 두 사람은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기 직전이던 왕미정을 가까스로 발견했다.
그녀는 늑대를 만난 게 아니라, 넘어지며 나뭇가지에 종아리를 찔려 피를 많이 흘린 것이었다.
허준혁은 곧바로 그녀를 업고 산을 내려왔다.
그때 왕미정이 고마움을 전하며, 허준혁에게 서지안 같은 아이는 절대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제 왕미정은 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수혈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