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차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소은별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도윤은 그녀의 당황한 기색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며,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우리 집으로 와."

내일은 바로 그녀의 생일이다.

'허도윤이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소은별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희망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남자의 다음 말 한마디에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일 희원이가 우리 집에 올 거야.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까, 내가 식단표 보낼 테니 신경 써서 영양식 좀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허 대표님." 가슴 깊은 곳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소은별은 고개를 숙여 순순히 대답했다.

허도윤이 말하는 '희원'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첫사랑, 강희원이다.

강희원은 해외에서 의학을 전공하며 뛰어난 연구 성과를 거두었고, 이번 주에 모든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고 한다.

강희원이 돌아왔으니, 대체품인 소은별은 이제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소은별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언제 떠나면 될까요?"

"떠난다고?" 허도윤은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소은별의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리더니 음탕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훑었다.

"내가 너의 첫 남자인데, 너 발길이 그렇게 쉽게 떨어지겠어?"

소은별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18살에 그를 만나,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에서 이제 그의 모든 취향과 습관에 완벽하게 맞춰진 여인으로 변했다.

의학 박사인 강희원은 귀국 후 최고의 의료 회사에 입사할 예정이라 허도윤과 자주 함께할 수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소은별이 침대에서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은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이 제 첫 남자인 건 맞지만, 마지막은 아닐 거예요. 전 불륜녀 노릇을 결코 하지 않을 거고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저만의 삶을 시작할 거예요!"

허도윤은 그녀를 노려보더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끝낼지 말지는 내가 정해."

그는 비웃으며 덧붙였다. "넌 괜찮지만 너의 가족들은 동의할까?"

그 말에 소은별은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카드를 받지 않고 허둥지둥 차에서 뛰어내렸다.

굴욕적인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해, 소은별의 아버지 한재호와 둘째 오빠 한이석은 거액의 도박 빚을 졌고, 해외에서 유학 중인 큰 오빠 한시언은 막대한 학비가 필요했다.

셋째 오빠 한태우는 집에서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었고, 허도윤의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술자리에서 소은별을 허도윤에게 바쳤다.

그날 밤은 소은별의 첫경험이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수치심, 굴욕감에 온몸이 떨렸다.

그러나 허도윤은 그날 유난히 인내심 많고 부드러웠다.

사랑에 목말랐던 소은별은 그가 밤새 강희원의 이름을 중얼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야 자신이 강희원과 몇 군데 닮았고, 심지어 의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허도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은별은 강희원보다 몇 살 어렸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2년 만에 대학 과정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허도윤의 강한 소유욕 때문에 그녀는 졸업장을 받기 직전, 의학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그의 개인 영양사이자,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비밀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허도윤이 자신의 몸에만 집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강희원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허황한 꿈을 꾸며 비굴하게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오늘, 그 허망한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허씨 가문 저택.

소은별은 주방에서 묵묵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정신이 흐트러진 그녀는 실수로 뜨거운 냄비에 손등을 데고 말았다. 비명 소리에 허도윤은 주방으로 걸어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었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냉장고 쪽으로 돌아서 얼음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소은별의 얼어붙었던 마음 한구석이 살짝 녹아 내리는 것 같았지만, 다음 순간...

현관문이 열리고 강희원이 우아한 자태로 나타났다.

정교한 화장에 세련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마치 우아한 백조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 앞에서, 주방 앞치마를 두른 소은별은 더욱 초라한 미운 오리새끼로 보일 뿐이었다.

소은별에게 얼음을 가져다주려던 허도윤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더니, 방향을 틀어 백조 같은 강희원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 후, 그는 소은별에게 단 한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소은별은 빨갛게 부어 오른 손등을 내려다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도윤 씨,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정말 고마워." 식사 자리에서 강희원은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며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은별은 심장이 조여 드는 것을 느끼며 마치 또 한 번 칼에 찔린 것 같았다.

이 음식들은 허도윤이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들이기도 했다.

그는 강희원의 취향에 맞춰 자신의 취향까지 바꿔 버린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던 허도윤의 모든 것에는 강희원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강희원이 해외에 있는 동안조차, 두 사람은 이미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소은별은 왜 이제야 이 사실을 알아챘을까?

까다롭기로 소문난 허도윤의 어머니인 심여진도 강희원을 마음에 들어 했다.

"희원아, 이번에 귀국하면 다시 떠나지 않을 거지? 이제 우리 도윤이랑 본격적으로 결혼준비도 해야지."

강희원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가, 허도윤의 반응을 살피듯 시선을 흘겼다.

"어머님, 제가 해외에 있는 동안 도윤 씨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끼어들어 방해하면 안 되죠."

강희원은 소은별을 흘깃 쳐다보며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심여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랭한 비웃음이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같은 식탁에 앉아 밥 좀 같이 먹는다고 해서 누구나 우리 집안 사람이 되는 건 아니란다." 심여진은 강희원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지으며 덧붙였다. "너처럼 고학력에 박사 학위까지 받은 여자만이 우리 도윤이와 잘 어울리지."

허도윤은 강희원에게 국을 떠주며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희원아, 난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너뿐이야. 밖에서 떠드는 소문 같은 거 귀에 담지도 마."

강희원은 국그릇을 받아 들고 수줍게 한 모금 마시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소은별은 허도윤이 자신을 이 자리로 부른 이유가 단순히 영양식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강희원에게 그와 소은별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두 번 죽인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소은별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쓴맛과 굴욕감을 삼키고 아무 핑계나 대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손등의 화상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오랫동안 차단해 둔 번호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메시지를 보냈다.

[배 대표님, 전에 말씀하신 결혼 제안, 아직 유효한가요? 저 이제 관심이 생겨서요.]

회차 2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났지만, 소은별이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입가에 쓰라린 웃음이 스쳤다.

어린 나이에 천재 기장으로 이름을 날린 배성현은, 3년 전 그녀에게 거절당했으니 바로 자신의 번호를 차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쉰 소은별은 우산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에, 셋째 오빠 한태우의 전화가 걸려왔다.

"별아, 네가 보낸 사직서, 내가 삭제했어. 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니? 큰형 유학 비용도 필요하고, 작은 형도 창업 자금이 필요해. 허 대표님이 없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라고!"

어젯밤 허도윤과 크게 다툰 후, 소은별은 바로 사직 메일을 전송했는데 셋째 오빠가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은별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오빠, 허 대표님의 마음에 둔 사람이 귀국했어요. 두 사람 곧 결혼할 거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말투는 확고했다. "나... 불륜녀 노릇은 절대 안 해요."

"별아, 이건 다 널 위한 일이야.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네가 허 대표님한테 3년 동안이나 후원 받았으니, 이제 좋은 값에 팔리지도 않아." 한태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소은별의 심장을 찔렀다.

소은별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팔다니요?! 오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별이, 여자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젊고 깨끗할 때, 제대로 된 스폰서 하나 잡는 게 최고야. 오빠 말 듣고 계속 허 대표님의 곁에 있어.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지 말고."

말을 마친 한태우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어둡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며 소은별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허도윤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마치 흡혈귀처럼 그녀를 옭아매는 가족 때문이었다.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허도윤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주면 그녀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달콤함 속에 비소가 섞여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소은별? 역시 너였구나, 이 년!"

갑자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은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초췌하고 흉악한 얼굴의 남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한재호였다.

한재호는 도박과 술에 빠져 빚더미만 쌓았고,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네 남매는 모두 그를 극도로 꺼려하며 가능한 멀리 피해 다녔다.

소은별은 자신이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발견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황급히 도망치려 하자, 한재호는 손에 든 술병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고 비틀거리며 그녀를 쫓아와 팔을 꽉 움켜잡았다. "돈은? 돈 내놔!"

"이거 놔요! 돈 없다고요!"

소은별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한재호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어딜 도망가! 널 구하려다 네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어! 이 재수 없는 년! 네가 내 아내를 죽였으니, 돈으로 갚아야지!"

"아빠,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엄마의 죽음은 소은별 마음속의 가장 깊고 연약한 곳을 정확히 찔렀다.

그녀가 충격에 빠진 사이, 한재호는 그녀의 가방을 낚아채려 했고 거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무거운 손바닥이 얼굴에 떨어지려 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악!"

예상했던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고, 한재호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소은별이 눈을 뜨자, 한재호는 건장한 남자의 손에 목이 꽉 조여져 있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한재호의 목을 옥죄는 그의 손만이 선명히 보였다. 손가락 마디가 선명하고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온 손에서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마치 새로 뽑은 검처럼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소은별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날카로운 윤곽 아래, 눈썹과 콧대가 높게 솟아 있었고, 길고 깊은 눈매는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 눈 속에 담긴 빛은 너무나도 차갑고 예리해서, 감히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어려웠다.

굵은 빗방울이 시야를 가려 소은별의 눈에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배성현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소은별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소은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배성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한재호를 내팽개쳤다.

"이 새끼가..."

한재호는 손목을 문지르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으나,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 몇 명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한재호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도망치며 으름장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다려!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배성현과 함께 아파트로 돌아온 후에도, 소은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배성현이... 정말 나타난 걸까? 한 시간 전에 내가 보낸 문자 때문에?'

소은별이 어색하게 감사를 표한 후,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당황한 시선으로 배성현을 바라보던 그녀는, 온몸이 흠뻑 젖은 그를 발견하고 마른 수건을 찾아주겠다고 말하고 욕실로 도망치듯 황급히 달려갔다.

배성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몇 초간 지켜보다가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작은 아파트는 간결하면서도 따뜻하게 꾸며져 있었다. 집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으나, 책장에 영양학 서적이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자 입술을 다시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배성현이 책장 가까이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자, 영양학 서적 뒤편 구석에 감춰진 몇 권의 의학 학술지와, 고무 부분이 누렇게 변색된 청진기가 보였다.

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 숨겨진 물건들은 소은별이 의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욕실에서, 소은별은 배성현이 오래 기다릴까 봐 서랍을 급히 뒤져 새 수건을 찾아내고는 황급히 달려 나왔다. "배 대표님, 수건..."

그러나 그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배성현이...

상의를 벗고 있었다!

소은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 그리고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이었다.

원초적인 남성적 힘이 느껴지는 그의 몸은 강렬한 시각적 압박감을 주었고, 소은별은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피부에 남아있는 물방울이 복근의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려 바지 천에 스며들었다. 소은별의 시선도 무의식적으로 물방울을 따라 내려가서는 안 될 곳에 멈췄다.

배성현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소은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얀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당황과 부끄러움에 도망치려 했으나, 배성현이 한 발짝 먼저 다가와 그녀를 벽 모퉁이에 가뒀다.

"배, 배 대표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은별이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결혼하겠다는 거, 진심이야?"

회차 3

머리 하나는 더 큰 배성현에게 현관문 구석으로 몰린 소은별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잘 다듬어진 쇄골 선에 꽂혀 버렸다.

강렬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소은별은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거 좀... 먼저 놔주세요."

"대답부터 해." 배성현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강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몰아붙이는 배성현의 모습에 눈을 꼭 감고 잠시 고민하던 소은별은 마침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도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자, 배성현은 반 걸음 뒤로 물러났고 소은별은 가슴 깊이 막혔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상의를 벗은 채 소파에 느긋하게 앉은 배성현은 그녀가 가져온 수건으로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닦았다. 여유롭고 편안한 그의 모습은 그녀보다 이 아파트의 주인에 더 가까워 보였다.

소은별은 그와 처음 만났던 3년 전의 그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날은 허씨 그룹이 항공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천재 기장으로 소문난 배성현을 특별히 초대한 연회 자리였다.

그때의 배성현은 회색빛 조종사 제복을 입고, 비행기에서 막 내린 듯한 모습으로 연회에 참석했다.

그때의 그는 엄숙하고도 차가운 분위기에 금욕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지금처럼 상의를 벗고 있는 강렬하고 섹시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연회에서 허도윤은 그가 항공 분야의 업무를 소개해 주길 바랐지만, 기장이라는 직업을 무시하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배성현은 그런 허도윤의 태도를 무시한 채, 연회가 끝나기 직전 소은별에게 다가와 연락처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소은별은 허도윤이 신경 쓸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허도윤은 그녀의 사랑이 너무나도 비굴하고 자신에게만 집착한다고 여겼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날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도윤은 그녀를 배성현 쪽으로 떠밀며, 자신의 사업을 도와달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배성현이 소은별을 바라보던 눈빛에는 분노와 함께 안타까움이 스쳤다. 마치 그녀의 비굴한 처신을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배성현은 나중에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 배향매와 소은별의 어머니는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을 정혼시켰다고 했다.

지금 배향매의 몸이 많이 약해져 얼마 살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배성현에게 소은별과 빨리 결혼해 그녀를 흡혈귀 같은 가족에게서 구해내라고 요구했다.

당시 소은별은 허도윤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배성현의 제안을 거의 주저 없이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

그때의 어리석고 집착에 가까웠던 사랑을 떠올리니, 소은별은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몇 분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배성현의 옷과 한 서류를 가져왔다.

소은별은 배달원인가 생각했지만, 문 앞에 선 사람은 완전한 정장 차림이었다.

배성현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서류를 소은별에게 던졌다.

정신을 차린 소은별은 그것이 혼전 계약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계약서에는 결혼 후 소은별이 배성현의 아내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며, 두 사람이 계약 결혼이라는 사실을 몸이 약한 어머니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명시되어 있었다.

배성현은 그에 대한 대가로 매달 4천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 숫자를 본 소은별은 깜짝 놀랐다.

기장인 배성현의 수입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월급쟁이인 그가 매달 4천만 원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높은 보수를 주는 이유는 아마도 허도윤에게 자극을 받아 자존심을 되찾기 위함일 거라 생각했다.

소은별은 그에게서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생각도 없었고, 일시적인 허영심 때문에 그가 빚을 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다른 조항은 다 동의하지만 돈은 안 주셔도 돼요. 결혼 후 저는 직장을 구할 거니까요."

배성현의 안색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소은별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설마 배성현도 허도윤처럼 내가 직장을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걸까?'

배성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버는 건 너 돈이고, 내가 대가를 지불하는 거랑은 상관없어."

소은별은 몰래 그를 곁눈질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역시 체면 차리느라 사서 고생하는구나.'

그녀는 어색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돈을 받지 않으려는 건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당신한테… 후원 받는 기분이 들고 싶지 않아요."

"결혼하기로 결정한 이상, 계약이든 아니든, 넌 내 아내야."

배성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그녀가 여전히 거절하려는 것을 보고 차갑게 덧붙였다.

"사회생활 초년생이라 돈 들어갈 데 많을 텐데. 빈손으로 가서 제대로 된 정장이라도 사 입겠어?"

소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허술한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이 돈을 일단 받아두고 기회가 되면 배성현의 어머니에게 돌려주면 돼.'

배성현은 그녀가 드디어 고집을 꺾는 것을 보고 결혼 신청 서류를 빨리 작성하라고 재촉했다.

소은별은 서둘러 각종 서류에 사인을 하고 정보를 기입했다.

모든 일을 마친 배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은별도 예의상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섰다.

"같이 안 가?" 배성현은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벌써요?" 소은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아직 정리할 게 남아서..."

배성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3일 줄게."

"네..." 소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대답했다.

배성현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는 아파트를 성큼성큼 나섰다.

3일이라는 시간이 촉박했기에, 소은별은 다음 날부터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허도윤이 그동안 사준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창 바쁘게 움직일 때, 불청객이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배성현의 비서라고 소개한 성민지는 사장의 명령을 받고 그녀의 이사를 돕기 위해 왔다고 했다.

소은별은 키가 큰 여자를 훑어보며 의아해했다. '기장에게도 비서가 있나?'

하지만 사교 공포증이 있는 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성민지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허도윤의 취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은별 씨, 그 짠돌이 전 남자친구는 완전 구두쇠 아니에요? 이런 싸구려를 선물이라고 주다니…"

그녀는 소은별의 손을 잡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빨리요, 제가 은별 씨한테 딱 맞는 걸로 골라줄게요. 이런 쓰레기들을 대표님이 보면, 화가 나 제 가죽을 벗길지도 몰라요."

허도윤이 그녀에게 사준 물건은 명품은 아니었지만, 모두 품질이 좋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성미지의 표현대로라면, 이 모든 것이 배성현의 눈에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기장인 배성현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을까? 설마 자존심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성민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소은별은 그녀와 함께 백화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소은별은 다정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바로 허도윤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강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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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아내밖에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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