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존 매튜스의 손길에 데이나 앨런은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긴장으로 몸을 떨었다.
"벌써 항복하는 거야?" 존은 놀리듯 말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말속에 담긴 즐거움과 도발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데이나는 그의 팔을 꽉 움켜쥐었고, 손톱으로 그의 피부를 눌렀지만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거칠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데이나는 결국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조용했고, 존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 탁자에는 수표 한 장과 시계가 놓여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피부에 남은 자국들이 어젯밤 그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녀는 존과의 관계에서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존의 관심은 오로지 그녀의 몸에만 있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그녀는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에 그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그의 금전적 지원에 대한 대가로 암묵적인 계약을 맺었다. 그러니 그의 비밀 연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적으로 거래의 관계였고, 매번 만남에 잇따른 보상이 주어졌다. 침대 옆 탁자에 남겨진 수표는 존의 만족을 금액으로 나타낸 것이었고, 그저 그들의 암묵적 계약의 일부일 뿐이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데이나는 고개를 돌려 욕실에서 나오는 존을 바라보았다. 그의 다부진 근육은 달라붙은 물방울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고, 허리에는 수건이 느슨하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데이나는 그의 몸매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침대에서 내려와 그가 입을 옷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존의 방문은 오로지 자신의 성욕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녀와 밤을 지새지는 않았다.
그는 셔츠 단추를 채워주는 데이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왜? 만족하지 못했어?" 존은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요." 데이나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다. 데이나는 항상 우아한 태도로 자신의 궁핍함을 감추곤 했다.
그녀는 존이 조용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옷을 입히는 데만 집중했다.
무언의 정적이 흐르던 와중, 존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나 이제 결혼해."
그 말에 흠칫하던 데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존의 비서로서 그의 일정을 관리하고,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 매튜스가 선택한 잠재적인 결혼상대와의 만남을 주선하곤 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여자들은 결코 존을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래서 데이나는 단지 존이 자신의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형식적으로 보는 맞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그런 맞선들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혹시 파이오니어 테크 CEO의 딸이에요?" 데이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폭풍이 일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녀가 가장 최근에 존에게 주선해준 맞선 상대였다.
"맞아."
존의 대답은 비수마냥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잘 됐네요. 축하해요."
"내일 밤에 양가의 부모님들이 상견례를 하기로 했어. 네가 장소를 안배해." 그의 어조는 무덤덤했고, 방금 그녀와 살을 섞은 남자가 자신이 아닌 듯 무심하기만 했다.
"알겠어요." 데이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존은 아무 말 없이 떠났다.
데이나는 창가에 서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존의 차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엔진의 웅얼거림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온통 혼란과 슬픔으로 뒤엉켜 있었다. 데이나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뜬눈으로 지냈다.
아침을 깨우는 알람이 울리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데이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거르고 화장으로 검게 번진 눈 밑을 감췄다.
그럭저럭 준비를 마치고 회사로 향하던 중, 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당장 임원진을 소집하라는 지시였다.
회사에 도착한 데이나는 재빨리 팀원들에게 회의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존의 집무실로 가서 그의 하루 일과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그녀는 각 부서에서 제시한 서류들을 분류별로 꼼꼼하게 정리해서 책상에 놓아두었고, 집무실내 향기와 온도도 적절하게 설정하였다.
바로 그때, 존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그의 존재감은 위풍당당했고, 깔끔하고 완벽하게 맞춤 제작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유독 마음이 쓰이는 건 그의 찌푸린 미간과 심각한 표정이었다. 데이나는 재빨리 그에게 모닝 커피를 건네주고 하루 일정을 차근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존은 그녀가 준비한 서류들만 검토할 뿐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데이나는 조용히 시계를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귀띔했다. "대표님, 회의 시간입니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회의가 끝나서야 데이나는 마침내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발견했다.
"파이오니어 테크의 매디슨 스콧 씨가 보내신 거예요." 그녀의 동료 중 한 명이 곁에 다가와서 말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데이나는 바로 선물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들어있는 고급스러운 팔찌를 발견했다. 분명히 고가의 팔찌였고, 브랜드 로고가 눈에 띄게 새겨져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저희들 모두가 하나씩 받았어요." 곁에 있던 동료가 덧붙였다.
"스콧 씨는 확실히 감동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한 동료가 이 고급스러운 팔찌를 살펴보며 감탄을 했다. "방금 확인했는데, 이 팔찌의 가격이 무려 1300만원이에요."
"하지만 가격만이 문제가 아니죠." 다른 동료도 이에 동참했습니다. "이 팔찌에 담긴 메시지를 다들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자신의 남자라는 걸 보란 듯이 주장하고 있잖아요."
존과 매디슨의 약혼 소식이 아침부터 퍼져 나가면서 사무실은 수군거림으로 들끓었다.
"그럼 이 팔찌를 받아야 하나요?" 누군가가 데이나에게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죠. 미래의 사모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거절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데이나는 곁에 있던 동료에게 팔을 내밀며 팔찌를 채워달라는 시늉을 했다.
회차 2
저녁이 되자, 데이나는 일찍 레스토랑에 도착해 메뉴부터 룸 배치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지 확인했다. 곧 매튜스와 스콧 가족이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존과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앞장섰고, 매디슨이 바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매디슨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 크레이그 스콧만이 상견례에 참석했다. 데이나는 그들을 안내하여 지정된 자리에 앉힌 뒤 물을 따르고 시중을 드느라 바빴다.
매디슨은 데이나의 손목에 찬 팔찌를 보고 넌지시 물었다. "이 분도 매튜스 그룹의 일원인가요?"
여성들은 종종 미묘한 경쟁심을 느끼곤 하는데, 특히 데이나처럼 눈에 띄는 미모의 여성을 만났을 때는 더욱 그랬다. 데이나는 오늘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저 애는 존의 비서란다. 헬레나는 데이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름은 데이나라고 해."
"아, 그렇군요. 어쩐지 똑 부러져 보인다 했어요,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네요." 매디슨이 정중하면서도 절제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스콧 씨." 데이나는 형식적인 웃음을 유지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항상 경계하고 있던 헬레나는 시계를 흘끗 보고 데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론다에게 매디슨을 위한 선물을 가져오라고 부탁했어. 그녀가 도착했는지 확인해 주겠니?
데이나는 그녀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숨은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가 룸을 나서기도 전에 론다 블레이크가 화려한 보석 상자를 들고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들어왔다. 론다가 보석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부유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조차 사로잡을 만큼 눈부신 보석 컬렉션이 들어있었다.
크레이그는 눈에 띄게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너무 귀중한 선물이네요."
헬레나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매디슨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매튜스 가문의 미래 며느리에게 최고의 축복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러고 나서 존을 돌아보며 그를 재촉했다. "아들, 매디슨을 도와 목걸이를 착용해 줘야지 않겠니?"
성관계를 제외하고는 무뚝뚝한 성격인 존은 헬레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며 손수 매디슨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헬레나는 그 둘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목걸이는 존이 너를 위해 맞춤 제작한 거야, 매디슨."
"어머님,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도요." 매디슨은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존을 향해 돌아서서 그에게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데이나, 네가 보기엔 어때? 저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헬레나는 의도적으로 데이나를 붙잡고 넌지시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존도 그녀의 반응을 궁금했던지 시선을 돌렸다.
데이나는 망설임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말 그렇네요. 실제로 두 분은 어주 잘 어울려요."
존과 곁에서 지낸 수년 동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는 능력을 연마했다.
헬레나는 데이나의 반응에 기뻐하는 듯했고,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젊은 커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크레이그 역시 매튜 가문과 자신의 가족을 잇게 될 아름다운 미래에 흥분하며 열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크레이그와 헬레나는 존과 매디슨을 위한 데이트를 계획한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스토랑을 나섰다.
데이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가슴 깊숙이 밀려오는 공허감을 느꼈다. 존과 매디슨마저 떠나자 룸에 홀로 남겨진 데이나는 얼굴에 어렸던 미소를 거두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씁쓸한 마음에 그녀는 집보다 근처 술집을 찾았다. 주변의 분위기에 어울려 혼란스러운 감정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졌다.
"앨런 씨?" 친숙한 목소리가 그녀 머릿속의 잡념을 몰아냈다.
데이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바라보는 라이언 심슨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은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올려져 있었으며, 재킷은 태연하게 바 의자 위에 걸쳐져 있었다. 그의 세련된 외모는 그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날카로움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심슨 씨." 데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지만,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높였다.
라이언은 어렸을 때부터 존과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하지만 현재 그룹간의 치열한 경쟁 관계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혼자에요? 보아하니 술로 달래고 싶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죠?" 라이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가벼운 조롱이 섞여 있었다. 데이나는 대답 대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충 넘어가려 했다. 라이언의 느긋한 자세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녀의 현재 상태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매튜스 가족과 스콧 가족이 상견례를 했다면서요? 혹시 결혼식 날짜까지 잡은 거예요?" 라이언은 무심코 담배에 불을 붙였고, 그의 시선은 데이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데이나와 존의 관계는 주변에 비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은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었다.
"축하인사라도 전하실 생각이신가요? 데이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아쉽게도 상견례는 이미 끝났어요."
라이언은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발견하려는 듯 그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앨런 씨의 아량은 참으로 넓으신 것 같네요."
데이나는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들끓는 속내를 감췄다. "저는 단지 제 직책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떳떳이 월급을 받을 수 있겠어요?"
라이언의 관찰은 예리했다. 데이나의 표정과 반응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조절되어 마치 보이지 않는 방패를 쓴 듯했다.
"솔직히 말해서, 존과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 그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어요? 장차 매튜 부인이 되는 게 앨린 씨의 꿈이 아니에요?"
데이나의 미소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매튜스 씨는 제 일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는 상사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에요. 심슨 씨, 무슨 오해라도 있으신 모양이네요?"
그러자 라이언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가까이 다가서서 조롱 섞인 말투로 속삭였다. "내가 너한테 엄청난 돈을 주며 하룻밤 같이 지내자면 어쩔래? 고려해 보겠어?"
회차 3
라이언이 비웃음을 흘리며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존이 그녀를 가볍게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존? 너 매디슨과 데이트를 한다며? 왜? 매디슨이 네가 싫대?" 라이언은 갑자기 나타난 존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쌀쌀한 어조에는 존을 향한 도발이 섞여 있었다.
존은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응수했다. "궁금해? 그렇게 궁금하면 매디슨한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던가." 그러고 나서 그는 데이나를 술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술집을 나선 존은 무작정 그녀를 이끌고 길가에 주차된 세단을 향해 걸어갔다. 데이나가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차 뒷좌석 문을 벌컥 열더니 그녀를 거칠게 밀어 넣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의 친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못내 불안해진 데이나는 창문 쪽으로 몸을 옮겨 존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데이트는 잘 안 됐나요?"
그녀는 존과 매디슨을 위해 저녁 시간을 준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심지어 호텔 방도 예약했지만, 그렇게 빨리 끝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존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시선을 맞추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왜? 네가 남자 꼬시는 걸 내가 방해한 거야?"
데이나는 그의 갑작스런 비난에 순간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라이언 씨와는 우연이 만나 게 된 거예요. 워포드는 워낙 작아서, 읍."
그녀의 해석은 존의 입맞춤 때문에 짧게 끝났고, 그의 강렬한 키스에서 왠지 모를 분노가 느껴졌다.
데이나는 그의 태도 변화를 감지하고 그를 단호하게 밀어냈다. "매튜스 씨!" 그녀는 필사적으로 반항하면서 또다시 접근해오는 그를 막았다.
데이나의 저항에 존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가 이렇게 거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것은 그를 짜증나게 했다.
"존! 이제 약혼녀가 생겼잖아. 그러니 우린 더 이상 이런 관계를 지속하면 안돼!" 데이나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이 결정을 두고 며칠 동안 고민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존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이나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매튜스 씨, 당신이 결혼한 후에도 제가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할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마 당신도 믿지 않을 거예요. 아직 더 늦기 전에 저도 저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겠어요."
그녀의 어조는 마치 그들의 과거가 감정이 전혀 없는 거래에 불과했던 것처럼 무심했다.
존의 시선은 다시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그럼, 아까 술집에서 정말로 라이언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거야?"
"네." 데이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순간 냉소를 터뜨리더니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 크게 실수하는 거야. 그 자식은 항상 내 것에만 관심이 있거든. 그러니 그놈이 널 원하는 건 네가 내 여자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움츠러들 줄 알았던 데이나의 대답은 존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게 어때서요? 저는 이런 부류의 남자가 처음이라 신선하고 좋기만 한데. 돈도 아낌없이 퍼줄 것 같고."
"그래? 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존이 이를 갈며 험악한 기운을 풍겼다.
데이나는 그의 목소리에 숨겨진 위험을 전혀 못 느낀 듯 침착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매튜스 씨. 저는 공과 사를 정확히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말과 함께 차 문을 향해 손을 뻗으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녀의 거동을 눈치 챈 존은 단호하게 차 문을 잠갔다.
그녀가 반항하기도 전에 존은 그녀를 좌석에 눕혔고, 거칠게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옷 속을 더듬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우리 관계가 언제 끝날지 네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언제부터 너 혼자서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어?"
"존 매튜스! 뭐 하는 거야! 제발 정신 차려." 데이나가 그의 성과 이름을 합쳐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분노를 그에게 알리려는 거였다.
하지만 존은 그녀의 분노를 온전히 무시했다. 그의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치마 속을 더듬었고,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속옷을 헤집고 더욱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데이나는 순간 느껴지는 고통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고, 존은 벨트를 풀자마자 무작정 그녀를 덮치며 차를 뒤흔들었다.
다음날 아침, 데이나는 자기 침대에서 깨어났다. 방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전혀 따뜻함을 느낄 수 없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데이나는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는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때, 문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가 그녀를 다시 현실로 끌어들였다. 비몽사몽인 데이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의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밖에 존이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사람들을 이끌고 서있는 론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론다?" 데이나는 캐미솔을 입은 몸에 얇은 로브를 더욱 꼭 조이며 목에 보이는 자국을 가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론다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방으로 성큼 들어서서 그녀의 앞을 막아서더니 덤덤히 말했다. "앨런 씨, 미안하게 됐네요." 그녀가 주변을 둘러싼 무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따라온 사람들은 서둘러 데이나의 소지품을 가방에 챙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녀를 가방과 함께 밖으로 밀어냈다.
3월 초의 추위가 그녀의 피부를 날카롭게 찔렀고, 그녀가 걸친 얇은 옷은 그 추위에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하지만 론다는 데이나가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동정을 느끼기는커녕 바로 그녀 앞에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매튜스 부인님께서 앨런 씨를 높이 평가하시더라고요. 앨런 씨는 분명 현명한 처사를 할 거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제 보니 부인님의 판단이 틀리신 것 같군요. 그러니 이제 부인님을 모셔왔던 제가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아야죠." 론다는 능멸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론다의 표정에서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데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무리 논쟁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님께서 그러셨어요. 예전대로 협조를 유지하시면 어머니의 치료비를 계속 부담해 주실 것이라고요. 게다가, 앨런 씨와 대표님은 정말 오랜 인연이 있잖아요." 론다가 거만함이 묻어나는 어조로 덧붙였다. 마치 평소 헬레나한테서 느꼈던 경멸이 그대로 그녀 몸에 묻어있는 듯했다.
아버지를 잃고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데이나는 자신이 예전보다 더욱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맞닥뜨린 봉변들과 론다의 경멸, 그리고 지금 살을 에이는 추위는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눈에 눈물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인 캐롤라인 허드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허드슨은 가운 차림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여기가 모두 단독 주택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온 세상이 이 참사를 알았을 거야." 데이나는 농담을 하며 좌절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캐롤라인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코트를 데이나에게 걸쳐주었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존 매튜스의 번호를 나한테 줘! 내가 당장 연락해서 속 시원히 욕이라도 하게." 캐롤라인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데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대신해 존한태 단단히 따질 작정이었다.
"제발, 나한테 마지막 자존심만이라도 남겨줘." 데이나는 캐롤라인의 팔을 붙잡고 간청했다.
데이나의 절친인 캐롤라인은 그녀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친구의 딱한 처지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 역시 자기가 소란을 피운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마지못해 데이나를 도와 바닥에 널려진 그녀의 소지품을 모았다. "어서, 여기서 나가자."
갈 곳이 없었던 데이나는 잠시 캐롤라인의 아파트에서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가는 길 내내 론다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그녀는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어머니가 묵고 있던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어머니의 개인 소지품도 사라져 있었다.
데이나는 급히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았다. "우리 엄마는 어디 계시죠?"
"수잔 앨런 환자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환자분은 아까 퇴원했어요." 간호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희 어머니를 데려간 사람은 누구에요?" 데이나는 두려움에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눅잦히며 다그쳐 물었다.
"그냥 매튜스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에요." 간호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데이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