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연성준이 이혼을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허가원이 돌아오기 전, 어르신들을 상대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어르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차윤서가 최적의 선택이었다.
차윤서는 가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는 정말 그녀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그의 불륜을 숨기는 데 협조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더욱이 오늘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그의 무덤덤한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6개월 동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실망 가득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쉰 그녀가 소파로 향하더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부하 '생쥐'의 연락처를 찾은 그녀가 바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최근 연씨 그룹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해. 연성준이 혹시 불치병에 걸렸는지도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정...정말, 윤서 누나 맞아요?"
"누나 문자를 다시 못 받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윤서 누나, 2년 만이에요!"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요?"
쏟아지는 문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빨리 알아내."
생쥐는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네, 누나!"
휴대폰을 소파 위로 던진 차윤서는 조용히 앉아 답장을 기다렸다.
만약 연성준이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이혼을 계획한 거라면, 더는 따지지도 않고 그를 용서하고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두고 정신적으로 외도한 거라면? 그녀는 가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30분 후,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며 생쥐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회사는 아무 문제 없어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 없는데, 왜 확인하라고 한 거예요? 연성준은 얼굴도 잘생긴 데다, 돈도 많아요. 누나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누나도 잘생긴 남자 좋아하지 않나요? 먼저 연락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차윤서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답장을 보냈다.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소파에 던졌다.
회사에도 아무 문제 없고, 건강에도 이상이 없다면 원인은 단 하나. 연성준은 쓰레기보다 못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생쥐는 이미 꺼진 휴대폰 화면은 당황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윤서 누나 기분이 나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한참이나 가만히 내려다본 차윤서는 옆에 놓인 펜을 들어 단호하게 사인을 한 다음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무표정한 채 돌아서서 곧장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하자, 읽지 않은 메시지 수십 통과 부재중 전화 32개나 와 있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별명이 생쥐이자 그녀의 부하인 백경이 그녀와 연락한 소식을 동네방네 떠벌린 것이 분명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던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였다. 미간을 깊게 찌푸린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2년 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던 아버지가 왜 갑자기 연락한 걸까?
그녀가 어머니 일 때문에 제도를 떠난 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긴 그녀는 결국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너머에서 답답한 침묵만 흐르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차윤서가 통화를 마치려 할 때, 휴대폰 너머에서 차호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나야."
이 이름은 이미 기억에서 완전히 지운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차윤서는 싸늘한 목소리로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잠깐 망설이는 듯한 차호섭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네가 백경에게 연성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는 것을 들었다. 아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필요 없어요." 그의 간섭에 불쾌감을 느낀 차윤서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휴대폰 너머에서 침묵이 한참 이어지더니 차호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연성준 대표와는 무슨 사이야?"
"부부예요." 태연한 그녀의 얼굴 표정과 달리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곧 이혼하게 될 테지만."
차호섭은 충격에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차윤서가 연성준과 결혼을 했다고?
"너..."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차윤서는 그와 더 이상 의미 없는 말들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휴대폰 너머에서 차호섭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휴대폰을 쥔 손에만 더욱 힘을 주었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차호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언제 돌아올 거야? 그 여자는 이제 없어."
그녀가 전화를 끊을까 두려웠던 차호섭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네 엄마 물건도 그대로 있어."
휴대폰을 더욱 꽉 잡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차갑게 말을 뱉었다. "알겠어요."
말을 마친 차윤서는 망설임 없이 통화를 마쳤다.
이미 끊긴 통화를 내려다본 차호섭은 만감이 교차하며 말 못 할 섭섭함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결혼도 모자라 이혼에 관한 말은 묻지도 못했는데...
그러나 차윤서는 그의 생각 따위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비행 모드로 전환한 그녀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린 다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고요한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8시가 되자 잠에서 깬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었다.
메이크업에 더욱 공을 들인 그녀의 피부는 결점 하나 없이 빛났고, 생기 넘치는 도톰한 입술은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진정한 무기는 바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빛나는 그녀의 두 눈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피어나는 밝은 미소는 다른 사람의 기분도 금세 좋아지게 할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연성준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는 베레모로 포인트를 줬다.
연성준을 발견한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아한 손짓으로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출발하죠." 작은 핸드백을 손에 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또렷했다.
꼭 맞는 맞춤 정장을 입고 나타난 연성준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차윤서는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오늘 급한 일정 때문에 안 돼."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차가웠다. "내일 같이 가."
"연성준 씨."
명령조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를 연성준은 극도로 싫어했다.
"나 오늘 메이크업도 완벽하게 했어." 차분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월요일에 법원에서 아무 문제 없이 이혼하고 싶다면, 급한 일정은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거야. 난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해."
눈을 가늘게 뜬 연성준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허가원의 병원 재검사에 관한 말들이었다.
차윤서는 핸드백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나지막이 욕설을 퍼부었다. 연성준은 그녀와 약속을 잡은 날에도 허가원을 걱정하고 있었다.
차윤서의 일그러진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연성준은 평소와 사뭇 다른 그녀의 예쁜 모습에 계속 눈길이 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검소한 평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화를 끊은 그는 그녀가 어느 백화점에서 쇼핑할 건지 묻자 차윤서는 제일 비싼 명품 백화점을 쇼핑할 거라고 답했다.
이건 쇼핑이 아니라 일부러 사치를 부리는 게 틀림없다. 오전 10시가 되자 그녀의 뒤를 따르는 네 명의 경호원들의 손에는 각종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
쇼핑하는 동안 연성준의 휴대폰은 메시지 알림음이 끝없이 울렸다.
차윤서가 다른 명품 액세서리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연성준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그녀는 쇼핑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회차 3
차윤서와 연성준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뒤를 따른 연성준의 비서 최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지금이라도 레스토랑을 예약할까요?"
얼굴 가득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연성준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필요 없어."
그는 차윤서가 이혼에 대한 불만을 쇼핑으로 분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쇼핑으로 화가 풀릴 수 있다면, 그는 그녀가 마음껏 돈을 쓰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휴대폰에는 명품 액세서리 샵에서 60억을 쇼핑했다는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우는 어색하게 네 명의 경호원을 돌아보며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고 무거운 쇼핑백을 든 경호원들은 묵묵히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명품 매장에서 나온 차윤서가 쇼핑백을 아무렇지 않게 최우에게 던진 다음 옆 매장으로 들어가려 하는 순간, 연성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껏 찌푸렸던 얼굴이 발신자를 확인하는 즉시 누그러지더니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원아."
놀란 기색이 역력한 최우와 경호원들은 경악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대표님은 사모님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
"연 대표님, 가원이 추가 검사를 진행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현재 의식을 잃고 응급 수술 중에 있습니다." 휴대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원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표님 이름만 불렀는데, 혹시 지금 병원에 와주실 수 있나요?"
"문자로 주소 보내주세요.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연성준은 빠르게 답하고 통화를 마친 뒤, 차윤서를 돌아봤다.
뭔가 설명하려던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최우와 경호원들을 향해 돌아서며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사모님과 함께 쇼핑하고 있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손이 모자라면 오후에 집까지 배송해 달라고 해."
"네, 대표님." 경호원들은 동시에 고개 숙여 공손하게 대답했다.
차윤서를 비서와 경호원에게 맡긴 연성준은 빠르게 돌아서 백화점을 나섰다.
어색하게 미소 지은 최우가 금테 안경을 고쳐 끼더니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 "사모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표님께서 급한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직원이네요." 차윤서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반응에 최우는 당황함을 금치 못하고 연신 눈만 깜박였다.
차윤서는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쌓인 백화점을 둘러보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 대표님 비서로 지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매일 강도 높은 업무는 물론이고, 사모님 눈치까지 보며 비위를 맞춰야 하니. 최 비서님, 데이트 중에 아내를 버리고 불륜녀에게 간 남자가 다시 돌아올 것 같아요?"
경호원들은 물론이고 최우마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찰나의 순간, 다섯 남자는 연민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재벌 가문에 시집온 대가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화를 내지도 못하고 모욕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정은 사양할게요." 다섯 남자의 똑같은 표정에 차윤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터뜨리고 그들의 손에 쥔 쇼핑백을 가리켰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쇼핑백에서 아무 물건이나 골라도 당신들 1년 연봉, 심지어 10년 연봉에 가까운 값일 거예요."
처참한 현실에 경호원들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차윤서는 담담하게 물었다.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동시에 고개를 든 다섯 남자의 얼굴에는 아리송한 표정이 피어 올랐다.
그들은 도무지 차윤서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연성준 씨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갔으니, 우리는 그 사람의 돈을 더 나은 곳에 써야 하지 않겠어요?" 블랙카드를 손가락에 끼워 넣은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연성준이 그녀를 버리고 허가원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원하는 건, 연성준의 블랙 카드를 한도가 초과될 때까지 결제하는 것이다.
최우와 경호원들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리둥절해진 그들의 반응에 차윤서는 다시 돌아서서 명품 매장으로 들어가 쇼핑을 시작했다.
연성준이 하루 종일 병원에서 허가원 곁을 지킬 줄 알았던 그녀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그를 보고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의 기세가 온화한 레스토랑의 분위기까지 무거워지게 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연성준은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가 손목을 뿌리치듯이 내던지자 그녀의 온몸이 차에 부딪혔고, 갑작스런 통증이 온몸에 퍼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곧바로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가원이를 다치게 했어?"
주먹을 세게 움켜쥔 연성준은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려 애쓰는 듯했다. "당신이 사람을 시켜서 가원이를 다치게 한 거 맞지? 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들어줬어. 별장, 차 돈. 내가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면 될까? 대체 왜 가원이를 다치게 한 거야?"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뿜어낸 그의 두 눈에는 날카로운 분노의 빛이 이글거렸다.
"내가 언제..." 혼란스러운 상황에 차윤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도 거짓말하려고?" 차갑게 쏘아붙이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모든 걸 계획했잖아. 하필 오늘 백화점에서 쇼핑하겠다고 고집 부린 게 날 백화점에 가둬두려는 목적 아니었어? 그 사이에 사람까지 고용해 가원이를 죽이려 했잖아. 내가 죽더라도, 가원이가 죽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운 그의 목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등골이 서늘해 났다.
그의 난폭한 손짓에 잔뜩 화가 치밀었던 차윤서는 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더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내로남불인가? 불륜을 저질러 놓고 뻔뻔하게 날 탓하다니."
"차윤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연성준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망상병에 걸렸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 그의 사나운 모습에도 차윤서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해야지. 내가 왜 그런 사람 때문에 곧 다가올 내 자유를 망치겠어?"
"당신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무겁게 목소리를 내리깐 연성준의 목소리가 유난히 위협적이었다.
그의 말뜻을 눈치챈 차윤서는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설마, 내가 아직도 당신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연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다문 입과 눈빛만 보아도 충분히 답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직도 당신을 놓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린 차윤서의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딱딱하기만 했다. "당신이 날 대체품 취급했다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면 불륜을 저지른 당신을 내가 용서할 것 같았어? 그것도 아니면,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마음에 품은 남자를 계속 사랑할 줄 알았어?"
쏘아붙이듯이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연성준의 얼굴이 바로 굳어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불륜을 저지른 적 없어."
"우리가 나눠 낀 반지를 끼고, 그 여자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그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더욱 매혹적으로 변했다. "그게 바로 불륜이야."
"말장난하지 마."
"당신이 아무 증거도 없이 날 의심했잖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연성준은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위압감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에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의미 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차윤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허가원 씨는 내가 본인을 죽이기 위해 사람을 고용했다고 말했고, 당신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거잖아?"
"그래." 그녀의 태연한 반응에 연성준은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굳은 얼굴은 도무지 펴질 줄 몰랐다. "가원이는 거짓말하지 않아. 당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차윤서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핸드백을 움켜쥔 그녀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더니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좋아. 그 증거, 병원에 가서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오히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연성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고용한 것이 사실이라면 직접 병원까지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설마 증거가 조작된 건 아닌지, 의심이 피어 올랐다.
"빨리 가." 그녀의 재촉에 연성준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녀의 손목을 놓친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짜증, 분노? 감정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