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방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남자의 체온이 뜨거운 파도처럼 그녀의 몸을 덮쳐왔다.
"그렇게 좋아? 목소리가 아주 녹네, 응?" 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나른한 웃음소리와 함께 속삭였다.
"그럼― 이건 어때?"
"아!"
신지민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쿵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방금 전의 일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속 남자의 거친 몸짓 때문인지 잠에서 깬 후에도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옆자리를 더듬었다.
텅 빈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소위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신지민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걷자 몸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에 그녀는 짜증스럽게 옷장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욕구가 있다.
특히 결혼 후 부부 생활이 잦았던 그녀 같은 여자라면 더욱 그랬다.
예전에는 거의 매일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지만, 그날 이후 그녀의 그 싸구려 남편은 해외 주재 근무를 자원해 거의 1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꿈을 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지민이 옷을 갈아입고 손으로 빨아 널려고 할 때,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고요한 새벽에 유난히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였다.
외과 의사인 그녀에게 한밤중에 수술 호출 전화가 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례합니다, 신지민 씨 맞으십니까?"
"네, 접니다만,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연가로 파출소 경찰입니다. 서시우 씨가 남편분 맞으시죠? 오늘 밤 술에 취해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지금 파출소로 오셔서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신지민은 순간 멍해졌다. 서시우가 귀국했다고?
귀국한 것도 모자라 파출소에 잡혀 들어가?
신지민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차 키를 챙겨 집을 나섰다.
연가로는 북성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가로, 화려한 네온사인과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교외의 별장에서 연가로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신지민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술집이 밀집한 곳인 만큼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지만 파출소 안은 여전히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신지민이 파출소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하얀 철제 의자에 앉아 있는 서시우가 눈에 들어왔다.
소란스럽고 혼잡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유독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는 주변과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쌓은 듯,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앉아 있었다.
1년 만의 재회였다. 신지민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 넥타이도 재킷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맞춤 제작한 고급 원단은 주름 하나 없이 깔끔했고, 188센티미터의 큰 키에 맞춰 재단된 옷은 그의 몸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그의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날카로운 목젖과 쇄골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앉은 자세 때문에 바짓단이 살짝 올라가 검은 양말이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온몸에서 나른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눈꼬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일까? 평소의 잘생긴 얼굴보다 세 배는 더 사람을 홀리는 듯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런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그가 침대에서 특별히 흥이 올랐을 때만 언뜻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으니, 파출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힐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호강이었다.
북성 제일 재벌가의 상속인인 그는 재능과 외모, 권력과 배경을 모두 갖춘 남자였다.
북성 전체에서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 하늘의 달처럼 고고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던 그가, 오늘은 무슨 액운이라도 낀 건지 이런 곳에 잡혀 와 있다니.
대체 누가 감히?
그녀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눈빛이라 신지민을 알아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그 복사꽃 같은 눈은 여느 때처럼 '다정해' 보였다.
신지민은 바로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신고 데스크로 가 신분을 밝혔다. "안녕하세요. 신지민입니다. 아까 전화받고 왔습니다."
젊은 경찰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바로 이 사건의 담당자인 듯했다. 신지민은 그의 경찰 번호가 'A'로 시작하고 어깨 견장이 '《' 표시인 것을 보고 그가 보조 경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새로 온 모양이었다. 북성 서씨 가문의 황태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서시우 씨 아내분이시죠? 남편분께서 술집에서 싸움을 하셔서요. 자세한 건 CCTV 한번 보시죠."
경찰관이 CCTV를 재생했다. 카메라는 서시우의 머리 바로 위에 설치되어 있어 거의 그를 겨냥하고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서시우의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입체적인 골격 덕에 술집의 귀신 나올 듯한 조명 아래에서도 살아남아, 눈빛에는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듯한 무심함이 서려 있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에 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때, 몸매가 화끈한 여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신지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여자가 발끝을 들고 서시우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자 서시우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때 그의 높은 콧등에는 금테 안경이 걸쳐져 있었는데, 지적인 쓰레기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신지민은 손에 쥔 차 키를 세게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러 아팠다.
CCTV 영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젊은이 몇 명과 서시우가 마주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양측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CCTV의 잡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느릿느릿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는 모습만 보였다.
그 후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지더니 양측은 거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신지민은 서시우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서씨 가문에서 어릴 때부터 최고의 코치를 고용해 가르친 격투술은, 마구잡이로 주먹과 발길질을 해대는 무식한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단 몇 번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쓰러뜨렸다.
술집 경비원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싸움을 말리고 110에 신고했고, 이후 경찰이 개입했다.
사건의 전말은 매우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 신지민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여자가 서시우의 허리를 감싸 안던 그 장면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남자와, 얻어맞은 젊은이들을 쳐다보았다. 젊은이들 중에는 어린 소녀 두 명도 섞여 있었다. 그녀가 싸움을 벌인 남자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은 CCTV를 보고 나서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싸움까지 벌여 파출소에 잡혀 왔는데, 아내가 직접 데리러 와야 하는 신세라니.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언니, 저희 진짜 억울해요. 친구가 저한테 며칠 전까지 있던 뱃살이 왜 없어졌냐고, 혹시 몰래 임신했다가 낙태한 거 아니냐고 장난친 거거든요. 아마 저 남자분은 자기 옆에 있던 여자 얘기하는 줄 알고 저희한테 시비를 건 것 같아요.
"'몰래 낙태'라는 네 글자에 신지민은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졌다.
그제야 그녀는 평소 누구에게나 신사적이고 상냥하며, 고상하고 우아한 귀공자였던 서시우가 왜 양아치처럼 술집에서 싸움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회차 2
경찰관이 말했다. "상황은 다 파악하셨죠? 이 사건은..."
신지민이 경찰관의 말을 끊고 물었다. "경찰관님, 이 경우 서시우 씨는 고의상해죄에 해당하나요?"
경찰관은 잠시 멈칫하더니 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쌍방 폭행입니다. 상대방도 손을 썼으니까요."
신지민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시비도발죄는요?"
"시비도발죄는 고의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오해에서 비롯되었고, 양측 모두 술을 마신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기에 시비도발죄로 처리하진 않을 겁니다."
신지민은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혼인 중 외도, 대중 앞에서 다른 여자와 포옹하는 행위는 공서양속 위반 아닌가요? 공서양속 위반은 며칠이나 구류할 수 있죠? 5일? 아니면 10일?"
"..."
그제야 경찰관을 포함한 파출소 안의 모든 사람들은 신지민이 서시우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죄목을 엮어 그를 구류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정말이지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서시우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몸을 쭉 펴자 더욱 길고 훤칠한 몸매가 드러났다.
그는 나직이,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신. 지. 민."
위협적인 어조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위협보다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신지민은 서 씨 그룹의 주가와 그동안 서 씨 가문이 자신에게 베푼 것을 생각해, 마지못해 서시우를 대신해 상대방과 합의했다. 합의금 약 600만 원을 지불하고 서시우를 데리고 나왔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신지민이 주차하는 사이, 서시우는 이미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게스트룸으로 가 세수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운 신지민은 마음이 복잡했다.
모처럼 하늘이 도왔는지 오늘 밤엔 응급 수술이 없어 푹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 망할 사건 때문에 두 시간을 허비했다. 이제 막 눈을 붙이려 하면 다시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신지민이 막 잠이 들려 할 때, 누군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는가 싶더니, 남자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지민은 다리를 꼭 오므리며 눈을 번쩍 떴다.
가운을 걸친 서시우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 탄탄한 가슴 근육과 복근이 그대로 드러났고, 하얀 피부는 조명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도 그는 더욱 거침없이 굴었다. 표정은 무감각했지만, 손길은 거칠었다.
신지민은 그의 행동을 그저 장난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서시우! 미친 짓 하지 마!"
서시우의 깊은 눈동자에 경멸과 조롱이 어렸다. "욕실에서 봤어. 내가 몇 달 자리 비웠더니, 많이 급했나 보네? 혼자 하는 게 나보다 좋아?"
신지민은 그제야 자신이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치우지 못한 속옷을 그가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순간 수치심을 느꼈지만, 그의 가슴을 밀치는 손에 힘을 빼지는 않았다.
서시우는 억지로 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의 신분과 지위를 생각하면, 여자의 저항 따위는 그저 가식적인 내숭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는 흥미를 잃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물티슈를 뽑아 손가락을 닦았고, 그 모습에 신지민은 이를 악물었다. 서시우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흥미를 잃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지민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아 서둘러 몸을 돌렸는데, 그의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백금 반지는 심플하면서도 정교했다.
신지민은 그가 반지를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반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물티슈를 버리고 가운을 여민 서시우가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 탓에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잠이 들었다.
신지민은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년 만에 그녀의 합법적인 남편이 곁에 누웠지만, 그녀는 차라리 그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신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다시 손님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2년간 이어진 이 결혼 생활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
다음 날 아침, 신지민이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서시우는 이미 말끔한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파출소에서 보았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깔끔하게 다려진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 커프스, 금테 안경까지 완벽하게 갖춘 그는 북성 서 씨 가문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황태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신지민이 다가갔지만, 서시우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녀가 왜 손님방에서 잤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는 죽을 떠먹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시계는 은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그 주인처럼 정교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송 씨 아주머니가 그녀의 아침 식사를 내왔다. "사모님."
신지민은 아주머니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을 꺼내 서시우의 앞에 내밀었다. "어젯밤 당신이 사람 때린 합의금, 내가 냈어요. 약 600만 원, 보내줘요."
서시우는 고개를 들어 얇은 안경테 너머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너한테 돈이라도 굶겼냐?"
신지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은행 거래 내역 확인해 봐요. 지난 2년간 당신 돈, 한 푼도 안 썼으니까."
서 씨 가문은 북성 제일의 재벌가였고, 신 씨 가문도 어디 가서 꿀릴 집안은 아니었다. 그녀는 서시우에게 손을 벌릴 필요가 없었다.
서시우는 그녀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휴대폰을 들어 600만 원을 이체했다.
단 1원도 더 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침 식사를 마칠 때쯤, 서시우의 비서가 그를 데리러 왔다. 그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신지민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바로 말했다. "서시우 씨, 돌아왔으니 우리 이혼 얘기 좀 하죠."
서시우는 나가려다 멈춰 서더니, 그녀를 돌아보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방금 뭐라고?"
신지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가을거리에 사는 그분은 차치하고라도, 어젯밤 CCTV로 다 봤어요. 당신 곁에 새로운 여자가 생긴 거. 저도 더는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 이혼해요."
송 씨 아주머니와 비서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조용히 식당을 나섰다.
서시우는 그녀를 가볍게 훑어본 후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좋아. 그럼 이혼 조건에 대해 얘기해 보자고."신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딱히 얘기할 건 없어요. 결혼 생활 내내 한 침대를 쓴 것 말고는 교류가 거의 없었잖아요. 이혼 후에도 당신 재산은 당신 거고, 제 재산은 제 거예요. 우리 그냥 이혼 신고하고 제가 나가면 돼요."
그녀는 서시우의 재산을 탐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시우는 북성 재벌가의 황태자로, 겉으로는 예의 바르지만 속은 방탕하고, 겉으로는 한량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고난 사업가였다. 잔인하고 냉혹하며,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처음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서 씨 가문은 그룹 산하의 몇 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그에게 맡겼다.
그는 가차없이 해고하고 정리했다.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고, 회사의 '개국공신'이라 불리던 인물도 직접 내쳤다. 과감하게 칼을 빼 들고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 드라마, 예능 세 분야를 동시에 공략하여 내수 시장에 새로운 스타들을 대거 배출했고,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단숨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업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서 씨 가문의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났고, 그의 손을 거쳐 간 스타들은 현재 업계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서시우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지민은 더 이상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저 이 감옥 같은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서시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순 없지. 오랫동안 같이 잤는데, 보상은 해줘야지."
신지민은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겠다는 말에 의아했다. 그가 갑자기 왜 이리 예의를 차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다른 의견 없으면 오늘 변호사한테 연락할게요..."
"내가 말한 건, 네가 나한테 보상을 해야 한다는 거야."
"..."
서시우는 무심하게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서 씨 사모님께선 벌써 잊었나? 나한테 아이 하나 빚졌다는 거."
회차 3
서시우의 말 한마디에 신지민은 서로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싸웠던 1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가 언제 임신하고, 언제 애를 낳든, 그때 우린 이혼하는 거야. 이 빚 청산하기 전까지는."
안경을 밀어 올린 서시우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마치 희롱하는 듯했다.
"신지민, 도망갈 생각이라면, 그건 꿈도 꾸지 마."
"..."
서시우가 그 말을 남기고 떠나자,
의자에 등을 기댄 신지민은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두 어린 여자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그녀는 서시우의 역린이 바로 ‘몰래 한 임신과 낙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 자식, 1년 전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신지민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에게 아이 하나를 빚진 셈이었다...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저런 개자식.
·
신지민은 오늘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북화병원 흉부외과 주임 의사다.
그녀의 나이에 주임 의사라는 직책을 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해외 최고의 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 원장이 직접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해 왔다.
북화병원에서 몇 년간 근무하며 그녀는 오직 실력만으로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고, ‘흉부외과 최고의 칼잡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진료실은 의사 한 명당 한 칸씩 배정되었다. 신지민은 사무용 의자에 앉아 바로 호출기를 눌렀다.
방송에서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001번 환자분, B1 진료실로 와주세요."
신지민이 컴퓨터로 001번 환자의 진료 기록을 확인하고 있을 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봤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진료 기록이 없는데, 처음 오셨나 봐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는 고작 스무 살 남짓해 보였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깊게 파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거만한 태도로 들어와 신지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신지민은 다시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여자는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말했다. "나 임신했어."
신지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우 오빠 아이야."
신지민"..."
그제야 신지민은 여자가 왜 낯익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술집 CCTV에 찍혔던, 서시우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술집에서는 화장이 짙어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신지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임신은 산부인과로 가셔야죠. 여긴 흉부외과입니다. 제 진료 번호 하나를 낭비하셨네요."
여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 신 의사. 내가 시우 오빠 아이를 가졌는데, 아직도 자리 비켜줄 생각 없어?"
자리를 비켜달라고?
신지민은 손에 쥔 펜을 빙글 돌렸다. 가을거리에서 몇 년간 서시우의 세 번째 정부 노릇을 하던 여자도 감히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지는 못했는데, 이 네 번째는 기가 막힐 정도로 당돌했다.
아마도 서시우가 뒤를 봐주니 저런 용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신지민은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지 않고 내선 전화를 들었다. "진 선생님, 예약 하나만 추가해 주세요. 지금 바로요. 무통 유산 수술이고, 환자 이름은...
심설이에요." 여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지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 아이를 죽이겠다고? 감히 그랬다간 시우 오빠가 너 가만 안 둘 거야!"
"힘 좀 쓰는 남자 간호사 두 명만 더 보내주세요. 환자분이 협조를 안 하시네요."
전화를 끊자마자, 건장한 체격의 간호사 두 명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신 의사님."
심설은 그녀가 정말로 일을 벌일 거라는 걸 깨닫고는, 분하고 두려워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신지민! 너 진짜 적당히 좀 해! 이 바닥에서 네가 어떻게 시우 오빠랑 결혼했는지 모르는 사람 없어. 넌 그냥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나쁜 년이야!"
신지민은 보온병을 열며, 의사 가운을 가리켰다. "내가 뭘 어쨌는데?" 심설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 엄마가 사모님이랑 친구인 거 믿고 어릴 때부터 서가에 빌붙어서 사모님한테 아양 떨었잖아! 근데 그걸 진짜 성공하다니, 가증스러워! 사모님이 시우 오빠한테 너랑 결혼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오빠가 너같이 부모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을 거들떠보기나 했겠어? 몇 년 동안이나 오빠를 차지했으면 됐잖아! 이제 그만 우리한테 돌려줘!"
신지민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태연하게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코앞에서 욕설을 퍼붓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아는 게 제법 많네. 서시우가 알려줬어?"
심설은 증오에 차 말했다. "두 번 다시 시우 오빠 망치게 두지 않을 거야!"
신지민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문득 좋은 수가 떠올랐다. "그렇게 그 사람을 위한다니, 내가 네 소원 들어줄 수도 있어."
심설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원?"
신지민은 두 간호사에게 말했다. "이쪽 뒷문으로 해서 산부인과 진 선생님한테 데려가요. 어떻게 할지 아실 거예요."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끌려 나가며 악을 쓰는 심설을 무시하고 서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전화는 바로 끊겼다.
그녀는 끈기 있게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서시우가 받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심드렁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의 중이야. 3분 줄 테니 할 말만 해."
"네 여자가 병원 와서 소란 피우는 통에 내 일에 지장 생겼어. 당장 와서 처리해.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나도 장담 못 해."
신지민은 할 말만 하고 30초 만에 전화를 끊었다.
자기 여자가 걱정됐는지, 서시우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왔다. 신지민은 마침 오전 진료를 모두 마치고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서시우는 아침에 입었던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상태였다. 살짝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날카로운 목젖이 드러났다.
그가 의자에 앉자, 정장의 단정함과 그의 본성인 방종함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신지민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며 두 사람의 거리를 벌리고는 말했다. "그 여자가 임신했대. 네 아이래."
서시우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표정 변화가 없었다. 금테 안경은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을 완벽하게 가려주어, 신지민은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지금 그 여자, 내 손에 있어."
그제야 서시우는 약간의 흥미를 보였다. "가뒀다고? 신 의사, 생각보다 거친데?"
신지민은 이게 거친 거라니, 서 이사님은 참 세상 물정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말했다. "너랑 거래하고 싶어."
서시우는 비웃었다. "15분 전에 내 맞은편에 앉아서 거래하자던 그 계약서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신지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거래도 꽤 값어치 있어. 심설의 아이, 내가 낳은 걸로 할 수 있어. 그럼 사생아는 아니게 되겠지.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면 그분들도 받아주실 거고."
"그리고, 이걸로 너한테 빚진 아이는 갚은 걸로 치고, 우리, 이혼해."
서시우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금테 안경 너머로 그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가 이내 옅어졌다.
"몰랐는데, 신 의사 수학자였네. 등가 교환을 그렇게 잘할 줄이야."신지민은 그의 비아냥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생각해봐. 대신 오래는 안 돼. 심설은 이미 수술대 위에 있어. 그 애 배 속의 아이를 살릴지 말지는 전적으로 네 대답에 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