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심예은은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이대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건 너무 무의미하니.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더니 곧바로 권유리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혼하면 서운길 재산을 절반이나 차지할 수 있는 거야? 세상에! 그러면 우리 예은이 부자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심예은과 서운길은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었다. 두 사람이 이혼을 결정했을 때, 심예은은 위자료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그러면 왜 이혼하겠다는 거야? 그냥 재벌 사모님으로 지내!"

심예은은 전날 밤 서운길이 그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고 난폭하게 대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심예은은 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의 순진했던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라면 어떤 힘든 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참고 또 참으면, 서운길은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대답은, 아니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였다면,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심예은은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지난번에 내가 부탁했던 일은..."

"그래, 내가 그것 때문에 전화했었지. 일자리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던 거, 내가 아주 너한테 딱 맞는 일자리를 찾아냈어. 학생들한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건 어때? 네 재능을 낭비하는 일인 것 같은 감이 조금 들지만..."

"좋아." 심예은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 낭비라고 할 수 없어. 3년째 바이올린에 손도 안 대고 주부 생활만 해 왔는데, 누군가 나를 고용하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야."

"낭비가 아니라니? 너 국제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입학할 수도 있었어. 결혼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권유리가 씩씩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심예은은 서운길과 결혼한 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옛날의 폐쇄적 사상을 그대로 갖고 있는 재벌 가문의 규칙 때문이었다.

3년 전, 심예은의 바이올린 경력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서씨 가문의 엄격한 전통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대중 앞에서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서운길과 결혼한 첫날, 시어머님은 그녀에게 통보하듯이 말했다. "오늘 이후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운길이 널 먹여 살릴 수 있으니. 너의 의무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 서씨 가문의 대를 잇고, 남편을 잘 보필하는 아내 역할로 충분하다."

권유리와 통화를 마친 후, 심예은은 방에 올라가 서재에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바이올린을 꺼냈다.

이 바이올린은 그녀의 18살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해 준 특별한 바이올린이었다.

안타깝게도 생일이 지나고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큰 오빠가 가문을 물려받았고, 그녀가 아무 걱정 없이 바이올린 꿈을 쫓을 수 있게 도와줬다.

심예은은 추억을 회상하며 천천히 활을 움직였다.

몇 년 전 사고로 손목까지 다친 후, 그녀는 더 이상 바이올린을 만지지 않았다. .

활을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악보를 떠올리며 통증을 참고 끝까지 연주를 마쳤다.

연주를 마친 그녀는 쓴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연주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때, 문 앞에서 장 아주머니의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침 일찍 서운길이 돌아온 모습을 본 장 아주머니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그가 집에 돌아왔다는 건 아직 심예은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심예은이 조금 더 고분고분하면 두 사람의 사이도 더욱 좋아질 것이다.

서재에서 장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심예은도 깜짝 놀랐다. 서운길은 대낮에 신혼집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내려놓자마자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문에 기대선 서운길의 키는 거의 문 높이에 가까웠다. 그가 눈살을 깊게 찡그리고 심예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심예은이 유명한 선생님으로부터 재능을 칭찬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이후 어떤 이유 때문인지, 심예은은 더 이상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았다.

방금 문밖에서 그녀의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은 서운길은 그녀의 연주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재능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심예은은 문에 기대선 서운길을 흘깃 쳐다보고 바이올린을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물건 가지러 왔어. 내일 할머니 뵈러 본가에 가야 한다는 거 잊지 마." 서운길의 목소리에서 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씨 가문은 매달 한 번 서씨 노부인을 방문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내일이 바로 그날이다. 서운길은 아무 이유 없이 절대 신혼집에 먼저 발을 들이지 않았다.

만약 그와 심예은이 동시에 본가에 나타나지 않으면, 서씨 노부인 서향순은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심예은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서씨 가문의 규칙은 서운길보다 그녀가 더 잘 기억하고 있었고, 여태껏 한 번도 규칙을 어긴 적 없었다.

심지어 가문에서 제일 엄격한 노부인 서향순마저 그녀의 잘못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도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심예은의 태연한 태도와 말투는 마치 그를 비난하는 것 같았고, 눈빛은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낀 서운길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지만, 심예은은 항상 그의 옷을 깨끗하게 씻어 다림질까지 하고 정리해 두었다.

심예은은 이 집에서 자기 역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장 아주머니는 그녀보다 더 잘했다.

유일한 장점이라면 그녀가 장 아주머니보다 젊고 예쁘다는 것밖에 없으니.

서운길의 움직임에 따라 옮겨가던 눈빛이 그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약지에 있어야 할 결혼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심예은은 날카로운 비수에 심장이 찍힌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운길 씨, 우리 이혼해요." 그녀의 입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평소 안부를 묻는 목소리처럼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이 말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온몸의 힘을 모두 쥐어 짜냈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내뱉고 나니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뒤돌아선 서운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더니 비웃듯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다. "잘 생각하고 말해야지. 심씨 가문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잊었어? 내 투자마저 없다면, 이혼하고 형님이랑 길바닥에 나앉을 거야?"

심씨 가문이 몰락한 이래로, 심예은은 심씨 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공주에서 서씨 가문에 빌붙어 사는 신데렐라가 되었다.

서씨 가문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 그녀와 그녀의 오빠를 영원히 떨쳐낼 수 없는 더러운 거머리인 것처럼 얕잡아 보기까지 했다.

게다가 서운길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유흥업소의 아가씨라도 된 것 같은 굴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유흥업소 아가씨는 고객을 선택할 수 있는 자격까지 주어지지 않았던가.

심예은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집은 이미 알아봤어요. 길거리에 나앉아도 그건 제 선택이에요."

그녀는 단지 서운길의 존중만 바랐을 뿐이다. 지난 3년 간의 감옥 같은 결혼 생활로 그녀의 자존심과 존엄이 완전히 무너졌다.

"전세 돈은 어디서 구했지? 그렇게 이 집을 떠나고 싶다면, 서씨 가문의 돈은 쓰지 말았어야지."

서운길은 심예은에게 등을 돌린 채 틈 사이에 떨어진 결혼반지를 찾아 꽉 움켜쥐었다. 심예은은 미처 그런 그의 행동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심예은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집은 그녀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구한 것이다. 하물며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사이니, 그녀의 재산은 당연히 서운길의 재산이어야 하는 걸까?

게다가 서운길이 그동안 심씨 가문에 투자한 금액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사람에게 빚지기 싫어하는 심예은은 하필이면 서운길에게 진 빚이 제일 컸다.

만약 두 사람이 정말 이혼하게 된다면, 서운길은 더 이상 심씨 가문에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그는 그녀가 몸만 나가길 바라는 건가?

서운길이 떠나려는 것을 본 심예은은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을 꼭 붙잡고 입을 열었다.

"당신과 결혼한 이상, 제 신분도 법적으로 정당한 자격을 갖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위자료 한 푼도 요구하지 않을 거니까. 그저 심씨 그룹이 이번 위기만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줘요."

자리에 멈춰 선 서운길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턱을 조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화났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심예은은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아직 그의 화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의 눈빛이 그녀의 몸에 닿아 있는 순간마다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리자, 서운길은 주저 없이 휴대폰을 꺼내며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운길 씨!"

회차 3

서운길은 이제 짜증이 극에 달했다. "돈이 필요한 거라면 회사 재무를 찾아가면 될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심예은은 빠르게 그의 말을 반박했다.

서운길은 그녀의 말을 완전히 오해한 듯했다.

빠르게 쫓아 나간 심예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서운길 씨, 저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그 말과 동시에 위층으로 올라가던 서운길이 자리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렸고, 그의 휴대폰 벨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키가 190에 가까운 서운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심예은, 밀당 기술을 좀 더 배워보는 건 어때? 진짜 이혼할 생각이라면 내가 아닌 할머니와 상의했어야지. 그럴 용기조차 없으면 더 이상 내 앞에서 이혼이라는 단어 꺼내지 마."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심예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댄 채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무능한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서향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서운길과 심예은은 거의 반 강제로 결혼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정말 이혼할 생각이라면, 서운길이 아닌 서향순을 찾아가 말을 꺼내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운길과 다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알량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말을 꺼낸 이유도 그를 진정한 남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었으니. 바로 서운길은 단 한번도 그녀를 아내로 생각한 적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이혼을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노부인 앞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를 꺼릴 뿐이지. 방금 마지막 그 말은 심예은더러 할머니를 찾아가서 말하라고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서운길과 이혼할 생각이라면, 반드시 서향순을 설득해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심예은은 드디어 서향순을 만나러 갈 준비를 마쳤다.

엄격하고 권위적인 서향순은 가문에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서씨 가문 사람이라면 모두 그녀의 말에 복종해야 하며, 불복종은 용납되지 않았다. 유독 심예은만이 그런 노부인과 조금 가깝게 지냈다.

심예은이 서운길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서향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서운길을 제대로 보살피고, 서씨 가문을 잘 돌본다면 서향순은 아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서운길의 신경이 다른 여자에게 향할 때마다, 심예은은 질투에 눈이 멀어 당장이라도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서운길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집을 나서려 할 때, 그녀의 오빠 심문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전화를 건 사람은 심문호의 비서로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나 있었다. 심예은이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예은은 계단 아래에 서서 휴대폰만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오빠는요?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어젯밤 대표님께서 업무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대표님께서 먼저 집에 돌아가려 했으나, 김영진 씨가 굳이 대표님과 함께 온천에 가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자리에 얼어붙은 심예은은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 사람은 오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김영진 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큰형님이 서씨 가문 운전기사로 일했다는 것만 믿고 어찌나 기고만장한지. 아가씨, 빨리 오세요. 대표님께서 지금 수술 받고 계시는데, 의사가 두 번이나 목숨이 위험하다고 했어요. 더 이상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아가씨께 전화 드리는 겁니다."

비서가 흐느끼며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급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그는 절대 먼저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예은은 잘 알고 있었다.

심문호는 회사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심예은에게 알린 적이 없었다.

비서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흔들린다는 건, 어쩌면 심문호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한다.

심예은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나고, 누군가에게 목이 졸리는 느낌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올 때, 미처 손잡이를 잡지 못한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발목이 심하게 삐었다. 극심한 고통에 이성을 되찾은 그녀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어머! 사모님, 조심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장 아주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심예은을 부축했다.

장 아주머니의 팔을 움켜쥔 심예은의 두 눈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할 말이 있는 듯 입만 버금거릴 뿐, 한참 후에야 목소리가 나왔다.

"오빠가... 오빠가... 지금 병원 수술실에 있대요. 빨리 오빠 만나러 가야겠어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챈 장 아주머니가 곧바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사모님 너무 급해하지 마세요. 지금 바로 기사님께 병원으로 모시라고 할게요."

줄곧 서씨 가문 노부인을 보필해 온 장 아주머니의 일 처리 방식은 나무랄 곳 없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급 세단이 저택 앞에 나타났다.

다급하게 차에 올라탄 심예은은 장 아주머니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주머니, 할머니한테 말씀드리지 마세요. 괜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심예은의 마음 씀씀이에 장 아주머니는 바로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경황없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서향순을 걱정하는 마음이라니.

이렇게 좋은 아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지 못할 것이다.

"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빨리 심 대표님이 계시는 병원에 가셔야죠."

심예은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심문호는 금방 수술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심문호의 몸에 가득 꽂혀있는 의료기기를 본 순간, 비서는 거의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심예은이 도착했을 때, 비서는 움푹 패인 눈으로 벽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심예은은 왜 심문호를 더 잘 지키지 못했냐고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심문호의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심예은은 비서를 밖으로 불렀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세요."

비서는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아가씨, 대표님은 아가씨가 회사 일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예요. 아직도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가 되길 바라는 거예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심예은이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려 했다.

"아가씨,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절망감으로 가득 찬 비서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회장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대표님께서 홀로 심씨 그룹을 일궜다는 사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표님은 아가씨가 서씨 가문에서 지내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내길 바라며 회사를 지켜온 겁니다."

지난 3년 동안, 심문호는 심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서운길의 지원이 없었다면, 심씨 가문은 일찍이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심문호는 심예은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며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녀는 결국 남편의 존중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심예은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녀의 능력으로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깊게 심호흡하고 물었다. "내가 서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사실은 아직도 비밀인가요?"

만약 그녀가 서씨 가문 며느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심문호는 서씨 가문을 등에 업은 셈이니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표님께서 그 사실은 입에 올리기도 싫어합니다. 혹시라도 아가씨가 서씨 가문에서 지내기 더 힘들어질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심예은은 쓴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이 결혼에서 심예은은 단 한번도 서운길과 동등한 관계에 선 적이 없었다.

그러니 서운길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녀도 이런 자신이 싫증 날 지경이었으니.

불과 한 시간 전, 당찬 목소리로 서운길에게 이혼을 요구하던 그녀가 지금은 서운길의 이름을 빌어 심문호가 더 잘 지낼 수 있길 바라고 있으니.

"오빠한테 난 서씨 노부인이 직접 고른 서씨 가문의 사모님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이것 하나만으로 서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니까!"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심예은은 곧바로 서운길의 쌀쌀맞은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옆에는 가녀린 몸에 순진하게 생긴 얼굴을 한 여자가 대놓고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서운길의 경멸 어린 눈빛은 심예은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심예은은 진심으로 이혼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장이라도 그를 떠나겠다고 한 여자가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서씨 가문의 사모님이라고 당당하게 외쳐대고 있었으니.

그녀가 이혼을 제기한 이유는 단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계략에 불과했고, 보통 연인들이 밀당을 부리는 수작일 뿐이었다.

애당초 비열한 수단으로 그에게 약을 타서 결혼에 성공한 심예은이 당장이라도 쓰러져가는 심씨 가문을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빽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매년 심씨 그룹에 200억씩 투자하곤 했다. 심예은이 아무리 멍청해도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대가로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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