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조소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실부인이 첩을 내려다보듯 한 눈빛으로 강예진을 바라보았다.

"강 비서, 주혁이의 부하로 일하면서 우리 관계를 뻔히 다 알면서도 계속 이렇게 선 넘고 도발하는 거... 정말 무지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죄송해요, 조 앵커님." 강예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더니 곧바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아, 또 실수했네요. 성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했는데, 제가 잘못했어요. 사과드릴게요.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보기만 해도 가식이 가득했다.

조소희는 그녀가 일부러 스스로를 낮춰 성주혁의 동정을 끌어내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단칼에 잘라 말했다. "강 비서의 사과는 제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네요. 그런 가식적인 억울함에 또 누구는 가슴 아파할 테니까."

"주혁아, 사모님께서 나 용서하지 못하시겠나 봐. 분명 어제 클럽에서 일어난 일 때문일 거야. 네가 나를 대신 해서 사모님께 좀 해명해 줘." 강예진은 성주혁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투에는 부드럽고 나긋한 울림이 담겨 있어, 듣는 이의 귓가를 간질이듯 스며들었다.

조소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고 옆에 서 있는 성주혁을 힐끔 바라봤다.

성주혁은 어느새 손에 담배를 쥔 채,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사실인데 뭘 해명해."

"사모님께서 날 너희들 사이를 방해 한 불륜녀로 오해하실까 봐 너무 걱정돼." 강예진은 끝까지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성주혁은 또다시 조소희의 가슴팍에 비수 같은 말을 꽂았다. "예진아, 약 좀 가져다 줘. 쓸데없는 사람이랑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강예진 앞에서 성 사모님인 나는 그냥 쓸데없는 사람에 불과하구나...'

조소희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겨우 참으며 말없이 약국을 빠져 나왔다.

차에 올라탄 뒤에도 그녀는 손이 덜덜 떨려 두 번의 시도 끝에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수십 번 되뇌었다. '화내지 마. 화내지 마...'

3개월 전의 건강검진에서 그녀는 왼쪽 가슴에 2mm짜리 결절이 있다는 검진결과를 받았고, 이미 담당 의사와 약속을 잡아 내일 오전에 재검사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전에 산부인과 의사인 변지연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난 나이도 어린데, 몸에 이런 게 생길 수가 있어?"

그러자 변지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병은 대부분 스트레스 때문이야.너 그 유선 결절도, 완전히 성주혁 때문에 속을 썩여서 생긴 병이야."

당시, 그녀는 입으론 변지연에게 너무 오버한다고 했지만, 속으론 그 말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성주혁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만약 성주혁에 대한 감정이 3년 전 그대로였다면, 그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그녀의 마음은 무덤덤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는 거였다.

어느덧 해가 지고 거리도 어둑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를 몰고 이 거리 저 거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강성에서 자신이 쉴 수 있는 곳은 넥서스 빌라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넥서스 빌라는 성주혁의 이름으로 된 부동산이었고 두 사람의 신혼집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전에 성주혁이 재산 분할을 공증해둔 탓에, 그녀에게 남은 건 단지 거주 권한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집에 발을 들이는 매 순간, 그녀는 마치 '세입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설령 돌아간다 해도, 텅 빈 집 안에서 혼자 멍하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어차피 성주혁은 일주일 중 절반 이상을 외부 일정으로 보내느라 늘 바빴고, 새벽이 훌쩍 지난 뒤에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매일 야근을 하는 것이 조소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사후 피임약을 사려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평소처럼 방송국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을 가득 메운 자극적인 담배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성주혁은 거실 통창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입에서는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승기 선생님이 이마에 흉터 안 남는다고 하셨잖아. 만약 그래도 불안하다면 모레 경성에 있는 전문의한테 같이 가보자. 그리고 설령 흉터가 남는다고 해도 난 널 싫어하지 않을 거야..."

조소희는 약국에서 봤던 강예진의 이마에 있던 거즈를 떠올리며, 지금 그가 누구와 통화 중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조소희의 가슴속에 피어 올랐던 반가움과 기대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로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녀는 말없이 가방과 외투를 내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세수를 마친 그녀가 로션을 바르고 있을 때, 성주혁이 욕실 문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아침 여덟 시, 어머니 친구분이 강성으로 오셔. 네가 대신 공항에 가서 픽업 좀 해줘."

조소희는 성주혁이 먼저 말을 거는 날엔, 절대 좋은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오시는 분은 어머니의 오랜 친구이자 회사의 중요한 파트너야. 그러니까 이틀 정도 휴가 내고 강성 구석구석 좀 모시고 다녀. 돈은 얼마가 들든 내가 전부 정산할 테니까." 성주혁은 마치 그녀가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거라 확신한 듯,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바로 맞은편의 서재로 들어갔다.

조소희의 눈가에는 억눌렀던 감정이 번져 올랐고, 막 얼굴을 닦은 일회용 티슈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다른 사람 시켜. 난 내일 오전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

"이미 다 지시해놨어. 윤호가 풀 코스로 책임지고 동선과 식사를 전부 챙길 거니까, 넌 그냥 말동무만 해주면 돼."

성주혁은 그녀의 말을 개의치도 않고 서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조소희는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남자를 보며 불만의 눈빛을 보냈다. "나 내일 오전 병원에서 재검진 받아야 해."

"무슨 재검진?"

"내가 이전에 말했잖아. 건강검진 때 왼쪽 가슴에서 결절이 발견됐다고. 내일이 재검진 하는 날이야."

"자그마한 결절 정도는 며칠 미뤄서 재검진 해도 괜찮잖아." 성주혁은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조소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일정을 고집했다. "어렵게 전문의 진료 예약한 거야. 난 미루고 싶지 않아."

그러자 성주혁은 냉정한 목소리로 받아 쳤다. "너랑 어머니 사이가 늘 서먹했잖아. 이번 기회에 그 친구분이라도 잘 챙겨드리면, 시어머니랑 관계가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잖아."

그의 말투엔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 "내가 말한 대로 진행해."

조소희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성주혁의 거부할 여지가 없다는 듯한 강력한 눈빛 하에 다시 입을 다물었고, 한참 후에야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어."

방으로 돌아와서야, 그녀는 눈가가 젖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힐끗 확인한 조소희는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화번호가 떴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그 번호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버렸다.

그날 밤, 성주혁은 계속 서재에 있었고 침실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조소희가 잠에서 깼을 때, 성주혁은 이미 정장을 차려 입고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그의 눈 밑에는 연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제된 외모와 세련된 분위기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었다.

"30분 뒤에 윤호가 주차장에서 기다릴 거야." 성주혁은 손목시계를 차며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하지만 그 시선은 너무도 짧고 담담해서 조소희는 미처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현관문을 여는 성주혁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 비서가 사람 더 잘 챙기잖아. 나보다 더 어울릴 텐데?"

성주혁은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성 사모님은 너야. 근데 이런 자리에 예진이가 나가면, 밖에서는 예진이를 첩이라고 욕설하겠지."

'그러니까, 결국 강예진을 보호하기 위해 날 내세운 거였어.'

아마도 그는 어젯밤 강예진을 위해 제로 클럽에서 사람을 때린 일이 인터넷에 퍼지며 그와 조소희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뒷담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찬 바람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고, 조소희는 그 싸늘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조소희는 도윤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 온라인에 주혁이랑 강 비서에 관련된 루머들이 많잖아요. 주혁이는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래요?"

하지만 도윤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 후로도 조소희는 여러 방식으로 돌려 말해봤지만, 도윤호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9시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도윤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소희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쪽에서 비행기 타기 직전에 갑자기 일정을 바꾸셨답니다. 계획은 다음 주로 미뤄졌습니다."

조소희는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도윤호의 앞에서 체면이 깎일 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도윤호는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 줬고, 조소희는 접수하고 나서야 대기 환자가 열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전에 했던 예약은 취소된 상태였으니, 그녀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는 유방 초음파 결과를 받았다. 비록 사진만 봐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지만, 글자로 적힌 내용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 곳에는 '왼쪽 유선 결절, 2.5mm'라고 적혀있었다.

조소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3개월 전만 해도 2.0mm였는데, 지금 이 늘어난 0.5mm는 작은 수치여도 분명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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