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하아… 안 돼, 지훈 오빠. 하윤이가 아직도 여기 누워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오빠 아내인데, 아내 침대 옆에서 이러면 안 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이잖아. 게다가 먼저 날 유혹한 건, 정하윤의 가장 친한 친구인 너였고."
"으응… 지훈 오빠, 내가 잘못했어… 살살해…"
병실 침대 위에는 숨 막힐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남녀가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려서 이곳에서 가장 원초적인 짓을 벌이고 있었다.
이유라와 뒤엉킨 채 숨을 몰아쉬던 박지훈은 침대에 누운 아내 정하윤을 흘깃 바라봤다. 침대 위에는 3년째 의식을 잃은 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정하윤이 있었다.
'계속 자, 정하윤. 나를 위해서라면… 그냥 잠자는 인형처럼,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게 좋아.'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3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정하윤이 단지 몸만 잠들어 있었을 뿐, 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주위의 소리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병실에서 벌어진 지난 3년의 모든 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 뻔뻔한 두 사람이 벌이고 있는 추태까지도 전부, 그녀는 3년 내내 끔찍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식물인간이 된 후에야 정하윤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 사실은 위선적인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
박지훈과 이유라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커졌고,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그 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걸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정하윤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듯 움직였다.
그때였다.
이유라가 정하윤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지훈 오빠, 방금 정하윤의 손가락 움직인 것 같아! 쟤, 쟤 깨어나는 거 아니야?!"
"우리 유라야, 걱정 마. 걘 절대 깨어날 수 없어." 박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유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유라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사실 지난 3년 동안 정하윤이 치료받는 약에 특수 약물을 섞어 왔거든. 해외에서 따로 구해온 건데, 이 여자는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야." 박지훈은 정하윤이 깨어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사실 3년 전 교통사고도 전부 내가 일부러 꾸민 거야. 정하윤을 폐인으로 만들려고. 그래야만 내가 정하윤의 남편이라는 명분으로 회사 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 말하던 박지훈의 눈에 잠깐 원망이 스쳤다. "정하윤이 회사에서 그렇게 높은 위신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때 교통사고로 그냥 죽게 만들었을 거야.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지고지순한 남편인 척 연기해야 했지. 그래야 회사 사람들이 날 받아들이고 내 말에 따를 테니까. 하지만 이 위선적인 연극도… 이제 끝낼 때가 됐어."
정하윤이 의식이 없다고 생각한 박지훈은 마음속에 숨겨둔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어차피 정하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어 있을 테니까. 영원히…
하지만 박지훈은 자신의 말이 침대에 누운 정하윤의 분노를 더욱 들끓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모든 게 박지훈, 그 인간이 꾸민 짓이었어!'
3년 전, 정하윤은 박지훈의 초대를 받고 결혼 4주년 기념일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그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녀는 그저 우연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박지훈이 의도적으로 꾸민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교통사고로 정하윤은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지만, 그녀와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박지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의식을 잃기 직전 그녀가 가장 친한 친구 이유라에게, 자신이 없으면 박지훈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년은 그녀의 부탁대로 박지훈을 정말 잘 돌봐줬다. 침대 위에서.
'절대 용서 못 해!'
정하윤은 박지훈을 위해 자신이 해왔던 모든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한때 그녀는 국제 마피아 조직의 아가씨였다.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고, 다섯 명의 오빠들은 그녀를 공주처럼 아끼고 보호해 줬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지녔던 그녀는, 비록 여자였지만 마피아의 '대부' 인 아버지에게서 큰 기대를 받으며 다음 후계자로 지목하고 키웠다. 오빠들 역시 그녀가 마피아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왔다.
하지만 정하윤은 박지훈을 위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가족들과 등을 돌리고 이 작은 강성으로 왔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재능까지 모두 쏟아부어 회사를 일으켜 세웠고, 박지훈의 집안 전체를 가난에서 끌어 올려 놓았다.
그런데 박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어떻게 대했을까?
그들은 그녀에게 부모도, 형제도 없다고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박지훈의 어머니는 그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하녀처럼 부려먹었다.
정하윤은 예전에는 그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띠링 띠링!"
그때, 박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불쾌한 기색으로 이유라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전화를 확인했다. 발신자를 본 순간, 박지훈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잘됐어, 유라야. 연회가 곧 시작될 거야!" 3분 후, 통화를 마친 박지훈은 흥분한 얼굴로 이유라의 앞에 섰다.
"회사 임원들이 오빠 제안을 받아들인 거야?" 소식을 들은 이유라는 박지훈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맞아! 저 꼰대들이 드디어 동의했어. 오늘 밤 연회에서 내가 정하윤의 자리를 대신할 거라고 공식 발표할 거야. 지난 몇 년간 지고지순한 남편인 척 연기한 보람이 있군." 박지훈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회사 임원들은 한때 정하윤을 따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지훈 오빠, 축하해. 그럼 내 일은…" 이유라는 박지훈의 품에 기대어 물었다.
"걱정 마. 내가 약속한 일, 절대 잊지 않아. 정하윤의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 바로 너랑 결혼할 거야." 그는 이유라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빛은 한층 사나워졌다.
"그때가 되면… 정하윤 같은 쓸모없는 건 더 이상 살 필요도 없겠지."
"지훈 오빠, 진짜 최고야!" 이유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날이 왔어.'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행복한 부부처럼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병실 한쪽에 누워 있던 정하윤의 몸이, 서서히 그리고 점점 더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증오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으며 피를 끓게 만들었고, 흐릿하던 의식은 점점 더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몸의 감각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드디어!
"번쩍!" 차갑게 가라앉은 병실 안에서, 정하윤은 핏발 선 눈을 번쩍 뜨었다.
그녀가, 드디어 깨어났다.
회차 2
세인트 호텔, 화려한 연회장.
"이제 큰 박수로, 박씨 그룹의 박 대표님을 모시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사이, 박지훈은 비서 이유라를 대동하고 연회장에 들어섰다.
강성 최고의 호텔에서, 최고 그룹인 박씨 그룹이 주최한 이번 연회에는 강성 재계의 거물들이 모두 모였다. 여기에 박씨 그룹의 주요 협력사 대표들까지 자리를 채우며 연회장은 더욱 화려해졌다.
이처럼 성대한 자리는 박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이사를 발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박 대표님, 정말 잘생기지 않았어요?"
"얼굴도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고, 저렇게 완벽한 남자가 3년 동안 식물인간 아내를 위해 수절하고 있다니요. 게다가 아내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랐다던데요."
"그녀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그럴 만하죠. 3년 전 국내 최고의 의학 박사인 박허준 교수도 가망이 없다고 했잖아요. 박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그 여자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연회장 곳곳에서 여자들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칭찬에 박지훈은 가슴을 활짝 펴고 연회장을 둘러봤다.
그때 이사회 대표 이사 김성우가 성큼성큼 박지훈 앞으로 다가와,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발표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박씨 그룹의 전 대표이사 정하윤 대표님께서 3년째 병상에 누워 계신 관계로, 이사회는 새로운 대표이사를 선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대표이사는 바로…"
한창 말을 이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소리가 김성우의 말을 끊었다.
휴대폰을 꺼낸 박지훈은 발신자가 병원 직원인 것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표님, 정하윤 사모님께서 방금 의식을 되찾으셨습니다. 언제쯤 병원에 오실 수 있을까요?"
"뭐?" 박지훈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정하윤이 깨어났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박지훈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김성우를 향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은 전화였습니다. 김 대표님, 계속 진행하시죠."
'내가 무사히 경영권만 손에 넣으면, 정하윤이 깨어나도 이미 늦었어.'
김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발표를 이어갔다. "이사회 대표인 저는 박지훈 씨를 박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이사로 임명합니다!"
"좋습니다!"
연회장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 대표님, 경영권 양도 계약은 언제 체결하면 될까요?" 정하윤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박지훈은 다급하게 재촉했다.
김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박 대표님, 계약은 오늘 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이 아니면 대체 언제죠?" 박지훈의 안색이 굳어졌다.
"계약 체결은 3일 후 기자회견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때 전 국민에게 공식 발표할 계획이고, 오늘 연회는 미리 알려드리는 자리일 뿐입니다."
김성우의 대답이 박지훈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연회장을 떠나 차에 오른 박지훈은 운전석에 앉는 순간, 속았다는 기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핸들을 "쾅!" 하고 내리쳤다.
"지훈 오빠, 왜 그래?" 이유라가 영문을 모른다는 듯 물었다.
"경영권은 아직 손에 넣지 못했는데, 정하윤이 먼저 깨어났어." 박지훈은 어두운 얼굴로 시동을 걸었다. "병원에 가서, 정하윤부터 안심시켜야겠어."
병원, 병실.
"하윤아, 이제 막 깨어났으니 의사 말 잘 듣고 몸부터 챙겨야 해. 배고프지? 우선 뭐라도 좀 먹어. 회사 일은 전부 내가 맡을 테니까, 넌 병원에 있으면서 마음 편히 요양만 해."
정하윤은 침대에 누운 채, 눈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의 침대 옆에서 자극을 찾아 불륜을 저지르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을 의식이 있는 채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대 그런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윤아, 방금 의사 선생님이랑 상담했는데 아직 몸이 많이 허약해서 전자기기는 만지면 안 된대. 회복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대."
박지훈은 말을 마치자 TV를 끄고, 정하윤의 코를 살짝 건드리며 다정한 얼굴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휴대폰도 만지면 안 되는 거 알지? 몸에 좋지 않으니까 며칠만 더 참아. 응?"
경영권 양도 계약을 무사히 체결하고 회사의 새로운 대표이사가 되기 전까지, 정하윤이 외부와 연락하는 것은 절대 막아야 했다.
또한 회사 사람들에게도 정하윤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그가 해온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맞아 하윤아, 박 대표님 말씀이 맞아. 지금은 몸 회복이 제일 중요해. 회사 일은 박 대표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유라도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눈가에 존재하지도 않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하윤아, 네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3년 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박 대표님도 네가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매일 침대 옆에서 네 이름을 불렀어…"
만약 3년 전의 정하윤이었다면, 이 말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정하윤은,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3년 동안… 사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회차 3
정하윤의 한마디에 박지훈과 이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설마… 정하윤이 식물인간이 된 뒤에도 진짜 혼수상태에 빠진 게 아니라, 의식을 잃지 않은 채 모든 걸 듣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몇 시간 전, 우리가 병실에서 바람을 피운 것까지도…?'
두 사람의 당황한 표정을 본 그녀는 더욱 차갑게 비웃었다.
"다만 그게 꿈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너희 목소리를 들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 식물인간이 된 뒤로는… 의식이 계속 흐릿했거든."
정하윤은 다시 입을 열어 두 사람의 의심을 거두게 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 그들이 저지른 불륜을 폭로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들춰내 봤자, 저 인간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였으니까!
그녀는 박지훈을 하늘 끝까지 떠받들 수도 있었고, 지옥 끝까지 걷어차 줄 수도 있었다.
그제야 박지훈과 이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나 봐.'
"괜찮아, 하윤아. 중요하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으면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지 마.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깨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해." 박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박 대표님, 하윤이가 방금 깨어나서 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지금은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유라도 서둘러 말을 보탰다.
정하윤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허둥지둥 핑계를 늘어놓으며 병실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
'멍청한 것들. 내 휴대폰을 빼앗았다고, 내가 외부와 연락을 못 할 줄 알았나? 웃기고 있네.'
만약 이유라가 아직 병실에 있었다면, 정하윤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정하윤은 아무렇지 않게 이유라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풀고, 오랫동안 걸지 않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번호로 마지막 전화를 걸었던 건 7년 전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아직 조직을 떠나기 전이었다.
"뚜! 뚜! 뚜!"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자,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하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라파엘, 나 기억해?"
"아가씨!!" 휴대폰 너머에서 라파엘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단 한마디의 목소리만으로, 라파엘은 정하윤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단 한 사람의 힘으로 전 세계 암흑가를 뒤흔들었던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가 아니라면, 저런 기세를 가질 수 있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벌써 7년입니다! 7년 전, 아가씨께서 행적을 감추신 뒤로 저희는 도저히 아가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마피아는 아가씨가 계시지 않아, 거의 조직이 무너질 지경입니다. 이제는 백호 같은 작은 조직들마저도 감히 저희를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정하윤은 눈을 내리깔고,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모두에게 알려. 나 정하윤이, 마피아에 공식적으로 복귀한다고!"
자발적으로 자취를 감추고 7년 동안 사라졌던 마피아의 아가씨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그날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한편, 유럽.
유럽에서 가장 신비롭고 오래된 군수 가문. 현재 세계 1위로 꼽히는 군수 가문이자, 국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들의 위세는, 결코 마피아에 뒤지지 않았다.
국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한씨 가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씨 가문, 가주의 서재.
군복을 입고 19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차갑고 오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잘생긴 얼굴에 중세 시대 벽화에 나오는 고대 신의 조각상처럼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한시혁은 평소와 다름없이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가주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부하의 목소리가 한시혁의 생각을 끊었다.
"들어와."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부하는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기쁜 소식을 보고했다. "가주님, 드디어 정하윤 아가씨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한시혁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얇은 입술을 깨문 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A국 강성시입니다."
대답을 들은 한시혁은 품속에서 늘 지니고 다니던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사진 속에는,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가 담겨 있었다. 그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소유욕이 번뜩였다.
"7년이야… 하윤아, 드디어… 널 찾았어. 이번엔 절대로, 내 곁에서 떠나게 두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