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운성시 공항 대기 장소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서도희, 그녀의 바로 옆에는 커다란 캐리어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린 지 벌써 30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1년 전에 스피드 결혼을 한 남편.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오늘이 첫 만남인데, 남자가 준 첫인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참... 무례하네. 시간 약속 정도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도희는 급하게 마무리 된 이 결혼을 돌이켰다.

1년 전 그녀의 할아버지가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몸이 편찮아졌다. 당시 해외에 있었던 그녀는 할아버지를 뵙기 위해 황급히 귀국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녀를 보자마자 제기한 요구가 바로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일 줄이야!

서도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자신을 고아원에서 입양해 애지중지 키워준 은혜를 고려해서 그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곧 할아버지가 점 찍어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실제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자와 말이다.

결혼식 당일, 신랑은 참석하지 않았다. 혼인 신고도 다른 사람이 처리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이름, 그리고 그가 사업가라는 것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서도희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가끔 자신을 의심할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소위 남편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그녀에게 그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는 시계를 또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10분이 더 지났다.

그녀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끽 하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찌를 기세로 울려 퍼졌다.

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그녀 앞에서 급정거했다. 이윽고 운전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서도희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낯익은 얼굴을 본 그녀는 대뜸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운전석에는 그녀의 사촌 오빠인 조인섭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공항에 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야! 그렇게 말하면 오빠 너무 서운한데?" 조인섭은 진짜로 상처를 받은 척하며 가슴을 움켜 쥐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우리 예쁜 동생이 돌아왔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어? 오빠로서 당연히 직접 모시러 와야지. 근데 오빠한테 그렇게 서운한 말을 하다니! 나 너무 똑땅해!"

그의 심한 투정에도 서도희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흘기며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희야, 타. 배도 고프고 피곤할 거 아니야. 내가 점심 사줄게." 조인섭은 한 손으로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도희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를 차에 태웠다.

"잠깐만! 오빠!" 서도희가 말했다.

"왜?" 조인섭은 그대로 멈춰선 채 물었다.

잠시 후 그는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아, 네 남편? 설마 그 사람 기다리려고?"

서도희는 비록 대꾸를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표정이 속내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인섭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정신 차려, 서도희. 결혼한 이후로 너한테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었잖아. 그거면 말 다 한 거 아니야?"

서도희는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널 데려올 거였으면 나보다 먼저 왔겠지. 1년 동안 널 무시한 놈인데,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는 거야?" 조인섭은 조금 더 냉소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서도희는 잠깐 침묵한 후,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신재열 씨가 나 데리러 올 거라고 그러셨어."

그녀는 신재열이 할아버지와 한 약속은 최소한 지킬 것이라 생각했다.

조인섭은 콧잔등을 붙잡고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정 기다리려면 차에 타서 기다려. 더위 먹겠다. 얼른."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한 훤칠한 남자가 사람들 무리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신주원은 한창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금 공항이에요. 얼른 약 드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마, 도희가 오늘 붉은 드레스를 입었대. 그리고 긴 파마머리에, 캐리어는 검정색..."

"이미 찾았어요, 할머니. 걱정 마세요."

신주원의 시선은 그로부터 2미터 떨어진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니의 설명에 딱 들어맞는, 캐리어 색상마저 일치한 여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한 남자의 품에 안겨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신주원의 말투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끊을게요, 할머니. 나중에 얘기해요."

신주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서도 어두운 빛이 번뜩였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

자신의 차에 탄 신주원은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꽉 잡은 채 스포츠카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매너 있게 여자한테 물 한 병을 따 주었다. 그러고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을 마시는 여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는 신주원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속에서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예상하고 있어야 했다.

소위 그의 아내라는 이 여자는 결혼 후 1년 동안 타지에 있었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통화조차 해본 적 없었다. 애인이 생겼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신주원의 주변에는 차갑고 무서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입력했다.

문자를 보낸 후, 그는 시동을 걸고 전속력으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

그날 오후 늦은 시각, 서도희는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밝은 색의 정장을 입고 영광그룹으로 향했다.

영광그룹은 운성시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으로, 재직중인 직원들도 모두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도희는 그룹의 웅상한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그녀는 회사의 CEO인 신주원의 개인 비서로 취직하게 되었다.

홍보 부서 담당자인 강유미가 서도희를 데리고 신주원에게로 향했다.

서도희는 몰랐으나, 앞으로 그녀와 일을 함께 하게 될 상사 신주원이 바로 그녀의 남편, 신재열이었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신주원은 매의 눈으로 사람을 지켜보며 쉽게 그의 믿음을 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리하여 혼인 신고를 할 때에도 본명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의 본명이 신재열이라는 것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

회차 2

서도희와 강유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도중에 강유미는 친근한 태도로 서도희에게 회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최상층 전체가 CEO 사무실이에요. 대부분 직원들은 넘볼 수도 없는 성역이죠. 직접 보고할 일이 있거나, 매우 중요한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누구도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어요."

서도희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상사에 대한 사전 정보는 많을수록 좋기 때문에, 서도희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감사히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강유미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서도희를 돌아보며 가볍게 물었다. "전에 영광그룹의 해외 지사에서 근무했었다고 들었어요. 갑자기 본사로 전근된 이유는 뭔가요? 혹시 신 사장님과 아는 사이세요?"

강유미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분명 가십거리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

영광그룹 역사상 낙하산 직원 기록은 없었다. 사실 회사에 입사하여 정식 직원이 되기까지는 엄격한 절차와 쉽지 않은 시험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서도희는 그 기록을 깬 첫 사람이었다.

회사 다른 직원들은 서도희의 신분 배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었다. 서도희는 직접 사장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 그 이유에 대해 강유미는 무척 궁금해했다.

신주원의 직원 채용 기준이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이력서 제출 단계에서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탈락되곤 했다.

서도희는 강유미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녀는 강유미의 사원증을 흘끗 바라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홍보팀의 기본적인 직업 교육에는 말하는 법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봐요?"

그녀는 강유미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도희가 말을 마치자마자,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서도희는 강유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에 강유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서도희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런 예의 없고 뻔뻔스러운 여자를 봤나! 신인 따위가 선배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두 사람은 CEO 사무실 밖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잠시 후, 강유미가 시계를 살펴보더니 구석으로 가서 전화 한 통을 걸었다. 통화를 마친 다음, 그녀는 서도희에게 다가가 말했다. "신 사장님 지금 오시는 중이에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서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강유미가 태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신 사장님이 왜 늦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방금 전 서도희의 태도에 여전히 앙심을 품은 강유미는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기강을 바로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도희는 상사 개인 사정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강유미는 쉽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장님 부인께서 오늘 귀국하셨거든요. 공항에 마중하러 가느라고 업무를 모두 제쳐두셨어요. 너무 다정다감한 남편 아닌가요?"

강유미는 몽환적인 눈빛으로 팔짱을 낀 채 동경과 아쉬움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일찍 결혼하신 게 너무 아쉬워요. 사장님 부인은 정말 운도 좋으시죠. 어떤 여자분일지 궁금하네요."

그녀의 말에 서도희는 방금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순간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악마라고 불리우는 상사 신주원도 애처가 이미지인데 그녀의 남편 신재열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오전에 공항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힘들게 기다렸는데 결국 "바빠서 올 수 없다"는 문자만 툭 보내고 끝인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야! 영광그룹의 CEO보다 바쁘다는 게 말이 돼?'

갑자기 엘리베이터에서 띵 하는 알림 소리가 들렸다.

강유미는 재빨리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서도희를 끌어당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자 맞춤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다리가 길쭉하고 늘씬해서 보폭이 매우 넓었다. 또한, 어깨는 넓고 허리는 얇았다. 각진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마치 근육질의 핫한 모델 같았다.

서도희는 그의 키가 최소한 190cm는 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가 뿜어내는 우아한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강유미의 목소리에 서도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는 해외지사에서 전근해 온 서도희라고 합니다."

그 이름에 신주원은 한 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익숙한 이름 같은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미묘한 혼란스러움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곧장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무실 안에서 얘기하죠." 그리고 저벅저벅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도희는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신주원은 책상 앞에 앉아 손에 든 이력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작년에 지사에서 큰 성과를 따낸 서도희를 홍보팀 직원 겸 개인비서로 특별히 채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회사의 명성에 흠이 갈 뻔한 일이 생겼을 때마다 뛰어난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작성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주원은 이력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써 있네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사무실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서도희는 그의 첫 번째 질문이 디자인에 관한 질문일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할 줄 압니다."

신주원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주시하면서 계속 질문했다. "이력서에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추가한 이유는 뭐죠?"

사실, 서도희는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자신 있게 대답했다. "회사에서 지금 의류 쪽의 시장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개인비서로서 홍보, 마케팅 등 여러 방면에 미적 감각을 가져야 하며 사장님 본인 및 회사 이미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리스크를 대비할 수 있는 유용하게 활용 가능한 초안 몇 가지를 부록에 추가했습니다."

신주원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력서를 책상 한 쪽 구석에 툭 던지고 강유미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인수인계 부탁해요. 앞으로 할 작업을 좀 할당해 주세요."

강유미는 깜짝 놀랐다. '면접이 이렇게 빨리 끝났어?'

강유미는 불만 가득한 심정이었으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서도희는 사무실을 나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꽉 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치자 안에는 식은 땀이 흥건했다.

CEO의 차갑고 엄숙한 얼굴을 떠올리자 그녀의 불안감은 다시 한번 엄습해왔다.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회차 3

강유미는 서도희를 부서로 안내했다.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여러분, 주목하세요! 이분은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게 될 서도희 씨예요."

서도희는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부서의 일원이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도희의 빠른 입사에 충격을 받은 직원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신 사장님 밑에서 개인비서로 채용된 그 사람인가 봐요? 미인이네요. 머리도 외모만큼 출중할지 궁금한데..."

"글쎄요. 사장님의 사람 보는 안목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분명 일도 잘할 거예요."

"전 사실 너무 질투나요. 사장님과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잖아요. 너무 부러워요!"

이 모든 말들이 서도희의 귀에 다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반면 강유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서도희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한 발언들은 그녀의 불만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신주원이 일반적으로 엄격한 면접 과정을 통해 직원을 채용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그녀는 신주원이 서도희에게 얼마나 관대한 태도를 보였는지 목격했다.

강유미는 서도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이 신입이 얼굴만 있고 실속이 텅 빈 여자라고 확신하며 반드시 그녀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리라고 다짐했다.

강유미는 즉시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서도희에게 현재 가장 어려운 업무를 맡길 생각이었다.

"자, 사장님께서 도희 씨에게 처음으로 맡기신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 손에 있는 프로젝트는 다 마무리 단계라서 도희 씨를 끼워 넣기 그러니까 여기 이거, 연회 배경음악에 관한 사항이 아직 확정이 되지 않았어요. 한 번 해 봐요."

강유미는 서류를 든 채 덤덤하게 말했다. "상대 고객과 원활한 소통을 거쳐 적절한 음악을 최대한 빨리 확정하면 됩니다."

서도희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배경 음악의 선택은 연회 준비에 있어 가장 간단한 일들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은 것이 뭔가 수상했다.

강유미는 서도희를 괴롭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서류를 툭 던져주면서 말했다. "상대 고객이 직접 올 거예요. 만나면 다 알게 될 겁니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곧장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서도희는 어깨를 으쓱할 뿐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서류를 훑어보면서 조용한 곳을 찾던 그녀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사무실 안은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다.

"저 신입 큰일났네요. 홍제천은 결코 다루기 쉬운 상대가 아니잖아요.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변태 끼도 있잖아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네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저 행운을 빌어줘야죠."

——

회의실 안에서, 서도희는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와 만날 고객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가 만날 고객은 홍제천이라는 피아니스트였다. 회사 경영진은 곧 다가올 창립 30주년 기념 파티에서 그의 피아노 곡을 사용할 의향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양측은 아직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서류의 마지막 장까지 다 보았을 때, 회의실 문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캐주얼한 청바지와 셔츠 차림에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가 들어왔다.

서도희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홍제천 씨.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서도희입니다. 다가오는 창립 기념일 파티에 홍제천 씨의 곡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협의에 관한 논의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앉으시죠."

"알겠습니다." 홍제천은 대답과 함께 그녀의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등을 여유롭게 기대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서도희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의자를 조금 뒤로 옮겼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피아노 곡 사용과 관련하여 동의를 하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 측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조율하겠습니다."

홍제천은 그녀의 온몸을 훑어볼 뿐, 침묵을 지켰다.

서도희의 등골은 순식간에 오싹해졌다. 그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현재 전국 투어를 준비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저희 회사에게 홍제천 씨의 시간을 빼앗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표시로 파티장에서 투어 홍보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홍제천은 잠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그는 그녀를 흘끔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서도희는 준비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조항에 문제가 있으면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홍제천은 서류에 눈길 한 번도 주지 않고 뒤로 몸을 젖힌 채 깍지를 낀 두 손에 머리를 기댔다. "난 뭐 읽는 거 안 좋아해요. 게다가 계약서는 너무 어려운 말들도 많으니까 굳이 읽을 생각 없습니다."

그의 말에 서도희는 난감해졌다.

"가까이 와서 직접 좀 읽어줄래요?" 홍제천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도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수년간 홍보 부서에서 일했던 그녀는 온갖 이상한 요청을 하는 고객들을 수도 없이 만나왔다. 고객에게 계약서를 직접 읽어주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서도희는 여전히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윗몸을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로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서류를 향하고 있었으나, 홍제천의 뜨거운 눈빛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도희는 등을 곧게 펴고 읽고 있는 내용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홍제천이 갑자기 몸을 기울였다.

서도희는 본능적으로 그를 피했다.

그러자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가까이 몸을 기댔다. "목걸이 예쁘네요. 촉촉한 피부랑 잘 어울려요."

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목을 만지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서도희는 그의 손을 쳐내고 싶었으나 최선을 다해 분노를 가라앉혔다. 대신 그녀는 몸을 뒤로 뺀 채 혐오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드시면 새로 하나 주문해서 미팅 후에 당신의 회사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 다시 일 얘기로 돌아가도 될까요?"

홍제천의 손은 공중에서 멈칫했고, 이내 그는 피식 웃었다. "영광그룹은 나랑 협력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난 바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위협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협상은 없던 일로 하죠." 신주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서도희 앞에 서서 홍제천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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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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