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그래!" 류천의 대답은 단호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두 글자에 송지유의 심장은 마치 무거운 주먹으로 한 대 맞은 듯 아파 났고, 그 고통은 점점 깊어져 가슴을 옥죄여오는 듯했다.
"미안해." 류천은 짧게 한마디 던진 채 급히 자리를 떠났는데 그의 사과는 너무도 가볍고 무력했다.
송지유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류천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무딘 칼로 심장을 한 땀 한 땀 찟껴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며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고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한기가 올라와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몇 년 전, 류천이 류씨 가문을 물려받았을 때, 류씨 가문은 자금줄이 끊기며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류천은 본인 입으로 직접 그녀와 약속했었다. 지금은 회사가 불안정해서 그녀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줄 수 없다고, 그리고 회사가 안정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송지유는 그 약속을 가슴 깊이 새기며 가족들이 류천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썼고, 하루 빨리 그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류천이 무명에서 주목 받는 유명인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데 그 3년간 함께 했던 시간이 그에게는 단순한 거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니!
애초에 이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만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던 것일까?
3년간의 시간과 노력이, 류천의 첫사랑 앞에서는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송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고 가슴 속의 고통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주체 안 될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 서 있던 류안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송지유, 네가 그 동안 끈질기게 매달리지 않았으면 우리 오빠가 너 같은 학력도, 집안 배경도 없는 시골 여자랑 결혼할 리가 없었어. 네 주제를 알았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류씨 가문에서 나가!"
송지유는 류안의 뻔뻔한 말에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다. "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류씨 가문도 없었을 거라는 거, 잊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류안은 송지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네가 없어도 우리 류씨 가문은 잘만 돌아갈 거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송지유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류씨 가문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녀를 이렇게 생각했던 걸까?
"됐어! 오늘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류천의 어머니 신혜숙은 불쾌한 표정으로 일어나 송지유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는 혐오가 가득했고,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지금 네 꼴을 봐. 너 혼자 망신을 당하는 건 작은 일이지만, 우리 류씨 가문까지 망신당하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말을 마치고, 신혜숙은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하객들을 맞이했다.
송지유는 그 자리에 서서 하나 둘씩 떠나는 하객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결혼식이 어떻게 말도 안되게 웃음거리로 되어 버린 걸까?
왜 그녀의 진심은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혀야 하는 건가?
단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일까?
송지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다시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녀는 마치 툭 건드리면 깨질 듯한 유리구슬처럼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30분 후, 송지유는 마치 갈 곳 없는 유령처럼 쓸쓸한 거리를 배회하며 방황했다.
하늘에서는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폭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멀리 있는 버스 정류장 외에는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마지못해 맨발로 빠르게 뛰어가던 중, 날카로운 돌에 걸려 발바닥까지 베였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를 악물고 절뚝절뚝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순간, 예리한 차의 경적 소리가 쓸쓸한 거리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빠르게 달려오는 차를 보며 송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회차 3
송지유의 머리는 순간 텅 비어버렸고, 두 다리가 굳어진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는 마치 검은 번개처럼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강한 기류에 송지유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사고 차량이 그대로 달아날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 주변은 텅 비어 있어 아무런 증거도 잡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 차는 다시 돌아와 송지유의 앞에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제로 만든 검은 구두였다. 그리고 길고 곧은 다리가 단호한 걸음으로 송지유를 향해 걸어왔고, 검은 우산이 그녀에게 기울어져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주었다.
"괜찮아요?" 우승원의 차갑고도 낮은 목소리가 송지유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송지유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날렵한 이목구비와 뚜렷한 턱선을 가진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서 있었다. 특히 그 깊고 검은눈동자가 밤빛에 은은히 빛났느데 사람의 마음을 주체없이 매혹시켰다.
이 눈빛...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송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다리의 찰과상과 발바닥의 상처로 인해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강인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넓은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우승원의 품에 안기는 순간, 그 특유의 차가운 기운이 송지유의 온 몸을 감쌌다.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남자의 가슴에 닿았고, 손바닥은 그의 탄탄한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몇 겹의 옷에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육의 곡선은 뚜렷하게 느껴졌다.
송지유는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우승원을 밀어내려 했지만,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번쩍 들려 안겼다.
그 행동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 놔주세요!"
류천과 3년을 알고 지냈어도 단순히 손만 잡아봤을 뿐인데, 이 낯선 남자의 뜬금없는 돌발 행동에 그녀는 불안감을 느꼈다.
우승원은 시선을 내려 담담하게 송지유를 바라보았다. "다쳤잖아요.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합니다."
"저,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두 사람의 친밀한 접촉이 송지유를 불편하게 했다. 남자의 차가운 향기가 그녀의 코를 스치자 마치 포위당한 듯한 느낌이 들며,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움직이지 마세요." 남자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는 순간 송지유의 모든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차 안에 앉은 순간, 정면으로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우승원은 손을 뻗어 에어컨을 끄고, 송지유의 얇은 옷차림을 보며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요."
"감사합니다." 그 외투에는 우승원의 향기와 체온이 배어 있었고, 송지유는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우승원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붉은 기를 보며 눈가에 짧은 웃음기가 스쳤다.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은 나예요."
"네?" 송지유는 우승원을 바라보았다.
우승원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사과를 받아주고, 보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차는 빠르게 달려 근처 병원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송지유가 혼자 걷겠다고 우기자, 우승원은 그녀의 절뚝거리는 걸음을 배려하며 천천히 응급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송지유가 응급실에서 나왔을 때, 멀리서 우승원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그녀를 발견했는지, 그는 급히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이건 제 연락처예요.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전 별다른 요구가 없어요." 송지유는 우승원이 건네준 명함을 거절했고, 일이 끝났으니 더 이상 연락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질질 끄는 것을 가장 싫어했으니까.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코트를 건네주었다. "옷은 돌려드릴게요. 세탁비는 제가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우승원은 송지유가 건네준 옷을 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눈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냥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나보다 당신에게 더 필요할 텐데."
평범한 말 한마디였지만, 송지유는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오늘 너무 깊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이렇게 감동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송지유는 우승원의 도움을 거절하고 뒤돌아 섰다. 그녀는 지금 류씨 가문으로 돌아가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했다.
우승원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 속에 은은한 빛이 깃들었다.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