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서재 안에는 은은한 조명을 밝히는 스탠드 하나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선 조소희의 얼굴엔 지금껏 본 적 없는 처연함과 단호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혼'이라는 두 글자는 그녀가 모든 기대를 소진하고 단 한 번의 용기를 끌어 모아 꺼낸 최후의 선언이었다.

성주혁은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소희를 바라봤다. "조소희,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조소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끝에 미세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나 이혼하고 싶어."

성주혁의 잘생긴 얼굴 위로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그는 라이터에 불을 일궜고 하얗게 피어 오른 담배 연기가 주변을 뿌옇게 감쌌다.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조명 아래서 번져나가는 연기 사이로 더욱 몽환적으로 보였고, 그 깊은 눈동자에서는 감정이 1도 읽히지 않았다.

조소희는 마음속의 고통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사랑도 없는 혼인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게 나아."

"내 명의로 된 자산은 결혼 전에 전부 공증해뒀어. 그러니 진짜 이혼할 거라면 넌 한 푼도 못 가져갈 거야." 성주혁은 거칠게 담배를 들이마시고는 재를 툭툭 털어냈다.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사실, 수많은 실망이 쌓이고 쌓여 결국은 절망이 되었을 뿐이다.

성주혁이 강예진에게 보여주는 그 끝도 없는 편애는 이제 막 움트려던 그녀의 감정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렸다.

"3년 전, 성씨 그룹이 강성의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접고 지성에 투자한 거, 그게 바로 널 위한 결혼 선물이었지. 200억 넘게 쏟아부은 덕에, 그 고리타분한 주태준이 결국 지성에서 시장 자리에까지 올랐고. 성주혁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성에 투자했던 그 프로젝트에서는 단 한 푼의 이윤도 생기지 않았어. 이런 상황에서 이혼하자고? 참, 뻔뻔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급소를 찔린 조소희의 얼굴에는 미묘한 흔들림이 지나갔다.

그녀의 의붓아버지 주태준은 3년 전에 성주혁이 지성에 대규모 투자를 해준 덕에 세 명의 부시장 후보 중에서 단번에 시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혼을 결심한 건 그 모든 걸 냉정하게 되짚은 뒤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성주혁이 가끔 보여주는 사소한 다정함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그가 강예진을 위해 누군가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려쳤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녀의 심장은 죄어올 듯 아팠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난 더 이상 너랑 강 비서 사이를 방해하지 않을 거야." 조소희는 입술을 끌어올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처절한 단념이 묻어 있었다.

"넌 애초에 나랑 예진이 사이를 방해할 자격도 없어." 그는 담배 연기를 느긋하게 내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예진이, 얼마나 다정하고 애정이 느껴지는 호칭인가!' 성주혁은 오직 침대 위에서 친밀한 순간에만 다정하게 그녀를 "소희야"라고 불렀다. 평소에는 늘 차가운 목소리로 성까지 붙여 "조소희"라고 부를 뿐이었다.

조소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내가 이처럼 일말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생활이 지겨워서 그래."

"네가 어떻게 송 사모님 자리에 앉았는지 잊었나 봐?" 성주혁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눈빛엔 노골적인 비아냥이 가득했다. "잘 생각하고 다시 말해봐. 네가 정말 나한테서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 순간, 조소희의 머릿속엔 3년 전의 그 끔찍했던 비 오는 밤이 떠올랐다

억울함, 수치심.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녀의 가슴을 휘감았다.

"넌 날 이용해서 결혼하고, 주태준은 초고속 승진까지 했어. 그때부터 넌 이미 각오했어야지. 이 혼인의 룰은 하나뿐이야. 내가 끝내자고 할 때까지, 넌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 해. 존중? 그딴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성주혁은 침묵하는 조소희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조소희는 온몸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 그랬구나. 성주혁에게 이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존중할 가치조차 없는 거래에 불과했던 거야.'

그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이 결혼에 대해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이러한 기대감이 생기면 안 되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감정의 씨앗이 막 싹트기 시작할 무렵 뿌리째 뽑혀버렸다는 사실이다.

성주혁은 남은 불씨를 무심하게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껐다.

곧 맞은편 욕실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소희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결혼한 지 3년. 둘은 단 한 번도 평범한 부부처럼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간 적도, 같이 영화관에 간 적도, 밖에서 단둘이 밥을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부부다운 순간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침대 위에서 뿐이었다.

앞선 2년은 냉전 속에서 흘러갔다.

그리고 3년째에 들어서서야 관계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성주혁은 그녀에게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의 인내와 따뜻함을 보이기 시작했고 가끔은 명절에 안부를 묻거나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조소희도 어느 순간부터 성주혁이 점점 눈에 익숙해졌고 그의 취향을 파악하려 애쓰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그녀는 곧 여러 가지 아침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생활 패턴이 달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겹치는 유일한 시간이 잠자는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침 식사를 핑계 삼아, 그의 아침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려 애썼다.

조소희는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지 알면서도, 매번 또 그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감춰뒀던 그 작은 기대는 '강예진'이라는 이름 앞에서 매번 산산이 부서졌다.

'만약 성주혁이 날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세상에 이토록 오랫동안 결혼 사실을 숨겼을 리 없겠지.'

샤워를 마친 성주혁은 곧바로 옆에 있는 게스트 룸으로 들어갔다.

조소희는 심각한 수면 부족 탓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출근 전에 성주혁이 가장 좋아하는 블루마운틴 커피를 내려놓고 나왔다.

조소희는 강성 방송국의 경제 앵커였다.

요즘은 뉴미디어의 부상으로 방송국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녀가 진행하는 경제 인터뷰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꽤 높았다. 덕분에 그녀는 강성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인사였다.

사무실에 도착해 출근 체크를 마친 조소희는 갑작스레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재빨리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둔 비상용 과자를 꺼내 몇 조각 집어먹은 뒤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조소희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고 조금만 먹어도 바로 얼굴부터 티가 났다.

그래서 카메라에 잘 담기기 위해 그녀는 철저한 식단 관리를 유지해왔다.

매일 아침 삶은 달걀에 기름기 없는 닭 가슴살과 소고기, 소금기 없이 삶은 채소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165cm의 키에 체중은 47-48kg 사이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저혈당 체질이라 단것을 조금이라도 섭취하지 않으면 하루를 버틸 수 없었다.

게다가 구정이 다가오는 이맘때면 평소보다 업무량이 두세 배로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주 2회 진행하는 경제 뉴스 생방송 외에, 사전 녹화가 필요한 인터뷰 프로그램 <파이낸셜 투데이>, 거기에 강성 설날 특집 리허설 준비까지 겹쳐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으로 향한 조소희는 옆자리 여직원들의 수군거림을 통해서야 성주혁이 제로 클럽에서 누군가를 폭행한 사건이 이미 강성 SNS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소희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한편 온라인에서는 성주혁과 강예진을 '싱글 대표'와 '가엾은 신데렐라'로 포장하며, 온갖 로맨스 서사를 덧씌우고 있었다.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댓글로 성주혁에게 강예진이랑 결혼하라는 응원까지 보내고 있었다.

조소희는 눈 앞의 저칼로리 샐러드를 몇 입 먹지도 못하고 식욕이 싹 사라졌다.

퇴근 후, 그녀는 사후 피임약을 사기 위해 약국으로 향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부작용이 가장 적다고 알려진 수입 약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결제를 하려는 순간, 그녀는 마침 약국 안으로 들어오는 성주혁을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성주혁과 강예진이었다.

강예진의 이마에는 약 한 뼘 길이의 흰 거즈가 덮여 있었고 손등엔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딘가 여리고 다정해 보이는 그 모습은 어느 남자가 봐도 보호본능이 자극될 만했다.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며 약국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소희는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유독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아려왔다.

"주혁아." 조소희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인사를 건넸지만, 말투에는 어딘가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기색이 묻어 있었다.

성주혁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녀가 손에 든 사후 피임약에 시선을 주며 차갑게 한 마디를 던졌다. "용량 좀 더 챙겨. 괜히 사고 나게 하지 말고."

그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조소희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강예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어떻게든 체면을 지켜야 했다.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으니까." 조소희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를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하지만, 성주혁에게 아이란 그저 '사고'일 뿐이다.

아니면, 그녀와의 아이에만 제한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강예진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건 분명 다른 얘기겠지.

"우연이네요. 조 앵커님. 이렇게 약국에서 마주칠 줄이에요." 강예진은 천진한 표정으로 조소희를 바라보며 살갑게 인사했다. "약은 곧 독이에요. 아무리 수입 약이라도 많이 먹으면 부작용은 따라오기 마련이죠. 조 앵커님, 이런 거 자주 드시다간 조기 폐경이 올 수도 있어요."

강예진은 조소희와 성주혁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매번 '조 앵커'라고 부르며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무시했다.

조소희는 강예진에게 그런 배짱이 생긴 이유가 바로 성주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둘이 정말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성주혁은 나랑 이혼하고 강예진을 아내로 들이지 않는 걸까?'

이미 3년이 지난 지금, 주태준이 쥐고 있는 협박거리도 더 이상 성주혁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조소희는 더 이상 강예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말없이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주혁이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 하루 종일 속이 안 좋았는데, 조 앵커님은 아내라는 분이 참 실격이네요."

강예진의 날카로운 비아냥이 조소희의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조소희는 그 말이 거슬려 천천히 돌아섰고, 강예진의 도발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강 비서, 제가 주혁이의 아내라는 건 알고 있었네요?"

회차 3

조소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실부인이 첩을 내려다보듯 한 눈빛으로 강예진을 바라보았다.

"강 비서, 주혁이의 부하로 일하면서 우리 관계를 뻔히 다 알면서도 계속 이렇게 선 넘고 도발하는 거... 정말 무지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죄송해요, 조 앵커님." 강예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더니 곧바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아, 또 실수했네요. 성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했는데, 제가 잘못했어요. 사과드릴게요.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보기만 해도 가식이 가득했다.

조소희는 그녀가 일부러 스스로를 낮춰 성주혁의 동정을 끌어내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단칼에 잘라 말했다. "강 비서의 사과는 제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네요. 그런 가식적인 억울함에 또 누구는 가슴 아파할 테니까."

"주혁아, 사모님께서 나 용서하지 못하시겠나 봐. 분명 어제 클럽에서 일어난 일 때문일 거야. 네가 나를 대신 해서 사모님께 좀 해명해 줘." 강예진은 성주혁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투에는 부드럽고 나긋한 울림이 담겨 있어, 듣는 이의 귓가를 간질이듯 스며들었다.

조소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고 옆에 서 있는 성주혁을 힐끔 바라봤다.

성주혁은 어느새 손에 담배를 쥔 채,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사실인데 뭘 해명해."

"사모님께서 날 너희들 사이를 방해 한 불륜녀로 오해하실까 봐 너무 걱정돼." 강예진은 끝까지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성주혁은 또다시 조소희의 가슴팍에 비수 같은 말을 꽂았다. "예진아, 약 좀 가져다 줘. 쓸데없는 사람이랑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강예진 앞에서 성 사모님인 나는 그냥 쓸데없는 사람에 불과하구나...'

조소희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겨우 참으며 말없이 약국을 빠져 나왔다.

차에 올라탄 뒤에도 그녀는 손이 덜덜 떨려 두 번의 시도 끝에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수십 번 되뇌었다. '화내지 마. 화내지 마...'

3개월 전의 건강검진에서 그녀는 왼쪽 가슴에 2mm짜리 결절이 있다는 검진결과를 받았고, 이미 담당 의사와 약속을 잡아 내일 오전에 재검사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전에 산부인과 의사인 변지연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난 나이도 어린데, 몸에 이런 게 생길 수가 있어?"

그러자 변지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병은 대부분 스트레스 때문이야.너 그 유선 결절도, 완전히 성주혁 때문에 속을 썩여서 생긴 병이야."

당시, 그녀는 입으론 변지연에게 너무 오버한다고 했지만, 속으론 그 말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성주혁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만약 성주혁에 대한 감정이 3년 전 그대로였다면, 그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그녀의 마음은 무덤덤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는 거였다.

어느덧 해가 지고 거리도 어둑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를 몰고 이 거리 저 거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강성에서 자신이 쉴 수 있는 곳은 넥서스 빌라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넥서스 빌라는 성주혁의 이름으로 된 부동산이었고 두 사람의 신혼집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전에 성주혁이 재산 분할을 공증해둔 탓에, 그녀에게 남은 건 단지 거주 권한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집에 발을 들이는 매 순간, 그녀는 마치 '세입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설령 돌아간다 해도, 텅 빈 집 안에서 혼자 멍하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어차피 성주혁은 일주일 중 절반 이상을 외부 일정으로 보내느라 늘 바빴고, 새벽이 훌쩍 지난 뒤에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매일 야근을 하는 것이 조소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사후 피임약을 사려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평소처럼 방송국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을 가득 메운 자극적인 담배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성주혁은 거실 통창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입에서는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승기 선생님이 이마에 흉터 안 남는다고 하셨잖아. 만약 그래도 불안하다면 모레 경성에 있는 전문의한테 같이 가보자. 그리고 설령 흉터가 남는다고 해도 난 널 싫어하지 않을 거야..."

조소희는 약국에서 봤던 강예진의 이마에 있던 거즈를 떠올리며, 지금 그가 누구와 통화 중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조소희의 가슴속에 피어 올랐던 반가움과 기대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로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녀는 말없이 가방과 외투를 내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세수를 마친 그녀가 로션을 바르고 있을 때, 성주혁이 욕실 문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아침 여덟 시, 어머니 친구분이 강성으로 오셔. 네가 대신 공항에 가서 픽업 좀 해줘."

조소희는 성주혁이 먼저 말을 거는 날엔, 절대 좋은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오시는 분은 어머니의 오랜 친구이자 회사의 중요한 파트너야. 그러니까 이틀 정도 휴가 내고 강성 구석구석 좀 모시고 다녀. 돈은 얼마가 들든 내가 전부 정산할 테니까." 성주혁은 마치 그녀가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거라 확신한 듯,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바로 맞은편의 서재로 들어갔다.

조소희의 눈가에는 억눌렀던 감정이 번져 올랐고, 막 얼굴을 닦은 일회용 티슈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다른 사람 시켜. 난 내일 오전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

"이미 다 지시해놨어. 윤호가 풀 코스로 책임지고 동선과 식사를 전부 챙길 거니까, 넌 그냥 말동무만 해주면 돼."

성주혁은 그녀의 말을 개의치도 않고 서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조소희는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남자를 보며 불만의 눈빛을 보냈다. "나 내일 오전 병원에서 재검진 받아야 해."

"무슨 재검진?"

"내가 이전에 말했잖아. 건강검진 때 왼쪽 가슴에서 결절이 발견됐다고. 내일이 재검진 하는 날이야."

"자그마한 결절 정도는 며칠 미뤄서 재검진 해도 괜찮잖아." 성주혁은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조소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일정을 고집했다. "어렵게 전문의 진료 예약한 거야. 난 미루고 싶지 않아."

그러자 성주혁은 냉정한 목소리로 받아 쳤다. "너랑 어머니 사이가 늘 서먹했잖아. 이번 기회에 그 친구분이라도 잘 챙겨드리면, 시어머니랑 관계가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잖아."

그의 말투엔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 "내가 말한 대로 진행해."

조소희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성주혁의 거부할 여지가 없다는 듯한 강력한 눈빛 하에 다시 입을 다물었고, 한참 후에야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어."

방으로 돌아와서야, 그녀는 눈가가 젖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힐끗 확인한 조소희는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화번호가 떴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그 번호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버렸다.

그날 밤, 성주혁은 계속 서재에 있었고 침실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조소희가 잠에서 깼을 때, 성주혁은 이미 정장을 차려 입고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그의 눈 밑에는 연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제된 외모와 세련된 분위기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었다.

"30분 뒤에 윤호가 주차장에서 기다릴 거야." 성주혁은 손목시계를 차며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하지만 그 시선은 너무도 짧고 담담해서 조소희는 미처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현관문을 여는 성주혁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 비서가 사람 더 잘 챙기잖아. 나보다 더 어울릴 텐데?"

성주혁은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성 사모님은 너야. 근데 이런 자리에 예진이가 나가면, 밖에서는 예진이를 첩이라고 욕설하겠지."

'그러니까, 결국 강예진을 보호하기 위해 날 내세운 거였어.'

아마도 그는 어젯밤 강예진을 위해 제로 클럽에서 사람을 때린 일이 인터넷에 퍼지며 그와 조소희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뒷담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찬 바람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고, 조소희는 그 싸늘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조소희는 도윤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 온라인에 주혁이랑 강 비서에 관련된 루머들이 많잖아요. 주혁이는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래요?"

하지만 도윤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 후로도 조소희는 여러 방식으로 돌려 말해봤지만, 도윤호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9시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도윤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소희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쪽에서 비행기 타기 직전에 갑자기 일정을 바꾸셨답니다. 계획은 다음 주로 미뤄졌습니다."

조소희는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도윤호의 앞에서 체면이 깎일 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도윤호는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 줬고, 조소희는 접수하고 나서야 대기 환자가 열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전에 했던 예약은 취소된 상태였으니, 그녀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는 유방 초음파 결과를 받았다. 비록 사진만 봐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지만, 글자로 적힌 내용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 곳에는 '왼쪽 유선 결절, 2.5mm'라고 적혀있었다.

조소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3개월 전만 해도 2.0mm였는데, 지금 이 늘어난 0.5mm는 작은 수치여도 분명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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