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원장님은 나를 방 안으로 떠밀었다. 자살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VIP 환자를 처리하라는 거였다. 그녀의 이름은 한세라. 약혼자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유명 패션 인플루언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눈물 흘리며 보여준 사랑하는 남자의 사진 속에서, 내 세상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내 2년 차 남편, 현우 씨였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그를 내가 발견했고, 그는 다정한 건설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초고층 빌딩 앞에 서 있는 냉혹한 재벌 총수, 권지혁이었다.
바로 그때, 진짜 권지혁이 걸어 들어왔다. 내 연봉보다 비싼 명품 수트를 입은 채로.
그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스쳐 지나가 한세라를 품에 안았다.
"자기야, 나 왔어."
내가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그가 내게 속삭여주던 그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다시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약속해."
그는 내게도 수백 번이나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오직 그녀만을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오직 단 한 명의 관객, 바로 나를 위한 연극이었다. 기억을 잃었던 시간 동안의 우리의 결혼 생활, 우리의 모든 삶이 철저히 묻어버려야 할 비밀이라는 걸 보여주는 잔인한 연극.
그가 그녀를 안고 방을 나설 때, 그의 차가운 눈이 마지막으로 나와 마주쳤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넌 이제 지워져야 할 오점일 뿐이야.'
제1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건 한 여자의 비명이었다. 고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순수하고 절제되지 않은 분노, 주변 공기마저 숨 막히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광기였다.
익숙한 소독약과 낡은 서류 냄새가 복도 끝에서 터져 나오는 혼돈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나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에요?"
불안한 듯 자기 사무실 밖을 엿보던 동료 민지 선배에게 물었다.
"모르는 게 나을 거예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였다.
"VIP 환자예요. 아주 거물급."
날카로운 파열음이 뒤따랐다. 유리가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였다. 비명은 더욱 거세졌다.
"그 사람은 내 거야! 그를 잃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장 큰 상담실 안, 명품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의자 위에 서서 깨진 화병 조각을 자신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고, 비싼 화장은 엉망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보였다.
"강 선생, 하느님 맙소사."
김 원장님이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강 선생이 맡아줘야겠어."
그는 나를 앞으로 떠밀었다.
"한세라야. 그 패션 인플루언서. 비서실에서 전화 왔는데, 여자 상담사랑만 얘기하겠다고 했대. 강 선생이 우리 병원 최고잖아."
한세라. 마트 잡지 표지에서 본 듯한 희미한 이름이었다.
"약혼자 때문에 저러는 거야."
김 원장님이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그 유명한 JH 그룹 권지혁 회장."
심장이 멎었다.
권지혁.
내 남편 이름은 서현우다. 건설 현장 인부다. 소박하고, 다정하고, 세상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는 남자. 우리는 시내 반대편 작은 빌라에 산다.
우연일 거야. 권 씨는 흔한 성이니까. 지혁이라는 이름은 드물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가슴속에 퍼지는 차가운 감각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냥 이름일 뿐이야. 바보 같고 의미 없는 우연.
김 원장님이 내 손에 파일을 쥐여줬다.
"여기 환자 정보. 행운을 빌어."
나는 파일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약혼자 성명'란에, 차갑고 공식적인 글씨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권지혁.
숨이 턱 막혔다.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억지로 평정을 유지했다. 나는 심리상담사다. 위기 상황을 다루는 전문가. 심호흡을 하고, 소박한 원피스를 매만진 뒤 방으로 들어갔다.
"세라 씨."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저는 강서아라고 합니다.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나를 본 순간, 그녀의 광적인 에너지가 바뀌었다. 눈 속의 야생적인 기운이 어린아이 같은 연약함으로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떨어뜨렸고, 조각은 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아 씨."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흐느끼며 내게 달려들었다. 내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고 통곡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내게 매달렸고, 그 모습 전체가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고 살아온 인생을 비명처럼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지혁 씨 때문이에요. 요즘 너무 차가워졌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넘겼다.
"보세요."
그녀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우리예요. 우리 정말 완벽하지 않아요?"
사진 속에는 한세라가 완벽하게 재단된 수트를 입은 남자의 뺨에 키스하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고, 눈가가 접히는 방식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익숙했다.
내 현우 씨였다.
아니, 권지혁이었다. 그리고 그는 JH 그룹 로고가 선명한 초고층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날 정말 사랑해요."
한세라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지난 생일엔 개인 섬을 사줬어요. 날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온 세상을 다 주겠다고 했어요."
세상이 기울고 있었다. 발밑의 바닥이 꺼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뭔가 변했어요."
그녀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가 돌아온 후부터요. 한동안 실종됐었거든요. 2년 동안.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대요. 마침내 돌아왔을 때, 그는… 달라졌어요. 더 차가워졌죠."
2년.
내가 현우 씨와 결혼한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진실이 물리적인 타격처럼 나를 덮쳤다. 폐에서 공기를 앗아가고, 텅 비고 아픈 공허함만 남겼다.
내 현우 씨. 내 다정하고 소박한 남편이 냉혹한 부동산 재벌, 권지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기억을 잃은 2년 동안 지켜온 비밀이었다.
기억 하나가 날카롭고 선명하게 떠올랐다.
2년 전. 비 오는 밤. 인적 드문 도로 위의 뒤틀린 폐차. 늦은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그것을 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차를 세웠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그를 발견했다. 신분증도, 휴대폰도 없었다. 그저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상담사지만,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알았다. 나는 그를 가장 가까운 작은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단 결과는 심각한 두부 외상으로 인한 완전 기억상실증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남자의 몸을 한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고 두려워했다.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경찰도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나는 그에게 현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소박하고, 강인한 이름.
내 작은 빌라 안에서 새로운 세상이 태어났다. 그는 내게 너무나 의존적이었고, 감사해했다. 그의 눈은 어디든 나를 따라다녔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로 배웠고, 나는 그의 스승이자, 안내자이자,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우리의 관계는 빠르고 깊게 발전했다. 그는 너무나 솔직했고, 꾸밈이 없었다. 과거의 무게가 없었기에, 그는 순수한 애정 그 자체였다. 그는 나를 만난 날 자신이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위해 요리를 배웠다. 동네 건설 현장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굳은살이 박이고 흙먼지가 묻은 손으로 우리를 위해 돈을 벌어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단 한 송이의 완벽한 장미를 사주기 위해 몇 주 동안 돈을 모으곤 했다.
그는 숨 막힐 정도로 맹렬하게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태양이고, 달이고, 온 하늘이라고 말했다.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괜찮다고 했다.
내가 그를 발견한 지 6개월 후, 그는 청혼했다. 반지는 없었다. 강가에서 주운 작고 매끄러운 돌멩이뿐이었다. 그는 우리 작은 거실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의 눈은 눈물로 빛나고 있었다.
"서아야."
감정에 북받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에겐 과거가 없지만, 내 모든 미래가 너와 함께이길 원한다는 건 알아. 나랑 결혼해줘."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구청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단둘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결혼 첫해는 열정과 소박한 기쁨으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돈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다.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는 나를 숭배했고,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러다 약 3개월 전, 그는 '일' 때문에 멀리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애매하게 말했고, 다른 지방에서 하는 큰 건설 프로젝트라고 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자리를 비웠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달라져 있었다. 변화는 처음엔 미묘했다. 그는 더 과묵해졌고, 신체적 애정 표현이 줄었다. 그가 지어준 애칭으로 나를 부르는 것을 멈췄다. 그는 그냥 일 때문에 피곤하다고 말했다.
이제야 모든 게 보인다. 그 '일'은 일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진짜 삶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권지혁의 삶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 우리의 결혼은 그 길 위의 일시적인 정류장이었을 뿐이다. 비밀. 불편한 존재.
한세라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멀리서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차갑고 단단한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것뿐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요?"
한세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내 팔을 찔렀다.
"눈이 왜 그렇게 빨개요? 날 위해 울어주는 거예요? 내 인생이 정말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녀의 말은 터무니없이 아이러니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갑자기 상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세라야!"
권지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내 연봉보다 비쌀 법한 명품 수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강력하고, 위압적이었으며, 지난주에 우리 집 새는 수도꼭지를 고쳐주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눈이 나를 발견했다. 아주 잠깐, 그의 눈에서 충격과 알아봄의 빛이 스쳤다. 그러다 이내 차갑고 단단한 가면으로 바뀌었다.
그는 나를 쏘아보았다. 그건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경고였다. 조용히 입 다물라는 잔인한 명령이었다.
그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스쳐 지나가 한세라를 품에 안았다.
"자기야, 나 왔어. 괜찮아."
"지혁 씨!"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녹아내리며 울부짖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너무 무서웠단 말이에요."
"알아, 알아."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그가 내게 사용하던 그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다시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약속해."
그 말들은 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도 수백 번이나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세라야. 오직 너뿐이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눈이 타는 듯했지만,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인 선언을 하고 있었다. 오직 단 한 명의 관객, 바로 나를 위한 연극이었다. 그는 내게 내 자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한세라를 소중한 보물처럼 품에 안아 들었다. 그가 걸어 나가면서, 그의 차가운 눈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마지막으로 나와 마주쳤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넌 이제 지워져야 할 오점일 뿐이야.'
나는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내 부서진 심장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책상으로 돌아갔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서 잠금을 해제하는 데 세 번이나 걸렸다.
연락처를 스크롤해 몇 년 동안 전화하지 않았던 번호를 찾았다.
엄마였다.
두 번째 신호음에 엄마가 받았다.
"서아야? 너니, 얘?"
엄마의 목소리는 뚜렷했고, 희미한 유럽 억양이 섞여 있었다.
"엄마."
내 목소리는 막힌 속삭임 같았다.
"도움이 필요해요."
"물론이지, 아가. 뭐든지. 무슨 일이야?"
"저… 이민 가고 싶어요. 엄마한테 가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네 남편은? 현우는 어쩌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쓰리고 고통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사람은 안 가요."
짐을 챙겨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병원을 나서려 할 때, 내 책상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었다.
권지혁이었다. 그가 돌아와 있었다.
"얘기 좀 하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회차 2
그는 병원 복도의 거친 형광등 불빛 아래 완벽하게 재단된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권지혁은 낯선 사람이었다. 손목의 값비싼 시계, 눈 속의 차가운 계산,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권력의 아우라. 내가 결혼했다고 생각했던 온화한 노동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요."
내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나는 평범한 배경을 가진 상담사일 뿐이었다.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겠는가?
그는 나를 우리 빌라 전체보다 비쌀 법한 매끈한 검은색 차로 이끌었다. 운전기사가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차 안은 값비싼 가죽 냄새와 내 것이 아닌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H.S.R'이라는 이니셜이 금색으로 수놓인 푹신한 분홍색 쿠션이 좌석에 놓여 있었다. 한세라. 당연했다.
분노라기보다는 둔하고 욱신거리는 고통 같은 감정이 솟구쳤다. 나는 쿠션을 집어 바닥 매트 위에 내려놓았다. 작고 초라한 반항이었다.
내가 알던 현우 씨는 톱밥과 커피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낡은 픽업트럭을 몰았다. 그는 닳아빠진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1년을 꼬박 모았다. 이 차, 이 삶은 다른 우주에서 온 것이었다.
차 안은 침묵이 흘렀다. 좁은 공간의 긴장감은 숨 막혔다. 나는 창밖으로 흐릿하게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아닌 영화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나를 시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라비앙'으로 데려갔다. 6개월은 기다려야 예약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현우 씨와 나는 한번 이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나는 아이처럼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아름답게 차려입은 손님들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언젠가, 서아야."
그가 내 어깨를 감싸며 약속했다.
"내 큰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여기 데려올게. 메뉴에 있는 거 전부 다 시키자."
이제, 나는 여기 와 있었다. 하지만 꿈은 악몽으로 변해 있었다.
비단과 보석의 바다 속에서 내 소박한 원피스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권지혁은 완벽하게 어울렸다. 지배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우리는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권지혁은 내가 뭘 원하는지 묻지도 않고 유창한 프랑스어로 우리 둘의 음식을 주문했다.
그는 웨이터가 와인을 따르고 물러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 잔의 얼음처럼 차가웠다.
"언제 알았지?"
나는 손에서 떨리는 와인잔을 든 채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요."
나는 속삭였다.
"병원에서요. 그녀가 당신 사진을 보여줬을 때."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가 내 쪽으로 와인잔을 밀었다.
"마셔."
그것은 제안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해 줬으면 좋겠어, 강서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세라와 나는 결혼할 거야. 우리 집안은 몇 년 동안 이 결혼을 계획해 왔어. 당신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
숨이 멎었다.
"변수요?"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제안하는 건, 당신이 계속 내 아내로 남아주는 거야. 물론 비밀리에. 그 빌라는 계속 써도 좋아. 매달 넉넉한 생활비도 지원하지. 당신이 할 일은 조용히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 거야."
그의 뻔뻔함에 숨이 막혔다.
"나더러 당신의 정부가 되라는 건가요?"
나는 물었다. 그 단어들은 독약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진짜 아내와 함께 사는 동안, 숨겨진 아내로 처박혀 있으라고요?"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자만하지 마, 강서아. 이건 사랑이나 욕망의 문제가 아니야. 난 당신에게 아무 감정도 없어. 내 몸도 당신에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이건 일종의… 위자료라고 생각해. 당신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한 대가."
제공한 서비스.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하고, 돌보고, 함께 삶을 꾸렸던 2년을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날 구했지."
그는 거래하듯 말을 이었다.
"감사하게 생각해. 그러니, 그 빚은 갚아주지. 가격을 말해. 수표. 집. 원하는 건 뭐든. 그리고 사라져."
고통이 너무 강렬해서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 직업적 본능이 발동했다. 나는 표정을 감췄다. 그에게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혼인신고서는요?"
나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나요?"
그는 경멸이 담긴 짧고 날카로운 소리로 비웃었다.
"그 종이 쪼가리? 아무 의미 없어.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서명한 거야. 실수였지.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
"감정은 진짜였어요, 현우 씨."
나는 애원했다. 그 이름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 이름은 권지혁이야. 그리고 '현우'는 당신에게 뭔가 느꼈을지 모르지. 하지만 난 현우가 아니야. 우리의 세상은 너무 달라. 우린 애초에 만날 운명이 아니었어."
그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난 세라를 상처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2년 동안 날 기다렸어. 상처받을 자격이 없어."
그럼 나는? 나는 무슨 자격이 있는데?
눈물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지만, 나는 삼켰다. 그의 앞에서 울지 않을 것이다.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좋아요."
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 돈, 받겠어요."
그가 우리의 사랑을 거래로 전락시키려 한다면, 나는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받겠다. 그는 내가 그에게 바친 2년의 세월과, 내가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 그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졌던 빚을 갚아야 했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좋아. 변호사가 계약서를 작성할 거야."
"그리고 이 레스토랑은요?"
나는 쓴맛을 느끼며 물었다.
"날 여기로 데려왔잖아요. 내가 항상 오고 싶어 했던 곳으로."
찰나의 순간, 그의 눈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알던 남자의 유령.
"당신이 여기 오고 싶어 했던 걸 기억했어."
그는 거의 부드럽게 말했다.
심장이 바보같이 두근거렸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는 달콤하고 킥킥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혁 씨, 내 사랑, 전화받아요!" 한세라였다.
그의 눈에 스쳤던 온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즉각적인 걱정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세라야?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그가 "돌아온"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부드러운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
"알았어. 움직이지 마. 지금 가는 중이야."
그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 내 팔을 잡았다.
"가자. 가야 해."
"어디를요? 무슨 일인데요?"
"세라가 악몽을 꿨대. 무서워하고 있어."
그는 나를 레스토랑 밖으로 너무 빨리 끌어내서 나는 거의 비틀거렸다.
악몽. 그는 약혼녀가 나쁜 꿈을 꿨다는 이유로 우리의 "사업상 저녁 식사"에서 나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 터무니없음은 경악스러웠다.
우리는 언덕 위의 성처럼 보이는 거대한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웅장한 입구를 지나 나선형 계단 위로 나를 끌고 갔다.
"그녀에겐 상담사가 필요해."
그의 목소리는 팽팽했다.
"그게 당신이야. 가서 진정시켜."
그는 화려한 이중문 쪽으로 나를 밀었다. 그는 나를 이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아내도, 심지어 기억 속의 존재도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소중한 약혼녀를 달래기 위한 도구였다.
그가 문을 열었다. 실크 가운을 입은 한세라가 거대한 침대에 앉아 있었다. 권지혁을 보자마자, 그녀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그의 품에 몸을 던졌고, 내 존재는 완전히 무시했다.
"지혁 씨! 정말 끔찍한 꿈을 꿨어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당신이 날 떠나는 꿈!"
"절대 아니야."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깊게 키스했다.
"사랑해. 언제나 사랑할 거야."
그는 뒤로 물러나 셔츠 윗단추를 풀고 가슴을 드러냈다. 거기, 그의 심장 위에 문신이 있었다. 섬세하고 복잡한 디자인의 활짝 핀 장미 한 송이, 줄기에는 'H'라는 글자가 엮여 있었다.
"이거 보여?"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헌신으로 낮게 울렸다.
"널 위해 새겼어, 내 사랑. 오직 너에게만 속한 내 심장의 상징이야."
나는 그 문신을 쳐다보았고, 폐에서 마지막 공기가 빠져나갔다.
1년 전, 현우 씨는 똑같은 문신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내 사랑 덕분에 다시 피어날 수 있었다며, 나를 위한 장미라고 말했다. 이니셜은 '영원(Eternity)'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건 한세라(Han Sera)를 위한 것이었다.
언제나 한세라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 방에서 단 1초도 더 숨 쉴 수 없었다.
"어디 가려고?"
권지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고통의 안개를 뚫고 들어왔다.
"제 일은 끝났어요."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이제 괜찮아 보이네요. 제가 머물 의무는 없어요."
"이걸 다시 갖고 싶다면 의무가 있지."
그가 차갑게 말했다.
나는 돌아섰다. 그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은 나무 상자.
심장이 뱃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버지의 오르골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남은 유일한 물건. 나는 1년 반 전에 현우 씨의 마지막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전당포에 팔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머물러."
그의 눈은 얼음 조각 같았다.
"아니면 다시는 이걸 볼 수 없을 거야."
회차 3
나는 권지혁의 손에 들린 오르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작은 나무 상자에는 아버지의 기억이 담긴 마지막 조각이 들어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베개 하나가 날아와 내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저 여자 당장 내보내!"
한세라가 질투와 분노로 뒤틀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보기 싫어! 지혁 씨, 어떻게 다른 여자를 내 침실에 들일 수 있어!"
"자기야, 진정해."
권지혁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말했다.
"그냥 상담사일 뿐이야. 널 위해 불렀어."
"싫어! 저 여자 싫다고! 나가! 당장 나가!"
한세라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녀는 떼를 쓰는 버릇없는 아이 같았다.
권지혁은 순수한 얼음 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들었지."
그가 내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문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거구의 경호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 내 집에서 끌어내."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경호원들이 내 팔을 잡았다. 그들은 거칠었고, 손가락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나를 방에서 끌어내고, 웅장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나를 자갈 깔린 진입로에 밀치고 등 뒤에서 문을 쾅 닫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차도 없고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외딴 언덕 꼭대기에 버려졌다. 바람이 얇은 원피스를 파고들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멋진 저녁 식사용 구두가 발을 조이는 것을 느끼며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새로운 고통의 파도였다.
원치 않는 기억이 떠올랐다. 1년 전, 현우 씨와 나는 여기서 멀지 않은 등산로를 하이킹했다. 내가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었다. 그는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트럭까지 나를 업고 가겠다고 고집했다. 그의 등은 따뜻하고 튼튼했다.
"내가 항상 잡아줄게, 서아야."
그가 내 귓가에 따뜻한 숨결로 속삭였다.
"언제나."
나는 헐거운 돌에 걸려 넘어졌고, 무릎이 아스팔트에 세게 부딪혔다.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그 남자, 현우 씨는 사라졌다. 어쩌면 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내게 보여준 사랑, 그가 했던 약속들. 그것들은 기억 없는 남자의 유령에게 속한 것이었다. 권지혁은 모든 것을 기억했고, 그는 나를 잊기로 선택했다.
그 깨달음은 뱃속에 차갑고 단단한 돌덩이처럼 자리 잡았다. 끝났다. 완전히, 철저하게 끝났다.
나는 긁히고 피가 나는 손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산 아래로 길고 외로운 걸음을 계속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얼어붙었다.
큰길에 도착해 겨우 택시를 잡았을 때는 해가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집이었던 아파트로 들어섰을 때, 그곳은 무덤처럼 느껴졌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북을 켜는 것이었다. 나는 유럽 이민 신청서를 작성했고,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벗어나야 했다. 이 도시, 이 삶,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고 나서 병원에 전화해 즉시 사직했다.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여행 가방을 싸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무시할 뻔했지만, 무언가에 이끌려 전화를 받았다.
"강서아."
권지혁의 목소리. 차갑고 거만했다.
"시그니엘 호텔로 가. 한세라 드레스 좀 찾아와. 오늘 밤 JH 그룹 창립 기념 파티에서 입을 거야."
그것은 요청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그는 나를 심부름꾼처럼 대하고 있었다.
"권지혁 씨."
나는 위험할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나는 끝났어요. 계약서는 작성 중이고요. 나는 당신이나 당신 약혼녀에게 어떤 의무도 없어요."
그는 낮고 위협적인 소리로 비웃었다.
"네 아버지 오르골 셔틀 잊었나? 그거 아주 연약한 물건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타까울 텐데…."
그 위협은 공기 중에 짙고 숨 막히게 떠 있었다.
"그리고 가는 김에,"
그가 덧붙였다.
"어젯밤 한세라 기분 상하게 한 거 사과해."
피가 차갑게 식었다.
"사과요? 뭐에 대해서요?"
"네 존재에 대해서."
그가 경멸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안에 도착해."
그는 내가 한마디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숨이 멎을 정도로 깊은 분노에 떨며 서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오르골, 아버지의 마지막 조각이 이 괴물에 의해 파괴될 거라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코트를 걸치고 호텔로 갔다.
스위트룸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고, 손은 지갑 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침실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구의 커다란 장식용 화분 뒤에 숨어 얼어붙었다.
"그냥 사고였어, 내 사랑."
권지혁이 역겨울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내 2년간의 기억상실… 그녀를 발견하고, 결혼한 거… 전부 실수였어. 너에게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불행한 우회로였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은 그녀와 함께 있었잖아!"
한세라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명 같았다.
"그녀를 만졌잖아!"
"기억이 돌아온 후에 딱 한 번뿐이었어."
그가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맹세하는데, 난 그게 너인 줄 알았어. 비즈니스 미팅에서 약에 취했고, 정신이 없었어. 그녀 옆에서 깨어났을 때, 바로 떠났어. 그녀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세라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미 돈 주고 사라지게 했어. 다시는 그녀를 볼 일 없을 거야, 약속해."
거짓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악랄하고 계산된 거짓말. 그날 밤, 그는 집에 와서 내가 사랑으로 착각했던 절박한 열정으로 나와 사랑을 나눴다.
"정말?"
한세라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정말이야."
그가 확인시켜 주었다.
"자, 이리 와. 너무 보고 싶었어."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한세라의 부드러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지혁 씨, 그만… 피팅…"
그녀가 킥킥거렸다.
"피팅은 기다릴 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욕망으로 두꺼워졌다.
"난 널 원해. 지금."
"정말 못 말려."
그녀가 나른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어떻게 할 거야? 당신이 부른 그 여자. 어떻게 벌을 줄까?"
잠시 침묵이 흘렀고, 이어서 권지혁의 어둡고 방종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 사랑. 널 행복하게 만드는 거라면 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