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깊은 밤중, 한풍이 몰아 치는 절벽.

이화린은 맨발로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며 정신 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 바닥에서는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왔고 마치 시뻘겋게 달아 오른 불 판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멈출 수 없었다.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 들었다.

날카로운 화살 촉이 이화린의 가녀린 어깨에 적중했고 강력한 힘이 실린 화살은 그녀의 몸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간신히 버티던 몸은 결국 무너져 내렸고 그녀는 선혈을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그녀를 쫓던 놈들이 어둠을 가르고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화린은 극심한 통증에 경련까지 일어나는 오는 아랫배를 부여 잡은 채, 새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살기 어린 눈빛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조원, 난 이미 이혼서를 남겼다. 이제 연왕부와는 남남인데,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는 거냐?"

조원은 말에서 내리더니 상처투성이인 여자를 내려다보며 경멸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혼서 한 장이면 경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이화린, 언제부터 그리 순진해진 거냐? 네가 가진 증거를 내놓거라, 그러면 본 세자가 시신이라도 온전히 남겨줄 터이니."

이화린은 처절한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너희 연왕부는 북만과 결탁하여 소금과 철을 몰래 팔아 폭리를 취했지. 그런데 너희 부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되려 적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우리 이씨 가문에게 덮어씌웠어. 그리고 이제는 내 손에 있는 증거가 두려워 내 심복을 죽였고 나를 구금했으며 심지어 내 뱃속의 아이까지 죽이려 들다니. 조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이 아이는 너의 핏줄이란 말이다."

조원은 사악하게 웃었다. "본 세자를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여인은 널리고 널렸다. 본 세자가 네 뱃속에 있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에게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이화린,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증거를, 내놓거라!"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조원을 보며 이화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도 웃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 염치도 모르는 회양 현주 김우비를 말하는 것이냐?

그래, 그 년이 너를 따르긴 했었지. 그게 아니라면 어찌 너와 사통하여 아이를 가졌겠느냐?"

조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게냐?"

"당연히 알고 있었지. 나는 너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매 순간이 역겨웠다. 조원, 너는 재능도, 덕도 없는 자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것이 너의 본성이고, 나약하고 무능한 것이 너의 밑바탕이지. 이생에 너와 부부가 된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치욕이다."

조원의 안색이 시퍼래지더니 그녀의 아랫배를 짓밟으려 다리를 높게 들어 올렸다.

그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린 언니, 왜 그리 화를 내십니까? 언니는 원 오라버니와 오랜 세월 부부의 정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옛정을 봐서라도 연왕부에 불리한 증거를 가지고 경성에 가서 고발해서는 아니 되지요."

조원의 뒤에서 나타난 김우비를 본 이화린의 눈에 비친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조원, 너는 이 천한 계집과 이 정도로 죽고 못사는 사이였던 게냐? 이런 상황에서도 곁에 두고 있다니."

조원의 품에 기대선 김우비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와 원 오라버니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함께해야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언니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현재, 언니네 가문은 이미 패가망신했습니다. 그러니 경성에 돌아간들, 가족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겁니다. 이미 죽은 가족들을 위한답시고 원 오라버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아내 된 도리가 아니지요."

말을 마친 김우비는 보란 듯이 제법 불룩 솟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화린을 향해 악독한 눈빛을 보냈다.

이화린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패가망신이라니? 김우비,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관부의 공지에 우리 이씨 가문의 사건은 보름 뒤에 처형할 거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공지가 거짓일 리 없지 않느냐!"

조원은 남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공지가 거짓일 리 없지. 하지만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타인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았더냐? 그 탓에 경성에는 그들이 단 하루라도 숨이 붙어 있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아."

이화린은 조원의 말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네 말은... 경성에 북만과 결탁한 사람이 연왕부 말고도 더 있다는 거냐?"

조원은 피식 웃었다. "역시 총명하군. 이씨 가문의 최근 백년 간, 가장 뛰어난 적장녀답구나. 하지만 이화린, 네 가족은 이미 모두 죽었다.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증거를 내놓거라. 혹시 아느냐? 본 세자가 기분이 좋아져서 네 목숨을 살려줄지?"

이화린은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전해져 오는 아랫배를 움켜잡은 채, 몸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내려다 보았다. 결국 그녀는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고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다.

모두 그녀의 잘못이다. 전부 그녀의 잘못이다.

그녀가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연왕부와 북만이 결탁한 일에 대해 조사하라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문에 이런 멸문지화가 닥치지 않았을 것이다.

적과 내통한 죄는 구족을 멸하는 중죄다.

슬픔에 잠긴 그녀를 본 김우비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화린 언니, 군자는 굽힐 때는 굽혀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언니네 가문은 고상한 척하다가 멸문을 당한 거니 굳이 다른 사람을 탓하진 마십시오."

"닥쳐라!"

이화린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뻔뻔한 여자를 노려봤다. "참으로 가소롭구나. 명분도 없는 더러운 년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빳빳이 드는 거냐?"

김우비의 안색이 싹 변하더니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이화린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조원을 노려봤다.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 붙이는 이유는 내 손에 있는 증거가 두려운 거겠지!

조원! 나는 절대 증거를 너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너는 지금부터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게 될 것이야!"

말을 마친 이화린은 아랫배를 움켜잡고 극심한 고통을 참아 내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결연한 뒷모습만을 남긴 채 마치 날개가 꺾인 나비마냥 빠르게 추락했다.

살을 에이는 칼 바람이 추락하는 그녀에게 불어 닥쳤고 능지처참보다 더한 고통이 뒤따랐다.

이화린은 비통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고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강직한 아버지, 온화한 어머니, 용맹한 오라버니, 그리고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동생까지…

이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전부 몰살당하고 말았다.

만약,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는 이씨 가문을 해친 모든 사람들을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피의 빚은 피로 갚아야 하는 법!

회차 2

이화린은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머리에서 전해지는 마치 불로 달군 쇠로 지지는 듯한 극심한 작열감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 이 독한 년 어떻게 또 깨어 난 거지? 아까 분명히 숨이 끊어졌었잖아? 너희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당장 이 년 숨통을 끊어!"

귀에 거슬리는 명령과 함께 밧줄이 그녀의 목을 조였다.

순식간에 이화린은 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숨이 막혀왔다.

강렬한 질식감에 몸부림치며 손을 휘적이던 그녀는 머리에 꽂은 비녀가 손에 잡혔고, 본능적으로 비녀를 뽑아 뒤에 있는 사람의 몸을 향해 힘껏 찔렀다.

"악!"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 비명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화린은 목을 조여오는 힘이 약해진 것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과 거리를 벌린 후, 동시에 눈을 크게 뜨고 방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똑똑히 확인했다.

눈앞에는 세네 명이 서 있었고 하나같이 통나무 같은 허리에 팔뚝이 굵었다. 그 중 한 하녀는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쥔 채 악독한 눈빛으로 이화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화린은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눈앞의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눈이 내리는 밤에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니 살아날 가능성은 존재 하지 않았다.

'난 이미 죽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통증은 뭐지? 왜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그때, 머릿 속에 그녀의 것이 아닌 낯선 기억들이 잔뜩 밀려 왔다.

공친후부, 상인 가문, 혼인, 학대, 간통, 처형…….

그녀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잡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펑펑 흘러 내렸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녀가 환생한 것이다!

자신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 그녀의 혼이 경성 공친후부 둘째 부인의 몸에 들어 온 것이다.

이화린, 둘째 부인의 이름도 이화린이었다.

다만, 이 이화린은 재상 이씨 가문의 이화린이 아니라 상인 가문의 이화린이었다.

상인 가문의 이화린은 마음이 착하고 여린 데다 가문이 부유하고 얼굴이 아름다워 권세가인 공친후부의 눈에 들었다. 후부는 삼서육례(三媒六娉)를 모두 갖춰 대방(大房,가문 적장자의 식구들을 이르는 말.) 둘째 아들의 정부인으로서 그녀를 들였다.

그녀는 위세 높은 가문으로 시집을 왔으니 좋은 낭군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호랑이 굴일 줄은 몰랐다.

시어머니는 교활하고 탐욕스러웠고, 낭군은 정이 없고 무심했다. 후부의 그 누구도 그녀를 사람 취급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시어머니라는 작자는 그녀의 혼수를 차지하기 위해 독한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녀에게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결국 이화린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벽에 머리를 박았다.

하늘이 그녀를 가엽게 여겼던 걸까? 상인 가문의 이화린이 죽은 그 시점, 재상 가문의 이화린의 혼이 그녀의 몸에 깃든 것이다.

현재, 그녀의 얼굴에 하염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은 전부 상인 가문의 이화린이 죽기 전에 느꼈던 고통과 억울함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죽기 전에 외쳤던 한 맺힌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 쳤다.

"복수할 거야! 반드시 복수할 거야!"

백어멈은 상처를 입은 이어멈을 부축하며 사악한 눈빛으로 이화린을 노려봤다. "이 망할 년이, 곱게 보내주려 했더니 감히 반항을 해? 곱게 죽긴 싫다는 거지? 그럼 원하는 대로 해주마!"

말을 마친 백어멈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를 집어 들고 이화린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바로 그때, 바닥에 엎드려 있던 이화린이 벌떡 일어더니 순식간에 백어멈을 향해 달려들며 손에 쥔 비녀를 백어멈의 목에 겨눴다.

"꼼짝 마! 누구든 움직이면, 이 년의 목을 그어버리겠어!"

백어멈과 하녀들은 이화린의 몸에서 순식간에 터져 나온 힘과 속도에 놀란 나머지 그대로 얼어 붙고 말았다.

특히 백어멈은 자신을 목을 겨누고 있는 비녀가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알아 차리고는 다급한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이화린을 향해 소리쳤다. "이 미친 년이! 감히 나를 협박해!?"

이화린은 온몸에 퍼지는 통증을 참으며 감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품에 잡혀있는 백어멈을 향해 소리쳤다. "못할 것도 없지. 하인인 주제에 주인인 나를 해하려 들다니! 관아에 고하기만 하면 너희들은 전부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 유배를 가야 할 것이다."

백어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작은마님 건망증도 심하시네. 외간 남자랑 놀아나다 후부인께 들킨 건 잊으셨나? 관아에 가면 간통죄로 형을 당할 텐데, 감당되시겠어?"

"못할 것도 없지."

이화린은 비녀를 백어멈의 목에 더욱 깊숙이 찔러 넣었고 늙은이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으며 차갑게 말했다.

"후부인을 불러 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 이 늙은 것, 나와 함께 지옥 구경이나 하자꾸나."

회차 3

백어멈의 목덜미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백어멈은 두려움에 잔뜩 질린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이화린을 쳐다 보았다.

"이 년이… 아, 아니, 둘째 부인! 이 늙은이가 후부인님을 모셔오기 싫은 게 아니라, 오늘 후부에 귀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주인님들께서 모두 앞마당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둘째 부인께서 이 늙은이를 놓아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후부인님 앞에 가서 둘째 부인님의 좋은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떠신지요?"

이화린 얼굴의 비웃음이 더욱 짙게 번졌다. "놓아 달라고? 다시 날 죽이겠다고 덤비도록 말이냐? 후부에 귀한 손님들이 왔단 말이지? 아주 잘됐구나. 내 이 일을 크게 키워 경성의 귀인들이 모두 공친후부의 역겨운 속내를 전부 보게 만들 것이다."

후부 앞마당 화청에서는 손님들과 주인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친후부는 역사가 긴 오래된 고관대작 가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공친후부는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돈에 눈이 멀어 상인의 딸을 후부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어멈 그 늙은 여편네는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게야?"

후부의 부인 조씨는 오늘따라 더욱 화려하게 단장했다. 금실로 수를 놓은 금빛 찬란한 예복을 입고 하늘거리며 걷는 그녀는 청춘을 잃은 지 오래 되었지만 결혼한 여자다운 성숙한 매력을 풍겨냈다.

"부인님, 안심하십시오. 백어멈은 평소에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소한 일은 필시 문제 없이 처리할 겁니다. 걱정하지 미시지요. 지금은 큰 도련님의 승진 연회를 잘 치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난어멈의 말에 기분이 한껏 좋아져 자지러지게 웃는 조씨의 눈가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때, 화청에서 놀란 비명이 들려왔다.

"어머나! 후부 뒷마당 쪽에서 불이 난 것 같습니다!"

갑자기 들려 온 비명 소리에 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이 모두 화청에서 나와 불이 난 곳을 쳐다봤다.

조씨와 공친후 송중서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길이 점점 세게 번지기 시작하는 걸 본 송중서는 연회를 계속 열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하인들에게 어서 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난어멈의 부축을 받은 조씨는 불이 난 방향을 쳐다보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저기는… 그 천한 것의 처소 아니더냐? 얼른 가보자!"

불이 난 곳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하객들도 있는 반면 겁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는 하객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 젊은 남자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상석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불이 난 곳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와는 달리 눈빛은 더욱 차갑게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아주 적절한 때에 불이 났군. 진풍아,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자꾸나."

진풍이라 불린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도독(都督)님, 폐하께서 이미 이씨 가문이 적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확정지으셨기에 대세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 시점에 만약 도독께서 계속 이 사건을 조사한다는 사실을 폐하께서 알게 되신다면 필시 불쾌해하실 것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진풍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규칙대로만 일을 처리했더냐? 황상 백부님께서 물으시거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어서 가거라. 송씨 가문 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현재 우리에게 남은 단서는 이것뿐이다."

주인이 고집을 부리자 진풍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후부의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남자는 손에 든 찻잔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마음 깊숙이 묻어 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빨간 그림자...

과거, 목숨을 구원 받았던 그 은혜는 이제 값을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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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돌아온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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