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하세령, 우리 예담이가 하 씨 가문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명예를 빛내줬는지, 너도 눈이 있으면 똑똑히 봤겠지? 너는 가문의 장녀로서 매번 말썽만 일으킬 뿐 도대체 한 게 뭐야?"
"게다가 예담이는 네 목숨까지 구했어. 이제 그 은혜를 갚을 차례야!"
"난 예담이 택할 거야. 하세령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
"나도 예담이!"
"나도..."
도시 외곽의 버려진 공장 한복판. 손목이 뒤로 꽁꽁 묶인 채, 하세령은 차디찬 바닥에 무릎 꿇고 있다. 그저 절망 속에서, 그녀는 세 오빠들이 자신을 버리고 이복여동생을 선택하는 순간을 고스란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약혼자 유이준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남자, 십 년 넘게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그 사람.
근처에 놓인 테이블 앞, 완벽한 슈트 차림의 유이준은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앉아 있다.
하세령은 마지막 남은 기대를 담아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얇은 입술 밖으로 차디찬 말들을 뱉을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예담 뿐이야. 하예담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후회하게 만들 거니까 각오해. 그리고 저 여자는...갖고 놀던지 버리던지 마음대로 해. 나랑은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냉혈한 모습으로 내뱉는 매정한 말들은 하세령의 심장을 단숨에 짓뭉갰다. 한때 목숨을 걸고 지켜낸 사람이 이토록 무정한 놈이었다니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 병원에서 수차례 생사를 넘나들며 자신의 피를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나날들을.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남자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버리자 한 가닥 희망으로 희미하게 뛰던 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팠다. 가슴이 거대한 바위에 짓눌리는 듯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말 못할 고통이 그녀의 목을 죄어 단 한 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세령은 그저 멍하니 그 매정한 무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구출된 하예담이 울먹이며 유이준의 품에 뛰어드는 모습까지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고 냉정하게 자신을 외면하던 약혼남 유이준은 지금 이 순간 다정한 눈빛으로 하예담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고 있다.
세 오빠는 마치 친 여동생을 대하듯 하예담을 애지중지 감쌌다. 혹여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쳤을까 봐, 끊임없이 살피고 달래며 온 신경을 쏟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것은 음흉한 웃음을 띤 납치범들뿐이었다. 비대한 몸뚱이에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헤헤, 하 씨 가문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저 년을 지키려고 친 딸을 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어. 대박인데, 우리 같은 구렁창 밑바닥 인생에, 이렇게 고귀한 하 씨 가문의 아가씨를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게 됐잖아."
"야, 야! 밀치지 좀 말고 줄을 서, 차례대로 맛보자고..."
하세령은 몸을 벽에 바짝 밀착시켰고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게 되었다.
그녀의 목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쉰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목구멍 안에 가득 번진 피비린내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얼싸안고 감격스럽게 재회하는 다섯 놈들을 바라보며, 하세령은 온몸을 휘감는 좌절감에 결국 마지막 남은 용기마저 잃어버렸다.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조용히 죽어버렸다.
"엄마...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용기를 줘!" 바로 그때,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뇌리를 스치자, 그녀 몸 속에서 잊고 있던 힘이 솟구쳤다. 하세령은 결심했다. 더는 이 악몽 같은 삶에 갇혀 있지 않겠다고.
그녀는 불쑥 고개를 들었고, 남은 힘을 쥐어짜 벽을 향해 거세게 머리를 박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납치범 두목은 그녀의 눈에 비친 죽음의 의지를 눈치채버렸다. 그는 재빠르게 하세령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그녀를 뒤로 세차게 내동댕이쳤다.
그러더니 바닥에 쓰러진 그녀한테 한 달음에 다가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 년아! 누구 맘대로 죽으려는 거야? 우리가 아직 즐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면 너무 아깝잖아. 안 그래?"
그 거센 따귀 한 방에, 하세령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납치범들은 저급한 웃음을 터뜨리며 기름기 흐르는 더러운 손을 뻗어, 의식을 잃은 하세령의 몸을 더듬이기 시작했다.
"찌직--" "찍--" 누군가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어 갈겼다.
얼마 남지 않은 천 조각에 그녀의 알몸이 드러나려는 순간, 조금 전 따귀 한 방에 정신을 잃었던 하세령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엔 조금 전의 연약함은 흔적조차 없고, 대신 그 자리에는 피와 시체더미에서 기여 나온 아수라만이 가질 수 있는, 냉랭하고 오금 저리는 살의가 서려 있었다.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하세령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솟구치듯 일으켰다.
하세령은 묶인 두 손을 번쩍 들어, 눈 깜짝할 새에 턴을 돌아 납치범 두목의 뒤로 넘어가더니 순식간에 그 놈의 목을 휘감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힘껏 찬 하세령은, 반동의 힘을 빌어 순식간에 몸을 비틀었다.
"투둑." 납치범 두목은 저항할 틈도 없이 목이 꺾여, 둔탁한 소리와 함께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하세령은 납치범들이 당황한 틈을 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높게 치켜든 다리로 휘몰아치듯 발차기를 이어갔고, 그녀를 범하려던 납치범들은 모조리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당장의 위기는 넘겼다. 하지만 방금 전 위기의 상황에서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하세령의 찡그린 미간은 단 한 번도 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어딘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거의 반사적으로 납치범들을 쓰러뜨린 자신의 격투 본능,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온 걸까? 어째서 그 모든 움직임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쓰읍!" 고민에 빠진 그 순간, 오랫동안 묵혀 있던 기억이, 거대한 파도처럼 하세령의 머릿속을 거세게 들이닥쳤다...
출생, 어린 시절, 납치...그 후로는 대부, 깡패, 피바람, 그리고 살육!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6년 전, 해천시에서 내로라하는 하 씨 가문의 아가씨였던 하세령은, 오랜 원한을 품은 놈들에게 납치당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핏속을 걸어왔던 끔직한 4년을 전부 기억해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납치된 뒤, 십중팔구는 유흥가에 팔려갔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세계 최강의 깡패 조직, 소브린 언더월드의 대부-박충신이 직접 그녀를 양녀로 삼아, 지하세계로 데려갔던 것이었다.
그 4년 동안, 하세령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때는 나긋나긋하고 여린 하씨 가문의 아가씨였지만, 오직 살아남겠다는 철저한 본능만으로 그녀는, 암흑 세계에서 최정상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결국 수만 명의 경쟁자를 몰아내고, 소브린 언더월드가 공식 인정한 단 하나뿐인 차기 후계자가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보호받던 아가씨가 아니었다. 온 암흑 세계를 지배하는, 진짜 여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2년 전,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하세령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지뢰가 촘촘히 깔린 지뢰밭으로 유인 당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녀는 근처를 지나던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경찰서로 넘겨졌고, 뒤이은 DNA 대조를 통해 4년 전 실종된 하씨 가문의 딸임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하씨 가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배신과 지뢰밭 속 악몽은, 그녀에게서 그 소중했던 4년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방금 전, 기억의 문이 다시 열리기 전까지는.
이때, 한 남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생각에 잠겨있는 하세령을 깨웠다.
"하세령?! 이 저주받은 년아, 지금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회차 2
하예담과 함께 현장으로 돌아온 유이준, 그리고 하 씨 가문의 세 형제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두 손을 단단히 결박 당한 채, 하세령은 테러 조직과 관련된 납치범 무리를 모조리 제압해버린 것이다.
이게...가능한 일일까? 말도 안 되지.
두 손이 묶여 있는데다, 반전을 일궈낸 장본인이 하세령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무거우면 들지 못하던, 힘없고 허약한 여자였으니 말이다. 한때 격투를 가르치던 코치조차 그녀의 허약한 체질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한 번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한테 "쓰레기"라고 욕을 퍼부었었다.
그런 하세령이, 피비린내 나는 극악무도한 납치범 무리를 상대로, 그들을 이겨버린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었다! 그러니 유일한 설명은 하나였다. 지금 바닥에 쓰러진 납치범 무리들은 진짜 납치범이 아니라, 전부 하세령이 돈을 주고 데려온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분명 유이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작된 또 한편의 어설픈 연극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번에는 하예담까지 끌어들여 그녀를 자칫 위험에 빠뜨릴 번 했다.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유이준의 관자놀이가 벌컥벌컥 뛰기 시작했다. 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문 채, 하세령을 매섭게 쏘아붙였다. "좋아, 아주 좋아! 결국 이 모든 게 다 네가 짜놓은 짓거리였다는 거지! 납치범들도 전부 네가 돈 주고 데려온 거였고! 하세령, 네가 이제 정신을 차렸을 거라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조금만 더 고생하게 놔뒀다가 금방 구해주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또 네가 꾸민 자작극이었어!"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그래서 예담이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던 거였어?
하예담은 유이준의 품에 꼭 안긴 채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애처롭게 입을 열었다. "언니, 내가 그렇게까지 미워요? 나는 단 한 번도 언니랑 다툴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그렇게나 미운 거라면, 언니 맘 편하게 내가 사라져줄게요. 언니 앞길을 막고 있는 게 나라고 생각된다면, 지금까지 내가 일궈낸 모든 연구 성과도 전부 언니에게 넘겨주고 떠날게요."
"하세령!" 겉으로 보기엔 연약하기 그지없는 하예담의 한마디가, 그 자리에 서 있던 세 형제의 심장을 순식간에 꿰뚫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하세령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가죽을 벗겨버릴 것 같은 독기가 어려 있었다.
"우리 셋은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졌길래 너 같이 악독한 여동생을 둔 걸까? 차라리 예담이가 우리 친동생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너는 하씨 가문의 가장 큰 수치야!"
그들의 거침없는 비난들은 결국 하세령이 지난 2년 동안 견뎌왔던 마음 쓰라린 기억들을 모두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납치된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아버지는 밖에서 몰래 키우고 있던 사생아 하예담을, 서둘러 집안에 들였다.
그리고 그 하예담은, 집으로 돌아온 하세령 앞에서 눈부신 재능을 드러냈다. 하세령은 암흑 같은 세월을 모두 잊은 채 가족 품으로 돌아왔건만,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가족의 사랑까지 잃어버린 채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다. 그 누구도, 다시 그녀를 제대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가족들은 하예담을 데리고 온갖 행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가문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하예담은 심지어 하세령의 약혼자였던 유이준의 마음마저 빼앗았다.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지만 하예담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하세령이 하씨 가문의 장녀로서 갖고 있던 모든 권익을 노골적으로 탐냈다. 그리고 하세령이 집으로 돌아온 뒤 2년 동안 하예담은 끊임없이, 아주 집요하게, 함정을 파놓았다. 수차례의 모략 끝에, 유이준과 세 오빠들의 마음에는 하세령을 향한 불만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하예담은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을 뻔한 치밀한 함정을 짜기도 했다. 하세령을 끌어들여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고도 그 모든 상황을 유이준과 세 오빠들 앞에서 "자신이 하세령을 구했다"는 연극으로 둔갑시켰다. 그 결과, 하세령이 하 씨 가문과 유이준, 그리고 세 오빠들 마음속의 이미지는 거듭되는 모함에 점차 추악하게 변해 갔다.
그리고 오늘, 하예담은 억지로 하세령을 끌고 밖으로 나갔고, 두 사람은 함께 납치를 당했다.
납치범들이 유이준과 세 오빠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위협했을 때, 그들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예담을 선택했다.
한때는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하씨 가문의 장녀 하세령은, 자칫 모든 사람 앞에서 능욕당하는 끔직한 굴욕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오늘 이 순간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면, 하예담의 계략은 완벽히 성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하세령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하세령이 아니라 피비린내는 지하 조직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진정한 아수라였다. 과거, 유이준을 향해 품었던 모든 애정은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가슴은 이제, 텅 비어있다.
지난 2년 동안, 유이준이 하세령에게 보여준 것이라곤 오로지 잔인함뿐이었다.
그 모든 배신들이 뇌리를 스치던 순간, 하세령은 불쑥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묶고 있던 밧줄을 너무나도 쉽게 풀어냈다. 그녀는 방향을 틀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연기? 수치?"
허세령은 가볍게, 아주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살을 에는 듯한 냉기와, 뼛속까지 번지는 깊은 경멸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한낱 가식도 없이 그저, 냉혹한 진심뿐이었다.
그 단순한 말투와 가벼운 웃음소리만으로도 유이진과 그들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하세령은 웃음을 거뒀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좋아." 그녀는 낮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된 연기 보여줄까?"
순간! 하세령은 몇 걸음 앞으로 성큼 나아가더니 번개처럼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을 향해 불꽃처럼 매서운 한 대를 후려쳤다. "짝!"
맑고도 강렬한 따귀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고, 주변에 있던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진 채 얼어붙었다.
회차 3
하세령의 갑작스런 따귀에, 세 명의 오빠들과 하예담 모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껌뻑이며,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오늘 하세령이 정말로 유이준과 끝장을 보려는 건가? 오랫동안 그토록 깊이 사랑해왔던 사람인데... 그런데도, 주저 없이 손을 휘둘러 그의 뺨을 때렸다.
"하세령! 너 진짜 미쳤어?!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바로 유이준 본인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세령을 노려보았다. 이 여자가...감히, 그에게 손을 대다니. 이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유씨 가문의 촉망받는 젊은 후계자였다. 자라오면서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한때 자신을 가장 열렬히 동경하던 하세령에게,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뺨을 얻어맞다니.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했다.
"하세령, 당장 무릎 꿇고 용서 빌어. 안 그럼 우리 둘 사이는 이제 완전히 끝이야!" 유이준은 분노에 휩싸였다.
'좋아! 아주 좋아! 너 오늘 제대로 걸렸어!' 유이준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이를 갈았다. 끝까지 이런 연극 따위로 관심을 끌려 들다니. 그렇다면 이 결말이 얼마나 비참한지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세령이 꾸민 짓거리들은 유이준의 관심을 끌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더욱더 혐오하게 만들 뿐이었다. 다시는 절대로 용서 따윈 없을 것이고, 결국 혼자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에게 손 내밀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유이준은 여전히 하세령이 연극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토록 연약했던 여자가 단 하루 만에 변할 리 없다고, 그는 끝까지 확신했다.
하지만 하세령에게는, 더 이상 유이준의 장단에 맞춰줄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과거에 그를 뼈저리게 사랑했던 만큼, 지금 적나라하게 드러난 유이준의 추악한 본 모습에 그녀는 진저리 칠 정도로 혐오를 느꼈다.
"방금 그 한 대, 네가 받아 마땅한 벌이야, 유이준!" 하세령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서 분명히 해둘게. 방금 그 한 대는, 네가 나를 모욕한 것에 대한 아주 가벼운 경고였어. 기억해. 오늘 네가 살아남은 건, 단지 내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라는 거." "그리고, 지금부터 우리 둘의 약혼은 정식으로 파기한다. 나 하세령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는 거야. 예전에 내가 너희 유씨 가문에 미리 넘긴 10% 지분을 남김없이 다시 가져와. 앞으로 우리는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남남이야."
말을 끝낸 하세령은 가차없이 돌아섰다. 이제 기억을 되찾은 그녀에겐, 여기에 머물러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자신을 배신했던 자들에게, 반드시 알려줘야 했다. 하세령이 죽지 않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뭐라고...?" 하지만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유이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세령이 정말로 그와의 인연을 끝낼 줄은. 그것도 모자라 과거 자신과 하씨 가문 사이를 잇는 다리였던 그 10%의 지분까지 되찾아가겠다고 선언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감히 그런 말을 뱉다니!
사실 하씨 그룹은 애초에 하세령이 외할아버지가 일군 터전이었다. 게다가 하세령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 하씨 그룹의 50% 지분을 그녀에게 남겨주기도 했다. 그렇게 성인이 되는 순간, 그녀는 정당하게 그 유산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 50% 지분 중 10%는 과거 유씨 가문이 재정난에 빠졌을 때, 하세령이 약혼 예물이라는 명목으로 미리 유이준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오로지 그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건넨 10%의 주식이었다. 덕분에 유씨 가문은 위기를 넘겼지만, 유이준은 오히려 하세령을 혐오하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하예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럼에도 약혼을 유지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직 그 지분 때문이었다.
남은 40%의 지분은 현재 하세령의 아버지가 전권을 쥐고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하세령은 말 한마디로, 모든 걸 뒤집었다. 이제 와서 주식을 되찾겠다니, 이건 유씨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유이준은 물론, 하씨 가문 사람들까지 결코 용납할 리 없었다.
"하세령, 너 적당히 해! 네 엄마이기도 하지만 우리 엄마이기도 해. 아버지와 우리가 하씨 가문을 위해서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해왔는데! 그리고 유씨 가문에 넘긴 10% 지분이든 뭐든, 애초에 그 모든 건 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형제 중 한 명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그래 언니, 너무 욕심부리는 것 같아." 옆에 있던 하예담도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나오는 건 아니잖아? 결국 우리 모두 같은 가족이잖아..."
하세령이 그 10%의 지분을 회수한다면 유씨 가문은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된다. 하예담이 꿈꿔왔던 유 씨 가문 안주인 자리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질책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하세령은 들은 체도 않고 그대로 폐공장을 나섰다. 그들이 아무리 소리치고 붙잡아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남겨진 모두의 가슴 속에는, 오름이 저리는 극심한 공포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거기 서! 하세령!" 유이준의 격앙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파혼을 하겠다고? 지분을 회수한다고? 대체 무슨 소리야! 지금 여기서 분명히 해. 설명도 없이 그냥 가지 말고!" 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분노와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유이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하세령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당황한 그는 성큼성큼 하세령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하세령의 어깨를 붙잡아, 어떻게든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유이준의 손이 하세령의 어깨를 막 잡으려 할 때 믿을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났다!
유이준을 등지고 있던 하세령은 등 뒤로부터 번져오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암흑 세계의 여왕으로 살아남은 본능이, 순식간에 발동한 것이었다. 하세령은 몸을 틀어 유이준의 손길을 정확히 피했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잡으려던 유이준의 손등을 정확히, 세게 쳐냈다.
"아악!" 순식간이었다! 유이준은 비명을 질렀고, 하세령이 쳐낸 손등을 타고 극심한 통증이 온 몸에 퍼졌다. 유이준은 팔 전체가 마치 감전된 듯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뒤로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밀려났고, 엉거주춤 허리를 굽혀 겨우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입이 떡 벌어진 채 넋 놓고 그녀만 바라볼 뿐이었다.
유이준은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격투기 판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으며 해천시의 왕립 육군 사관 학교 출신인 전설적인 격투 마스터, 강범준의 수제자로 입문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이토록 허망하게 밀려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여태껏 연약하고 무능하다고 여겨졌던 하세령에게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밀려났다. 이게...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