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천한 년 주제. 버둥대지 말고 얌전히 다리나 벌려 우리를 즐겁게 해줘야지!"
"역시 명문 가문에서 자란 아가씨라 그런지, 피부가 비단보다 더 부드럽군. 이 촉감은 역시..."
바닥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소녀의 귓가에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음란한 말들이 계속 들려왔다.
체구가 육중한 사내들의 손아귀에 옷이 찢겨 손바닥만 한 속옷밖에 남지 않았고, 공기 중에 드러난 피부에는 처참한 채찍 자국이 가득해,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왜, 왜 나를 이리 대하는 것이냐..." 잔뜩 겁에 질린 얼굴에 눈을 크게 뜬 소녀는 자신에게 추잡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려는 듯했다.
사내는 거친 손으로 소녀의 몸 구석구석을 탐하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큰 아가씨가 내린 명이니 우리를 탓하지 말거라. 우리도 아가씨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만 얌전히 있으면, 우리도 부드럽게 대해줄 것이다. 하하하!"
야씨... 소녀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졌다. 야천교, 야씨네... 그녀는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해를 입힌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린 뒤, 혀를 깨물고 자결을 선택했다.
"빌어먹을. 정말 숨을 거뒀다고? 더는 재미를 볼 수 없게 되었군!"
"서둘러. 시체에 온기가 남아있으니 재미는 끝까지 볼 수 있겠지..."
바로 그때, 음산한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피어 오른 검은 기운이 공기 중에 퍼지더니 소녀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잠시 후, 소녀의 굳게 감긴 눈이 번쩍 뜨이더니 동공에 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몸을 깔고 있던 사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사내의 목을 힘껏 졸라 비명이 새어 나오기 전에 목뼈를 부러뜨렸다.
"어, 어떻게!"
한패가 목이 졸려 즉사하는 것을 본 다른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당장 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분명 아주 짝에도 쓸모 없는 계집인데, 무슨 힘으로 사람까지 죽이는 거지?'
그러나 소녀는 사내에게 도망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숨을 거둔 사내의 시체를 발로 옆으로 차던지고 돌을 손에 움켜쥐더니 도망치는 사내의 뒤통수를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돌멩이는 정확히 사내의 뒤통수를 가격했고, 짧은 비명과 함께 자리에 쓰러진 사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소녀는 날카로운 바위로 사내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분수처럼 터져 나온 뜨거운 피가 소녀의 몸에 가득 튀었다.
어느새 숨을 거둔 사내의 머리가 완전히 피투성이 된 것을 발견한 야천설은 그제야 바위를 아래로 떨구고 흐린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여기는 어디지?'
그때, 머릿속에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기억들이 썰물처럼 밀려 들어왔고, 극심한 두통에 야천설은 머리를 부여잡고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26세기 최고의 용병인 그녀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폭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처 없이 떠돌던 영혼은 다른 세계에 그녀와 이름이 똑같은 소녀의 몸에 들어와 환생하게 된 것이다.
몸 주인은 인간계 청현국 명문 가문인 야씨 가문 다섯째 아가씨로, 비록 양녀이지만 야씨 가문의 다른 자손과 똑같이 현령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현령을 응집하지 못한 그녀는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불명예를 얻고 말았다.
오늘 몸 주인은 야씨 가문의 큰 아가씨인 야천교에 의해 고혼산에 버려진 것도 모자라 사내 두 명에게 몸이 더럽혀지는 모욕을 참지 못해 결국 원한을 품고 혀를 깨물어 자결한 것이다.
그리고 26세기 용병 신분인 야천설이 몸 주인의 육체를 물려받고 이 세상에 새롭게 태어났다.
뒤죽박죽인 기억을 정돈한 야천설은 마른 입술을 혀로 가볍게 핥으며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천설이라는 담대한 이름을 갖고, 이리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내 반드시 너의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너를 괴롭힌 자들은 너보다 더한 고통을 경험하고, 처참한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줄게."
찬바람이 들판을 가로질러 불어오자 추위에 재채기를 한 야천설은 그제야 자신의 옷이 다 헤진 것을 발견하고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순간,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잠식할 것 같은 검은 기운이 주위를 맴도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기운을 알아차린 야천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검은 기운들 모두가 음기라니!'
'어쩐지 주변에 음기가 득실거리더라니... 이 몸이 바로 전설로만 듣던 극음의 몸이었구나!'
손 마디마디 관절을 가볍게 움직인 야천설의 마음 속에 몇 가지 추측이 생겼다. 어쩌면 극음의 체질이 그녀가 수련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바로 그때, 야천설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약간의 소환력을 느꼈다.
'무엇이 나를 부르고 있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야천설은 땅에 깔린 백골을 가뿐히 지르밟고 맞은편에 있는 동굴로 향했다.
야천설은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그림자가 바위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잘생겼고, 짙은 눈썹과 뚜렷한 코, 오른쪽 눈가에 작은 눈물 점까지 매력적이었으며 살짝 다문 입술과 창백한 안색에서 병약미가 묻어났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비단옷을 입고 있는 남자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동묘지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 떨어진 신선을 연상케 했다.
남자의 몸에 걸친 옷에 시선을 고정한 야천설은 눈이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깨끗한 옷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팔을 앞으로 뻗은 그녀는 그의 옷을 벗기려 했다.
"땡!"
그때, 방울 하나가 남자의 소매 사이로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바닥을 내려다본 야천설의 두 눈에 놀란 기색이 언뜻 스쳤다.
그녀는 방울을 손에 쥐고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짙은 붉은색을 띠는 방울의 위에는 검붉은 기체가 감돌고 있었고, 정면에는 금색의 해골 조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직감적으로 방울이 범상치 않은 것을 느낀 그녀는 귀찮은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방울이 멋대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붉은빛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등골이 오싹해 나는 것을 느낀 야천설은 손끝에서 약간의 따끔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방울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그녀의 손끝을 베어 공기 중에 흩어진 피가 방울에 닿았다.
방울에서 한 가닥의 붉은 실이 나오더니 야천설과 남자를 하나로 연결했다.
화들짝 놀란 야천설이 방울을 버리려 할 때, 바위에 무릎 꿇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던 남자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야천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힘껏 움켜쥐고 바닥에 누르며 날카롭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회차 2
남자의 손에 목이 졸린 야천설은 불안감과 질식감을 느낀 동시에 남자의 차갑게 식은 붉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남녀 간의 힘 차이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치지 못했다.
'겨우 시체를 빌려 환생에 성공했는데, 내가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손에 목이 졸려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야천설은 극음의 몸을 이용해 주위의 음기를 끌어들여 남자를 공격하려 했다.
그 순간, 남자의 안색이 급격하게 일그러지더니 야천설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풀고 얼굴을 돌려 다급하게 기침을 했다. "읍, 콜록콜록!"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야천설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남자의 모든 행동을 경계 가득한 눈길로 지켜봤다.
날카롭게 눈을 번뜩인 그녀는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선혈을 발견했다. 그녀의 공격에 남자는 어쩌면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야천설이 손을 들어 올리자 두 사람을 연결한 붉은 실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어렵게 기침을 멈춘 봉무제는 눈앞에 놓인 붉은 실을 발견하고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동명 실?"
야천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동명 실?'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남자의 눈언저리에 살의가 번지더니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울을 낚아채려 했다.
야천설은 눈앞에 흰색 비단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 같더니 동시에 손목이 단단한 무언가에 잡힌 것을 느꼈다.
서로의 살결이 맞닿은 순간, 그녀의 등줄기에서부터 열기가 피어 올랐다. 그의 체온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고, 몸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용암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 손 놔!" 몸을 뒤로 젖힌 야천설이 허릿심을 빌려 몸을 돌리자 머리카락에 봉무제의 입가에 남은 피가 묻었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진 봉무제의 눈동자가 더욱 짙게 변하더니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야천설이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걷어차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막아낸 그의 옷소매가 흔들리며 방울에서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이까짓 수작으로 반항하려 했던 것이냐?"
상체를 살짝 숙이고 말하는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자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난초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야천설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해도, 동명 실의 고통을 공유하는 작용하에 결국 방울을 봉무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봉무제는 방울에 남아 있는 선명한 핏자국을 발견하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본존의 환혼 방울에 어찌 네 피가 묻어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야천설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옷소매에서 환혼 방울이 떨어졌고, 그것이 갑자기 내 손가락을 찌르더니 빨간 실이 우리 둘을 이어놓았습니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봉무제의 안색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환혼 방울이 너의 손가락을 찔렀단 말이냐?"
야천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 했다. "네. 설마 피를 맺은 계약이나 그런 건 아니겠죠?"
또다시 고민에 잠긴 봉무제는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혼 방울에 본존의 피가 묻어 있으니, 동명 실은 아마 너와 본존의 피가 융합되어 생겨난 것 같군."
동명 실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지한 야천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봉무제를 돌아봤다. "우리 사이에 동명 실이 이어졌으니, 앞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요?"
봉무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설명하려던 찰나, 이상한 느낌에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야천설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안색이 어둡게 변한 봉무제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손끝에서 하얀 기류가 피어 오르더니 바로 사라졌다. "본존의 수련 경지가 어찌 무아 경지에서 입도 경지로 떨어진 거지?"
그의 말을 듣고 야천설은 그만 자리에 얼어붙었다.
몸 주인의 기억에 따르면, 이 세계의 수련 등급은 일곱 개의 경지로 나뉘어져 있다.
봉무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수련 경지는 최고 수준인 무아 경지로 엄청난 실력을 보유한 절세의 강자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련 경지가 갑자기 초보 수준인 입도 경지로 떨어지다니...'
야천설을 가만히 응시하던 봉무제가 갑자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움직이지 말거라."
그녀의 수련 경지를 감지한 봉무제는 내키지 않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 "너의 수련 경지가 이제 막 입도 일 단계에 머물러 있는구나..."
안색이 짙게 어두워진 봉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동명 실이 두 사람의 명줄을 이어놓아 그녀에게 억제 당한 것도 모자라 수련의 경지마저 입도 경지로 떨어졌다.
동명 실을 풀지 못하면 그의 수련 경지는 결코 회복할 수 없다.
봉무제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너는 본존과 함께 이곳을 떠나 동명 실을 푸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야천설은 주저 없이 거절했다. "당신과 함께 떠나야 한다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너는 거절할 자격이 없다!"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뜬 봉무제의 몸에서 압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오더니, 당장이라도 야천설을 찍어 누를 것만 같았다.
야천설의 눈빛에 날카로운 빛이 언뜻 스치더니 입 꼬리가 매혹적인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 떠다니는 검은색 음기를 몰래 소환했다. "난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팽팽하게 맞선 두 사람은 누구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봉무제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것은... 음기! 어린 소녀가 음기를 다룰 수 있다니.'
잠깐 생각에 잠긴 봉무제의 붉은색 눈동자에 빛이 피어 오르더니 독한 말을 내뱉었다. "동명 실, 이름 그대로 생사를 함께한다는 것이다. 본존은 너와 명을 공유하고 있으니, 네가 이대로 떠난다면 우리 모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회차 3
봉무제가 하는 말을 들은 야천설은 그제야 천천히 음기를 거두었다.
봉무제는 그런 그녀를 흘깃 쳐다본 뒤 계속 말했다. "우리는 적이 될 수 없다. 동명 실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후에 서로의 길을 가도 늦지 않다."
어린 소녀의 몸에 아직 그가 모르는 비밀이 많다.
그리고 동명 실이 두 사람을 이어준 탓일까, 어쩐지 봉무제의 몸 속 마기가 처음처럼 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 있다.'
'내공이 입도 경지로 떨어졌으니 정면 승부하면 양쪽 모두 다칠 뿐이다. 지금은 일시적인 굴욕감을 참고 동명 실을 푼 다음, 그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된다.'
봉무제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꼭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핏빛이 기이하게 흩어진 눈동자가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야천설의 머릿속 기억은 이 세계에 다양한 종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인족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눈동자 색이 변하는 남자는 아마 완전한 인족은 아닐 것이다.
봉무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수그러드는 것을 느낀 야천설은 그가 그녀에게 적의를 거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담하게 물었다. "저는 야천설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봉무제는 그녀의 찢어진 옷을 흘깃 쳐다보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봉무제."
말을 마친 그는 손가락에 낀 물건을 보유하고 있는 반지에서 깨끗한 두루마기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흠칫 놀란 얼굴인 야천설은 빠르게 두루마기를 받아 몸에 걸쳤다. '망나니인 줄 알았더니, 군자 같은 모습도 있군.'
"본존은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봉무제는 환혼 방울을 그녀에게 건넸다. "환혼 방울은 네가 잘 보관하고 있거라. 절대 다른 자가 방울의 존재에 대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본존 너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봉무제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두루마기를 끝까지 여민 야천설은 가볍게 몸을 풀더니 봉무제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하며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이제 야부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야부에 그녀의 생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몸 주인은 양모인 명옥을 끝까지 마음속에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야씨 가문의 큰 아가씨 야천교가 몸 주인을 해쳤는데,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진 야천설이 손에 쥔 환혼 방울을 가볍게 흔들자 맑은 방울 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지며 고혼산의 구석구석에 숨은 유혼이 방울 소리를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귀염둥이들, 오늘 나와 함께 야부에 가서 한바탕 뒤엎어 보자고!"
야천설의 명령과 함께 수많은 유혼이 흥겨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엄청난 수를 자랑하는 유혼 원혼이 고혼산을 벗어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시각, 할 일이 남았다고 했던 봉무제가 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야천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류영."
어둠 속에 검은빛이 언뜻 스치며 봉무제의 옆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네, 주인님."
"청현국 야씨 가문에 대해 조사하거라. 특히 야천설이라는 소녀를 더 주의해야 할 것이다." 봉무제의 차가운 목소리에 어떤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
잠시 자리에 멈칫한 류영은 이내 공손하게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수하 명 받겠습니다."
'주인님께서 어린 소녀에 관해 알아 오도록 지시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군.'
주인님의 명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따라야 했기에 류영은 더 깊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야천설은 몸 주인의 기억을 따라 야부에 돌아왔다.
곳곳에 화려함과 호화로운 기품이 드러나는 관저 앞에 선 야천설의 입 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저택의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야부의 후원과 이어진 담벼락으로 향했다. 그곳은 명옥과 몸 주인이 지내는 별원이었다.
야천설이 담벼락에 가까이 다가가자 여인이 서글프게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조롱과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설이 돌려줘. 불쌍한 우리 설이..."
"이낭의 설이는 이미 우리가 고혼산에 내던져 원혼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보고 싶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벽에 머리를 박고 죽으면 이낭이 애타게 찾는 설이와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삼이낭, 우리가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설이 계집만 보면 화가 나신다고 하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는 것이 제일 빠르고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야천설이 죽었으니 이제 네 차례구나.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은 우리 야부에 남아 봤자 짐밖에 되지 않는다."
맨 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이 야천설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미간을 짙게 찌푸린 그녀는 가볍게 담장 위로 올라가 두 남녀를 내려다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명옥은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고, 큰 아가씨 야천교는 기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매서운 눈빛으로 명옥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째 도련님 야윤묵은 얼굴에 눈물범벅이 된 명옥을 혐오감 가득한 눈빛으로 흘겨보며 당장이라도 발로 걷어찰 기세였다.
발을 뒤로 들어 올린 야윤묵은 순간 이상한 낌새에 뒤를 돌아보자 담장에 엎드리고 있는 야천설을 발견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 엉겨 붙었다.
야윤묵은 귀신이라도 본 듯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귀, 귀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