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천하절색의 완벽한 미색을 자랑하는 강 왕비가 이대로 목숨을 다하는 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죽기 전에 아랫것들의 노리개가 되어보는 건 어떠합니까?"
"하하, 맞는 말일세.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쓰임새를 다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죽으면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내 말이 그 말이오. 강왕 전하께서 측비를 들이느라 여념이 없는데, 강 왕비의 생사에 관심이 있을 리 없지. 어쩌면 강 왕비가 한시라도 빨리 죽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네."
......
막 정신을 차린 담생이 눈을 번쩍 뜨자, 얼굴에 살이 뒤룩뒤룩 찐 사내 두 명이 음흉한 눈빛에 저속하기 짝이 없는 말을 입에 올리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틀어 올린 머리를 고정한 비녀를 빼든 그녀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튀어 오르더니, 비녀로 한 사내의 눈을 찌른 뒤 다시 목을 그었다.
"으악!"
눈과 목을 감싸 쥔 사내의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사람이 살기를 가득 뒤집어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 다른 한 사내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담생이 어찌 그를 도망치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단걸음에 사내의 목덜미를 잡고 돌려놓더니 비녀로 목을 그어버리는 것이다. 이후 손을 놓자, 사내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두 사내를 처단한 후, 비틀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자리에 선 담생은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환생 후의 기쁨은 찾아볼 수 없었고, 복잡한 심정과 동정심밖에 없었다.
몸의 주인은 장군부에 유일하게 남은 후손으로, 황제가 딱하게 여겨 강왕 우문익과 혼인하도록 교지를 내렸다. 허나 우문익은 어린 시절부터 태부의 여식 상려를 마음에 품었었다.
연모하는 이를 얻기 위해 우문익은 몸의 주인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 미치광이들을 수용하는 남산원에 가뒀다.
남산원에서 지내는 동안 몸의 주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교통을 겪었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 끝내 삭이지 못한 원통함 때문이었으나 담생이 그녀의 몸을 차지하면서 원통함도 함께 사라졌다.
담생은 전생에 세계 서열 1위의 암살자였으며, 독을 가장 잘 다뤘기 때문에 독희라 불렸다. 길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마저 그녀의 손을 거치고 나면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었으니.
의술과 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기 때문에, 그녀는 의술도 무척이나 뛰어났다.
살생에 이골이 난 그녀가 업계에서 은퇴하려 했으나, 그녀의 주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의 비밀을 누설할까 두려워 나머지 수하들과 함께 그녀를 암실로 유인해 폭탄을 터뜨렸고, 그녀는 암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시 눈을 떠보니 낯선 시대 여인의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은혜와 원수를 잘 구분할 줄 아는 담생은 남의 몸을 차지했으니 복수를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두 사내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면 강왕은 오늘 꿈에만 그리던 여인을 측비로 맞이한다. 그렇다면 강왕의 정비인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테지.
비녀에 묻은 피를 소매에 닦은 후, 다시 머리를 단단히 틀어 올린 담생은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다.
남산원은 도성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경비가 삼엄하지만, 담생은 굳이 그 길을 따라 내려올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경성과 백 리나 떨어졌기에, 걸어 간다면 우문익과 상려의 혼례식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녀는 마차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길가에 서서 팔을 들어 올렸다. 경성으로 향하는 마차를 빌려 탈 생각이었다.
"주인님, 옷차림이 남루한 여인이 길을 막고 서 있습니다."
마차를 몰던 명월이 담생을 발견하고 마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보고하자, 마차 안에서 나른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전해왔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명월은 앞을 바라보더니 난처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인이 길 중간에 서 있습니다..."
사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처음과같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대도."
"예, 알겠습니다."
주인의 명을 받은 명월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담생을 향해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그 모습을 본 담생의 눈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마차는 이미 그녀를 깔고 지나갔을 것이다.
보자 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이는 건가? 이번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다!
다시 머리에 꽂은 비녀를 뽑아 든 담생이 단숨에 창문을 통해 마차 안으로 올라가더니 날카로운 비녀 끝을 사내의 목에 댄 채 낮은 목소리로 겁박했다.
"소리 내지 말거라. 그렇지 않으면 황천길로 가는 길을 보여줄 것이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마차를 몰고 있는 명월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목숨 줄이 잡힌 사내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담생이 손에 쥐고 있는 날카로운 비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낭자, 경성으로 가는 마차를 얻어 타고 싶은 거라면 그냥 타게나. 이리 포악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되네. 내 그리 냉정한 사람은 아닐세."
말을 마친 그가 입 꼬리를 끌어 올리며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담생에게 자신의 호의를 표현하려는 듯했다.
흠, 역시 사내의 말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군.
특히나 잘난 이목구비에 당장이라도 그림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생긴 사내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녀가 마차를 세우기 위해 팔이 빠질 정도로 세게 흔들었을 땐, 거들떠보지 않을 뿐더러 당장이라도 들이받을 것처럼 하더니, 인제와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니 더 용서할 수 없다.
담생이 손에 움켜쥔 비녀에 더욱 힘을 싣자, 비녀는 당장이라도 사내의 목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얌전히 있거라."
사내의 입이 다시 조가비처럼 다물어지더니 옆에 놓여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비녀를 손에 놓지 않은 담생은 사내가 밖에 있는 마부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끝내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마차는 역시 빨랐다.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아 경성에 도착했으니.
몸에 은자나 쓸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담생은 사내의 화려한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어색하게 코를 쓸어 내리며 입을 열었다. "수중에 은자 좀 있으면 며칠만 쓰고 갚겠소."
마차를 강탈한 것도 모자라 재물까지 탐하다니. 담생은 자신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허리춤에 매단 염낭을 담생에게 건넸다.
염낭을 받아 든 담생은 사내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고맙소. 내가 빌린 은자는 강왕부에 가서 강 왕비가 빌려 갔다고 말하면 돌려받을 수 있을 거요."
'강 왕비'라는 말에 사내는 곧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필경 이렇게 오랫동안 대막에서만 지내고 경성에 돌아온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니.
사내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담생은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마차를 태워주고, 은자를 빌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충고하자면, 몸에 남아 있는 고독(蛊毒)을 빨리 제거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한 해 정도 남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에 잡아 먹혀 미치광이 살인 본능만 남은 마귀가 될 겁니다."
순간, 사내의 태연하기만 했던 얼굴에 균열이 생기며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자리했다.
그가 고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떻게 확신한 걸까? 설마 강 왕비에게 다른 사람이 모르는 능력이 존재하는 걸까?
손가락으로 책을 가볍게 두드리며, 빠르게 멀어지는 담생의 뒷모습을 쫓는 사내의 눈언저리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가림막이 걷히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명월은 담생을 발견하고 놀란 나머지 고삐를 잡아 마차를 세우고 말을 더듬었다.
"언, 언제부터 올라와 있었습니까?"
담생은 그런 명월을 향해 싱긋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쥔 염낭을 흔들어 보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염낭이 눈에 익은 것을 발견한 명월이 서둘러 주인께 아뢰었다. "주인님, 저 여인이 주인님의 염낭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명월이 손에 채찍을 쥐자, 마차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말고, 강왕부 맞은편에 있는 술집에 가야겠다. 오늘 좋은 볼거리가 있다는구나."
재미난 볼거리라면 마다하지 않는 명월은 즉시 길을 바꿔 사해술집으로 향했다. 3층 창가에 있는 방을 선택한 두 사람은 강왕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염낭을 챙기고 제일 먼저 객잔으로 향한 명월은 목욕을 하고 배불리 먹은 뒤, 새 옷을 사러 갔다. 붉은색을 강조한 치마와 저고리는 그녀의 몸에 짜맞춘 듯 꼭 어울렸고 온몸에서 우아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점포 주인장과 점소이는 완전히 넋을 잃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경국지색에 화용월태가 이 여인을 놓고 하는 말이로구나!
담생은 객잔 바로 옆에 있는 약 점포에 가서 몇 가지 물건을 더 샀다.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강왕부에 도착한 그녀는 떠들썩한 광경에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회차 2
고작 첩을 들이는 것뿐인데, 규모는 정비를 들일 때보다 더 웅장했다. 십리홍장은 물론이고,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할 것 같았으며 붉은 비단이 곳곳에 휘날리고 있었다. 강왕부를 찾은 손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식장 밖에 모여들었고, 그 안에는 우문익이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난 외양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고, 얼굴 가득 기쁨으로 차있었다.
다시 신부인 상려를 돌아보자, 가녀린 몸매에 시야를 흐리는 면사포를 쓰고 있었지만 그 뒤에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붉은 비단의 끝을 서로 잡고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짝이며,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우문익과 상려의 혼례식이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 왕부 대문을 등진 두 사람의 앞에는 혼례의 주례사인 사의가 서 있었다.
"동방화촉을 밝힙니다."
사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담생이 대례상 앞으로 곧장 다가갔다.
"멈추어라."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에게 쏠렸고, 신부가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여인은 누구인가? 미모에 꽃이 고개를 숙일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 천하절색의 미인이로군."
"낯이 익은 것 같지 않소? 생각났네. 강 왕비 아니요?"
"강 왕비? 강 왕비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남산풍인원에 갇혔다 하지 않았소?"
"그녀의 두 눈이 맑은데, 어디가 미친 것이라는 거요."
......
담생을 발견한 우문익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하더니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 여자가 어떻게 남산풍인원에서 도망쳤지?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한 그가 담생의 앞에 멈춰 서더니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이지?"
담생은 그런 우문익을 향해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늘은 왕야께서 측비를 들이는 경사스러운 날인데, 제가 정비가 되어 당연히 축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대례상 중간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상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태부의 여식이자 경성 제일 재녀라 불리는 상려는 고결한 외모에 우아한 품위를 자아냈지만, 실은 마음이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몸의 주인을 남산풍인원에 보내게 한 것도 그녀의 계책이었다.
담생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입을 열었다.
"측비, 어서 본 왕비에게 차를 올리게나."
첩실의 신분으로 가문에 들어올 때, 정실에게 무릎을 꿇고 차를 올리는 것은 예의이기 때문에, 담생의 요구는 전혀 과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려는 이미 우문익과의 혼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첩으로 자처했다. 정비가 되고도 남았을 그녀의 신분으로 담생에게 무릎을 꿇고 차를 올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머리에 쓴 면사포를 벗어던진 상려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담생을 흘겨봤다.
"비록 측비는 맞지만 첩실은 아니니, 차를 올려야 한다면 황후마마에게 올려야겠죠."
측비는 맞으나 첩실이 아니라고?
상려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 있을까?
그녀와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담생은 바로 우문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야도 측비는 첩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산처럼 우뚝 솟은 이 나라 윤리와 법률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혼례 전, 우문익은 상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입바른 말을 많이 해댔다. 상려는 측비가 되었지만 첩실이 아니라 그의 유일한 아내와도 같다는 말을 말이다.
이러한 말은 두 사람이 있을 때에만 해야 하는 말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선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내일 아침 일찍 어사대에 그를 규탄하는 상소문이 오를 것이다.
우문익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쌀쌀맞게 변했다. 만약 담생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혼례식은 일찍이 끝났을 것이다. 지금 당장 담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눈빛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차는 나중에도 올려도 괜찮으니, 지금 올릴 필요 없다."
예전처럼 그의 말에 납작 엎드려 복종할 줄 알았던 담생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묻는 것이다.
"정실에게 차를 올려야 정식으로 가문의 며느리가 되는 법 아닙니까? 설마 왕야께서는 측비를 다시 태부부로 돌려보내고 싶으신 겁니까?"
측비를 다시 태부부로 돌려보낼 생각이라니?
정말이지 미친 여자가 틀림없다. 그의 정인을 난처하게 하더니, 이제는 이런 말까지 함부로 입에 올리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남산풍인원에 보내자마자 죽였어야 했는데.
우문익의 두 눈에 서슬 퍼런빛이 스쳐 지나갔다.
"왕비, 어찌 병이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남산풍인원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는가? 본 왕 지금 당장 왕비를 다시 돌려보내야겠네. 언제 나으면 그때 다시 왕부로 돌아오게나. 여봐라."
우문익의 명에 시위가 빠르게 나타났다.
"본 왕비는 황제께서 직접 명한 강 왕비다.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릴 수 있겠느냐?"
싸늘한 눈빛으로 훑어보는 담생의 몸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뿜어 나오는 것을 느낀 시위들은 감히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강 왕비의 눈빛에서 진국 대장군의 기개가 묻어나는 것 같군.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게는 강아지 같은 딸이 없다는 말이 맞았어. 그동안 강 왕비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네."
우문익도 담생의 싸늘하게 식은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황과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진국 대장군까지 언급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상려가 담생에게 차를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라는 것을 우문익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연모하는 연인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혼례식을 계속 이어가려면 억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챈 상려가 우문익의 곁에 다가가더니 손을 꼭 잡고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야, 소첩 왕비께 직접 차를 올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담 장군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올리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려야."
잔뜩 감동한 얼굴로 상려를 바라본 우문익이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가운 얼굴로 담생을 돌아보고 이를 꽉 악물었다.
"려가 차를 올리겠다고 했으니, 잘 음미하고 마셔야 할 것이다."
담생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상려가 태부부에서 데려온 비녀 춘홍에게 눈짓하자 춘홍이 바로 차를 내왔고, 찻잔을 건네받은 상려가 담생의 앞으로 내밀었다.
"왕비, 드시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팔만 앞으로 뻗어 차를 건네는 상려의 모습에 담생의 입술 사이로 조롱 섞인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 가문 첩실이 차를 올릴 때,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올립니까?"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우문익이 담생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적당히 하거라."
상려는 바로 그런 우문익을 막아 섰다.
"왕야, 소첩 왕야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상려가 무릎을 꿇더니 손에 든 찻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마치 치욕을 꾹 참아내는 사람처럼 말이다. 우문익은 담생을 향한 살기를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객들도 측은한 얼굴로 상려를 바라보며, 경성 제일 재녀가 강왕을 위해 무릎을 꿇는 모습을 찬양했다.
저런, 역시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어.
하지만 이러한 수단은 담생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 어차피 남은 건 몸뚱어리밖에 없는데, 무서울 것도 없었다.
곁눈질로 찻잔을 바라본 담생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으려 할 때, 찻잔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더니 뜨거운 찻물이 상려의 몸 위로 쏟아지는 것이다.
"아!" 상려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담생, 죽고 싶어 작정했구나!"
한걸음에 달려온 우문익이 시뻘건 눈으로 담생의 목을 움켜잡았다.
살짝 뒤로 젖힌 고개에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인 담생의 눈빛에는 약간의 도발까지 깃들여 있었다.
"왕야,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정비의 목을 졸라 죽일 수 있다면, 소첩 왕야를 진정한 사내로 인정할 겁니다."
분노에 이마에 핏줄까지 터진 우문익은 손에 더 힘을 주지 못하고 혐오와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담생을 노려봤다.
"그대 누구야?"
예전의 담생은 무능하고 나약해 감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만약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담생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소리까지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왕야, 어찌 되었든 우리가 한 해가 넘는 시간을 부부로 지냈는데, 설마 소첩도 잊으신 겁니까?"
회차 3
"왕야, 왕비를 놓아주십시오. 소첩은 괜찮습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상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문익은 그런 상려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담생을 차갑게 쏘아보며 손에 힘을 풀었다.
"려가 너를 위해 간청하지 않았다면, 본 왕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허, 죽일 담도 없었으면서. 입만 살았군.
담생이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자 우문익은 또다시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이 차는 소첩이 마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왕야, 혼례를 마저 올리십시오. 소첩은 이만 처소에 돌아가 쉬어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옷을 툭툭 털며 태연하게 자리를 떠났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어찌 혼례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마지못한 사의가 다시 한번 외칠 수밖에 없었다.
"동방화촉을 밝힙니다."
두 눈 가득 뜨거운 눈물이 차오른 상려가 가녀린 얼굴로 우문익을 바라봤다.
"왕야..."
담생, 천한 계집년은 이후에 상대해도 늦지 않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분노를 꾹 억누른 우문익은 상려를 향해 싱긋 미소 짓더니 그녀의 손을 꼭 맞잡으며 혼례를 원만하게 마무리했다.
혼례식이 끝나고 자리에 앉는 하객들 모두 담생을 의논하기에 바빴다. 오늘 주인공인 우문익과 상려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강왕부 맞은편 사해주점. 3층 창가에서 우문익의 혼례식을 모조리 지켜본 사내의 차분한 얼굴에 흥미진진한 기색이 피어 올랐다.
강 왕비의 수단이 이토록 대단할 줄은 몰랐는데. 우문익을 거의 통제 불능 상태로 몰아넣을 뻔하다니.
흥미롭기 그지없구나.
"명월아."
그의 부름에 명월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우문창은 강왕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남산풍인원에 가서 강 왕비의 상황을 알아오거라."
명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사라졌다.
찻잔을 손에 쥔 우문창이 한가로이 차를 마시려 할 때, 안색이 급격하게 일그러지더니 손에 쥔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슴을 움켜쥔 그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지병이 또 도졌구나!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린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쏟아졌고,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두 눈에 핏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살인 충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우문창이 강한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버티더니,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지병을 억제할 수 있는 환약이 들어있는 검은색 병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손을 어찌나 세게 떨었던지, 병에 담긴 환약이 전부 바닥에 쏟아진 것이다.
급한 마음에 더러움을 무릅쓰고 바닥에 떨어진 약 두 알을 주워 입에 넣자, 환약이 서서히 녹으면서 우문창도 천천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거칠었던 호흡이 잦아들었지만, 눈에는 아직 약간의 피줄로 벌겋게 충혈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남에게 말 못할 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이전에는 몇 해에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키더니 나중에는 한 해에 한 번으로 바뀌었고, 이제 마지막 발작이 있은 지 겨우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우문창은 전국을 돌아다녔고, 약왕곡의 왕 신의를 찾아갔다. 허나 왕 신의도 그의 이상한 지병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병이 발작할 때마다 살의를 누를 수 있는 단약만 처방했다.
그러나 왕 신의가 직접 만든 단약을 복용해도,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기 힘들었고 끓어 넘치는 살의는 점점 더 강해졌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은 우문창이 다시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실 때, 귓가에 담생이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마차를 태워주고, 은자를 빌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충고하자면, 몸에 남아 있는 고독(蛊毒)을 빨리 제거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한 해 정도 남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에 잡아 먹혀 미치광이 살인 본능만 남은 마귀가 될 겁니다."
돌아가면 시간을 내어 강 왕비를 만나 봐야겠군.
"엣취, 엣취!"
청풍원으로 돌아가는 담생이 연달아 여러 번 재채기를 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콧등을 힘껏 문지른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웬 놈이 내 흉을 보고 있구나."
일각 후, 문이 굳게 닫힌 청풍원 앞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본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달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지경이 되었다니. 몹쓸 자식 같으니.
"끼이익!"
굳게 닫힌 대문을 밀자, 거슬리는 소리가 고요한 밤 공기를 가르고 퍼졌다.
회랑 아래, 어렴풋한 작은 그림자가 담생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주인님, 정말. 정말 주인님이 맞습니까?"
담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자를 바라보자 흐릿한 안개 속에 고작 열여섯, 일곱 즈음 된 소녀가 서 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에 눈과 볼은 움푹 꺼져 있었고, 안색은 어두웠지만 밝게 빛나는 두 눈은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몸 주인의 심복인 월이 계집이었다. 우문익이 몸 주인을 남산풍인원에 보낼 때, 월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간청했지만 우문익의 발길질 한 방에 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계집이 주인을 따라 풍인원에 가려 했으나, 그녀가 청풍원을 벗어나면 주인을 죽이겠다는 우문익의 명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달포 사이, 월이는 마당의 회랑 아래 멍하니 앉아 굳게 닫힌 문만 바라보며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우문익의 발길질 한 방에 월이 계집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심각한 내상을 입어 아직도 가슴에 피멍이 가시지 않았다.
담생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월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
"주인님!"
자신이 모시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한 월이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달려왔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담생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월이를 받쳐주며 맥을 짚었다.
월이의 상태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내상은 천천히 회복할 수 있지만, 가슴에 맺힌 피멍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 담생은 나중에 월이에게 침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주인님, 왜 이러십니까?"
월이 자신의 손목 위에 놓인 담생의 두 손가락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담생이 그런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며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내상이 완전히 낫지 않았구나. 얼른 돌아가 쉬는 게 좋겠다."
월이의 손을 끌고 처소에 돌아와 억지로 침상에 눕힌 그녀는 은침을 꺼내 침을 꽂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침상에 엎드린 월이 몸에 맺힌 피를 토해내자 두 볼에 혈색이 돌았다.
달포 만에 돌아온 주인이 침술을 할 줄 알게 된 것을 본 월이는 의문 가득한 얼굴을 해 보였다.
담생은 은침을 넣으며 담담하게 설명했다.
"풍인원에서 노땅 미치광이에게 배웠다."
그 말을 들은 월이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주인이 풍인원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소인이 쓸모 없는 탓입니다. 소인이 주인님을 지켜드리지 못해..."
담생은 그런 월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강왕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인데, 네가 아무리 힘이 있어도 날 지킬 수는 없었을 테지. 되었다, 지나간 일은 이제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돌아왔으니 이제 두 발 뻗고 편히 자거라. 난 먹을 것부터 좀 챙겨와야겠구나."
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팔을 꼭 잡아 끌었다.
"주인님, 소인에게 먹을 것이 있습니다. 우선 이것으로 배부터 채우십시오."
말을 하면서 베개 밑에 보자기로 꽁꽁 싸맨 만두를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아까워 먹지 못했던 만두에는 곰팡이가 시퍼렇게 껴 있었다.
"이건 먹지 못하겠구나. 어차피 먹을 바엔 맛있는 거 먹어야지."
오늘은 강왕이 측비를 들이는 날이니, 부엌에는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할 것이다. 누가 처소에서 처량하게 곰팡이가 핀 만두를 먹으려 할까?
월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담생이 곧장 왕부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 주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월이는 가슴이 벅차 올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주인께서 예전의 나약함을 던지고 다시 일어났어.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이, 이제야 장군의 딸다운 자태가 보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