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대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 졌다.
조금 전까지 조롱 섞인 눈빛을 숨기지 않던 부인들조차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부군의 집에 불을 지르는 건, 그녀들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행동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이해 하려고 애썼다.이번 인친의 상대가 성당의 반역죄를 지은 소씨 집안의 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날뛴단 말인가?
"만만치 않은 계집이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무인 가문에서 자라 예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곳곳에 자랑하고 있구나."
평온한 눈빛으로 부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노부인의 두 눈이 불현듯 날카롭게 빛나더니 대부인 유씨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비록 민이 지금 집에 없지만, 부엌에 닭이 한 마리 남았다지? 성당국 공주에게 닭을 품에 안고 대문을 넘도록 전하거라."
대부인은 자리에서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민이와 혼례를 올릴 성닥국 공주입니다. 이리 모욕을 주는 건..."
노부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제아무리 성당국 공주라고 한들, 우리 국공부의 사람이 되려면 우리 가문의 규정을 따라야지!"
다소 난감한 표정인 대부인 유씨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대청을 나섰다.
노부인의 말을 들은 하인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 라도 생긴것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마당으로 나온 대부인 유씨는 바로 이 어멈을 불러 자세히 당부했다. 이내 어멈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떠났고, 홀로 계단에 올라선 대부인의 얼굴에는 평온하면서도 후련한 표정이 자리했다.
북양국 귀비의 여동생인 그녀가 신분이 낮은 국공부 자제와 혼인하게 된 것은 신분을 낮춰 결혼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권세가 높고 지위를 무시할 수 없는 노부인은 적장손을 매우 중시하게 여겼고, 그녀는 어진 계모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 흉내 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동방민을 웃음거리로 만들 기회가 찾아온 만큼, 대부인 유씨는 이번 기회를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국공부 대문 앞.
거센 불길에 구멍이 두 개나 생긴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이 어멈이 하인을 거느리고 밖으로 나왔다.
"저택에 해야 할 일이 많아 하인들이 문을 여는 것을 잠시 지체했을 뿐인데, 성당국 공주가 국공부의 대문에 불을 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닙니까?" 짙은 청색의 옷을 입고 나타난 이 어멈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한껏 치켜 뜬 눈이 유난히 매섭게 보였다.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린 소미영은 바로 불쌍한 척 연기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언니가 횃불을 ..."
소미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예슬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 내고 말했다. "내 동생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 했고 고작 횃불 바닥에 떨어뜨려 일어난 사고일 뿐인데, 하인 주제 어찌 주인의 잘못을 캐묻고 있단 말이더냐? 북양국의 교양이 잘못된 것이냐, 아니면 국공부의 가르침이 덜한 것이냐?"
소예슬의 날카로운 반박에 이 어멈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소미영은 그녀의 등 뒤에서 얼굴을 내밀며 다급하게 외쳤다. "어멈 화내지 마세요. 언니가 일부러..."
소예슬은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오늘 안에 혼례를 치를 수나 있겠는가?빨리 길을 안내 하거라." 이 어멈은 소미영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만약 소미영이 대문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그녀가 직접 소예슬을 마중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망신을 당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문 소미영은 고개를 아래로 푹 떨궜다.
"미영아, 언니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소미영의 손을 꼭 잡은 소예슬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란히 국공부의 문을 넘었다.
소미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달래는 소예슬의 모습이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지만, 이상한 곳을 찾지 못해 고개만 갸웃했다.
죄인 가문의 신분으로 인친을 떠난 소예슬이었기에, 그녀를 북양국에 데려다준 사신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함께 국공부에 발을 들인 건 연이와 월이 소예슬의 두 몸종이었다.
소미영은 소예슬보다 낮은 신분인 이낭으로 딸려 온 것이었기에 몸종은 옥이 한 사람만 데려왔다.
다섯 사람이 국공부의 대문을 지나 중문을 지나자마자 선두에 선 이 어멈이 자리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차림새만 보아도 누가 공주인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기에 소예슬을 향해 말했다."민 도련님은 고귀하신 분이십니다, 지금쯤 화항에서 몸을 쉬이고 있을 겁니다..."
이 어멈이 하는 말을 들은 소미영의 눈언저리에 만족스러운 빛이 언뜻 스쳤다. 국공부의 도련님이 하루가 멀다하고 화항에 드나드는 것은 물론이고, 몸이 허약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어멈이 뒤를 따르는 하인에게 눈짓하자, 하인은 닭 한 마리를 소예슬의 손에 강제로 쥐여줬다.
"노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성당 공주께서 인친을 맺으러 왔으니 우리 국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하여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다 노부인의 부름이 들리신다면 이 닭을 가지고 함께 들어가 예식을 올리면 됩니다."
말을 마친 이 어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연이는 아가씨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닭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다. 국공부는 아가씨를 업신여겨 모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소예슬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이러한 모욕은 전생에 이미 모두 겪어 보았고, 이제 와 다시 겪는 게 대수롭지 않았다.
전생의 그녀는 반항하면 연약하기 그지없는 소미영이 국공부에서 괴롭힘을 받을까 두려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모든 일에 양보하고 참으며 지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바보처럼 참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품에 안은 닭을 가만히 내려다본 소예슬은 바로 그것을 월이에게 던져주었다. "죽여."
"네." 여태껏 곁에서 아무 기색도 하지 않은 월이가 닭의 두 날개를 움켜쥐고 구석으로 향했다.
소예슬은 연이를 돌아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북양까지 오는 내내 우리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었지?"
소예슬의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언뜻 거리는 것을 본 연이 몸을 흠칫 떨었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그녀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칠 것만 같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예슬이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소미영은 놀랐지만 한켠으로 안도했다. 가문 사람들이 처형당한 이후, 줄곧 죄인처럼 지냈던 소예슬이 이토록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고 움직일 줄 몰랐다.
소미영은 소예슬이 반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면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국공부 사람들은 소예슬을 미워하며 따돌릴 테니 말이다.
"성당 공주는 어서 안으로 들어와 예식을 올리거라."
곧바로 대청에서 누군가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소미영이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녀는 소예슬이 국공부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소미영의 속셈을 모조리 꿰뚫고 있는 소예슬은 치밀어 오르는 혐오를 억누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소예슬은 등을 곧게 세우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채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빨간 혼례복을 입은 그녀가 대청에 들어섰다.
대청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소예슬은 익숙한 얼굴들을 가볍게 훑어봤다.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모습으로 대청에 들어선 소예슬의 모습을 본 국공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혼례복이 그녀의 우아함에 강렬함 까지 보태 주었고 , 검푸른 머릿결과 새한얀 피부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특히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꿰꿇어 볼수 있을 것 같이 차갑고 깊었다.
인친이 정해졌을 때, 성당국에서는 소예슬의 초상화를 보내왔었다. 당시 국공부의 사람들은 성당국에서 소예슬의 미모를 미화한 것이라고 말들이 많았으나 막상 오늘 실물을 보니 초상화보다 더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미영도 아름답기는 하나, 그녀 같은 생기와 우아함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