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내 상사, 강태준은 자기 약혼녀에게 내 골수를 기증하라고 강요했다.
그 여자는 몸에 흉터가 남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7년 동안, 나는 어릴 적 함께 자란 소년이자 이제는 나를 경멸하는 남자의 비서로 일했다.
하지만 그의 약혼녀 한세라는 내 골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사라지길 바랐다.
그녀는 50억짜리 선물을 내가 깨뜨렸다며 누명을 씌웠고, 강태준은 내 무릎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깨진 크리스털 조각 위에 나를 무릎 꿇렸다.
그녀는 파티에서 내가 폭행을 저질렀다고 모함했고, 그는 나를 경찰에 넘겼다.
나는 유치장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
그러다 있지도 않은 섹스 비디오를 유출했다는 죄목으로, 그는 내 부모님을 납치했다.
그는 완공되지 않은 초고층 빌딩의 크레인에 부모님을 매달아 놓고, 수백 미터 상공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오만했다.
"서연우, 이제 좀 배운 게 있나? 사과할 준비는 됐고?"
그가 말하는 순간, 밧줄이 끊어졌다.
부모님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끔찍한 평온이 나를 덮쳤다.
입안에 피 맛이 가득 고였다. 그가 전혀 몰랐던 내 병의 증상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잔인하고 추악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괴로우면 그 옥상에서 뛰어내리든가. 너한테 딱 어울리는 끝이겠네."
"알았어."
나는 속삭였다.
그리고 건물 가장자리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제1화
골수 채취용 바늘은 두껍고 차가웠다.
서연우는 소독된 병원 침대에 엎드려 등을 드러냈다.
바늘을 쳐다보진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다가올 고통이 느껴졌다.
의사가 다시 한번 시술 과정을 설명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현실을 바꾸진 못했다.
아플 것이다. 아주 많이.
강태준은 창가에 서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컸고, 내 차보다 비싼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왕국을 내려다보는 왕처럼 도시를 응시했다.
그의 약혼녀 한세라는 사고를 당했다.
살기 위해 이식이 필요했지만, 완벽한 피부에 흉터가 남는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는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개인 비서.
돈이라면 뭐든지 할 거라고 믿는 여자에게.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연우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날카롭고 비릿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절대 소리를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에게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
바늘이 엉덩이뼈 속 골수를 찾아 더 깊이 파고들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뻣뻣하게 굳었다.
고통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깊고 묵직한 통증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시술이 끝났다.
의사는 무심하고 기계적인 손길로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연우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등이 둔하고 지속적인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강태준이 마침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조각처럼 잘생겼지만, 한때 그녀를 향했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이 텅 비어 있었다.
"끝났나?"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끝나기만을 바랐다.
떠나고 싶었다.
"우리 계약은…"
그녀가 겨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끝난 거죠?"
그녀가 말한 것은 자신을 그에게 옭아맨 뒤틀린 계약, 바로 이 '일'이었다.
그의 곁에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는 이 지긋지긋한 일.
강태준은 오해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숫자를 휘갈겨 쓴 뒤, 수표를 찢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
그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네 몸값. 넌 예나 지금이나 네 몸뚱어리 팔아서 돈 버는 건 참 잘해, 서연우."
그 말은 바늘보다 더 아프게 그녀를 찔렀다.
그녀는 수표를 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얼굴.
이제는 경멸 외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
수표를 향해 뻗은 손이 떨렸다.
손가락이 그의 손에 스치자, 그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움찔하며 손을 뺐다.
그녀는 수표를 받았다.
돈이 필요했다. 절실하게.
그녀는 수표를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가방을 들고,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방을 나섰다.
병원 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도시의 공기가 피부에 차갑게 와닿았다.
그녀는 벽에 기댔다.
등의 통증과 심장의 통증이 하나가 되어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짓눌렀다.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다.
돈도, 증오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강태준이 냉혈한 재벌이 아니라, 그냥 태준이, 나의 태준이었던 시절.
그는 세상에 버려진 조용하고 총명한 소년으로 우리 가족에게 왔다.
연우의 부모님은 그를 친아들처럼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그는 작고 행복한 우리 집의 별이었다.
연우와 그는 남매처럼 자랐지만, 둘의 유대감은 그보다 깊었다.
뒷마당에 함께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서 피어난, 비밀스럽고 말하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위대한 운명을 타고난 황금 소년이었다.
연우는 그의 그림자이자, 그의 비밀을 들어주는 친구였고, 그의 미소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둘만 있을 때, 그는 그저 그녀의 가족을,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소년일 뿐이었다.
그들의 완벽한 세계는 그의 친아버지가 나타난 날 산산조각 났다.
강진혁.
IT 업계에서 공포의 대상인 이름.
사람을 장기말로 여기는 무자비한 거물.
그는 자신의 뛰어난 아들을 되찾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는 연우의 가족을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부모님은 의문스러운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선량하고 정직한 아버지는 저지르지도 않은 폭행죄 누명을 썼다.
어머니는 뺑소니 사고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장애를 얻었다.
강진혁은 연우에게 불가능한 선택지를 내밀었다.
50억 원.
"이 돈을 받아."
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내 아들에게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해. 그놈과의 미래보다 이 돈을 택하겠다고. 아니면 네 가족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지켜보든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태준을 그의 아버지라는 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녀는 선택을 했다.
그녀는 목숨보다 사랑하는 소년, 강태준 앞에 섰다.
그리고 평생 내뱉은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을 던졌다.
"나 이 돈 받을래, 태준아. 50억이야. 네가 나한테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줄 수 있기나 해?"
그의 눈에 비친 날것 그대로의, 산산조각 난 상처는 그녀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상처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자신보다 돈을 선택한 소녀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을 가슴에 품은 채.
7년이 흘렀다.
강태준은 더 이상 상처받은 소년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재벌,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차갑고 무자비한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왔다.
그는 그녀를 개인 비서로 삼았다.
그의 새로운 삶, 새로운 약혼녀, 그리고 그의 끝없고 창의적인 잔인함을 맨 앞줄에서 지켜보게 했다.
매일이 새로운 고문이었고, 그녀의 '배신'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연우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숫자를 보았다.
엄청난 액수였다.
부모님의 불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병원비도.
강태준이 모르는 것,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서연우는 죽어가고 있었다.
말기 위암.
의사들은 몇 주, 운이 좋으면 한 달이라고 했다.
그 돈은 그녀에게 없는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부모님을 부양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작고 조용한 공원으로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
수표를 다시 한번 보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강태준과의 대화창이 상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프로필 사진은 차가운 회사 로고였다.
그녀의 사진은 여전히 부모님 집 뒷마당의 플라타너스 나무였다.
대화 기록은 일방적이었다.
써놓고 보내지 못한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태준아, 오늘 비 온다. 우리 예전에 우산 하나 같이 썼던 거 기억나?'
'플라타너스 나무가 엄청 커졌어. 곧 생일인데.'
'오늘 뉴스에서 봤어. 피곤해 보이더라.'
7년간의 침묵과 증오의 심연을 메워보려는 작고 초라한 시도들이었다.
그녀는 서툰 손가락으로 새로운 메시지를 입력했다.
'태준아, 미안해.'
흐려지는 시야로 그 글자들을 응시했다.
무엇이 미안한 걸까?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가족을 구한 것?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것?
그녀는 메시지를 지웠다.
무의미했다.
어차피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이미 그녀를 차단했으니까.
등의 통증은 오늘 하루를 상기시키는 끊임없는 고동이었다.
영혼의 상처가 육체적으로 발현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증오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고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깊은 밤이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허락했다.
그는 한 번이라도 나를 떠올렸을까?
진짜 나를?
그와 함께 나무를 오르고 별빛 아래서 꿈을 나누던 소녀를?
아니면 나는 그저 그가 마음속에 만들어낸, 돈에 굶주린 괴물로 대체된 유령일 뿐일까?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로의 파도가 밀려왔다.
병마는 조용한 도둑처럼 그녀의 힘과 숨결, 그리고 삶을 훔쳐가고 있었다.
이미 변호사와 연락해 사후의 모든 것을 정리해 두었다.
부모님을 위한 신탁.
간소하고 조용한 장례식.
기묘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해방감.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강태준을 생각했다.
'사랑해.'
그 생각은 더 이상 믿지 않는 신에게 보내는 조용한 기도였다.
'언제나 그랬어.'
'너를 이 증오 속에 남겨두고 떠나야 해서 미안해.'
'이제 우리 빚은 없어, 태준아. 나 더 이상 너한테 빚진 거 없어.'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셨다.
등의 새로운 상처는 심장의 오래된 상처처럼 생생하고 쓰라렸다.
이제 그의 냉정함에 무감각해졌다.
익숙한 고통이었고, 일상의 일부였다.
그녀는 어둡고 차가운 바다로 서서히 가라앉는 배였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라앉으면서도, 작고 완고한 일부는 완전히 부서지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의 소년을 여전히 사랑하는 부분이었다.
숨 막힐 정도로 깊은 증오와 뒤엉킨 사랑.
사랑과 증오.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전부였다.
회차 2
일주일 후, 강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자선 경매. 저녁 8시. 신라호텔."
요청이 아닌 명령이었다.
연우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그녀의 소박한 검은 드레스는 주변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개인 부스에 앉아 있는 강태준을 발견했다.
경매사가 값비싼 골동품과 예술품을 소개하는 동안 그는 지루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대만 쳐다볼 뿐,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물품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빈티지 자동차, 다이아몬드 목걸이, 작고한 거장의 그림.
강태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경매사가 다음 물품을 공개했다.
"그리고 이제, 정말 특별한 작품입니다! 영원한 사랑의 상징, 수공예 크리스털 백조 한 쌍입니다!"
그것들은 아름다웠다.
빛을 받아 수백 개의 작은 무지개로 흩뿌렸다.
그날 밤 처음으로, 강태준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어두운 눈에 흥미가 스쳤다.
다른 남자가 입찰을 시작했다.
강태준은 즉시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
가격은 치솟아, 금세 백조의 실제 가치를 넘어섰다.
그것은 강태준과 다른 입찰자 사이의 의지 싸움이자, 힘의 과시가 되었다.
"10억!"
경쟁자가 외쳤다.
강태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50억."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른 입찰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경매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의사봉을 내리쳤다.
"낙찰! 강태준 대표님께 50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는 강태준을 향해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주 특별한 분을 위한 선물이겠지요?"
강태준의 차가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테이블의 마이크를 잡았고, 그의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제 약혼녀, 한세라를 위한 겁니다."
그가 말했다. 따뜻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연우가 7년 동안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그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군중이 박수를 쳤다.
연우는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모든 단어가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는 군중을 위해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메시지는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잃었는지, 돈 때문에 무엇을 버렸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
그녀는 그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존재이자, 그의 잔인함을 시험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강태준이 떠날 준비를 할 때, 다음 물품이 무대 위로 옮겨졌다.
그것은 커다란, 덮개로 덮인 우리였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스릴 넘치는 물품입니다… 훌륭한 순종 티베탄 마스티프입니다!"
덮개가 걷혔다.
안에는 칠흑같이 검고, 눈은 뜨거운 석탄처럼 빛나는 거대한 개가 있었다.
개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우리 창살에 몸을 부딪쳤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맹수였다.
군중 사이에서 불안한 수군거림이 일었다.
갑자기,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잠금장치 하나가 부서졌다.
개가 문에 몸을 부딪치자, 문이 활짝 열렸다.
혼돈이 일어났다.
거대한 개가 무대에서 뛰어내리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다.
그것은 검은 털과 으르렁거리는 이빨의 흐릿한 형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강태준을 향해 똑바로 달려들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생각하기도 전에, 연우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몸을 던졌다.
"대표님, 피해요!"
개가 그녀에게 부딪혔고, 그 무게에 그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빨이 팔에 박히면서 타는 듯한, 믿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날카롭고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다른 팔로 개의 두꺼운 목을 감싸 떼어내려 했지만, 너무 강했다.
개는 머리를 흔들며 그녀의 살을 물어뜯었다.
"서연우!"
강태준이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년 만에 그가 경멸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아주 잠깐, 그녀는 공황을 들었다.
두려움을 들었다.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이 그녀를 감싸며, 그녀와 맹수 사이에 끼어들려 하고 있었다.
보안 요원들이 몰려와 마침내 개를 그녀에게서 떼어냈다.
팔은 피와 찢어진 옷감으로 엉망이었다.
고통은 엄청났고, 세상이 어지럽게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쓰러졌다.
머리가 강태준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창백하고 긴장된, 그녀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으로 커진 그의 어두운 눈.
그녀는 병실에서 깨어났다.
코끝에 소독약 냄새가 톡 쏘았다.
팔은 두껍게 붕대가 감겨 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강태준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쳐 보였고, 항상 완벽하던 정장은 구겨져 있었으며, 턱에는 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의 눈에 빛이 스쳤다.
"깨어났군."
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일어나 침대로 다가와 차트를 집어 들었다.
"의사가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하더군. 빈혈이 심하다고."
빈혈.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우는 그의 손에서 보고서를 낚아채려 했지만, 그 움직임에 팔에 격통이 일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 그것을 보았다.
그의 손등에 새로 붙인 반창고와 작은 주사 자국.
바늘 자국이었다.
간호사가 밝게 웃으며 들어왔다.
"아, 깨어나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렇게 헌신적인 파트너가 있어서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밤새 곁을 지키시고, 혈액은행에 환자분 혈액형이 부족하니까 직접 수혈까지 해주셨어요."
연우는 충격받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피를 주었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간호사가 계속 말했다.
"서류 작성을 위해 몇 가지만 확인하면 돼요. 이분이 파트너분 맞으시죠?"
"아니요."
연우가 조용한 병실을 가르며, 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제 상사입니다. 강태준 대표님."
병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강태준의 고개가 그녀를 향해 홱 돌아왔다.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깐의 온기는 사라지고, 익숙한 얼음 가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간호사는 갑작스러운 긴장감을 감지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상사?"
강태준이 위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너한테 고작 그거야?"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왜 그랬어, 서연우? 왜 내 앞에 뛰어들었지?"
그의 눈이 답을 요구하며 그녀의 눈을 파고들었다.
"더 큰 보너스라도 바랐나? 더 나은 실적 평가? 너한테는 모든 게 다 가격이 매겨져 있지, 안 그래?"
그 질문은 너무나 부당하고 잔인해서 그녀를 말문이 막히게 했다.
씁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방금 그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반응이었다.
침묵이 둘 사이에 무겁고 숨 막히게 내려앉았다.
회차 3
연우는 눈을 감았다. 손으로 병원 담요 모서리를 꽉 잡았다.
"제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비서로서, 대표님의 안전은 제 책임이니까요."
그녀는 그 말을 반복하며 둘 사이에 벽을 더욱 견고히 했다.
그가 직접 세운 직업적인 경계선.
"그게 전부였습니다."
강태준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먹구름 같았다.
"네 일."
그가 비꼬는 투로 되풀이했다.
"그래."
그는 지갑을 꺼내더니 침대 옆 탁자 위로 5만원권 지폐 한 뭉치를 던졌다.
현금이 하얀 시트 위로 흩어졌다.
"그럼 이건 네 수고비다."
그가 비웃었다.
"일 잘한 대가. 넌 항상 돈에 환장했었지, 서연우? 예전에 50억에 목숨 걸던 거 기억나는데."
그 숫자, 그녀의 배신에 매겨진 가격을 언급하는 것은 따귀를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비싼 향수 냄새와 그의 경멸의 무게만을 남긴 채.
며칠 후, 퇴원한 연우에게 경매와 관련된 마지막 임무가 주어졌다.
50억짜리 크리스털 백조를 강태준의 저택에 있는 한세라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었다.
한세라는 가식적인 걱정과 미소를 가득 머금고 문에서 그녀를 맞았다.
"연우 씨! 이거 가져다줘서 정말 고마워요. 어머, 팔은 어떡해! 아직도 아파요?"
"괜찮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시야에, 순수하고 노골적인 증오로 번뜩이는 한세라의 눈빛이 들어왔다.
그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상냥한 미소로 바뀌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한세라는 무거운 상자를 받으며 감탄했다.
"태준 씨는 저한테 정말 잘해줘요."
그러고는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손이 "미끄러졌다."
상자가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했다.
역겨운 파열음이 웅장한 현관에 울려 퍼졌다.
연우는 충격으로 고개를 들었다.
50억을 호가하던 영원한 사랑의 상징, 아름다운 크리스털 백조는 이제 반짝이는 파편 더미가 되어 있었다.
한세라의 상냥한 가면이 벗겨지고, 승리에 찬 악의적인 표정이 드러났다.
바로 그때, 소리를 듣고 강태준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크리스털 조각을 보고 즉시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그가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다그쳤다.
"연우 씨, 당신이…"
한세라가 울기 시작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전 만지지도 않았어요!"
연우가 공황 상태에 빠져 목소리를 높이며 설명하려 했다.
"저 여자가 떨어뜨렸어요!"
강태준의 시선은 빙하처럼 차가웠다.
"이건 세라를 위한 선물이었어. 우리 사랑의 상징이 될 물건이었다고."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연우의 다치지 않은 손목을 쇠처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네가 망치지 않는 게 대체 뭐지? 내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을 전부 파괴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그렇게 질투가 나고 비참해?"
"아니에요! 태준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하지만 한세라의 흐느낌은 더 커졌다. 상처받은 희생자를 연기하는 완벽한 공연이었다.
"태준 씨, 연우 씨한테 화내지 마요. 사고였어요. 분명 미안해할 거예요."
강태준은 눈물범벅이 된 한세라의 얼굴과 연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사과해."
그가 강철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무릎 꿇고 세라한테 사과해."
연우는 경악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싫어요! 현관에 CCTV 있잖아요. 녹화 영상 확인해봐요! 그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한세라의 흐느낌이 순간 멈칫했다.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안심했다.
연우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덩치 큰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연우의 어깨를 잡았다.
"대표님."
한 경호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관 보안 시스템은 오늘 아침부터 점검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랬겠지.
경호원들이 그녀를 강제로 무릎 꿇렸다.
그녀의 무릎이 산산조각 난 크리스털 파편 위로 직접 닿았다.
날카롭고 갈리는 소리가 조용한 홀에 울리고, 다리 위로 타는 듯한 고통이 치솟았다.
그녀는 고통에 찬 숨을 삼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애원하는 눈으로 강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바지를 뚫고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고통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세라를 믿었다.
언제나 한세라를 믿을 것이다.
"사과해."
그가 이전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반복했다.
"그리고 변상해. 50억. 네 퇴직금에서 제하지."
퇴직금.
그는 그녀를 해고하고 있었다.
무릎의 고통은 심장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의 피와 섞였다.
그녀는 한세라를 보았다.
그녀는 이제 손 뒤에 작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숨기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연우가 입안에서 재 맛이 나는 단어들을 힘겹게 내뱉었다.
"별로 진심 같지 않은데, 태준 씨."
한세라가 잔인한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
한세라는 커다란 유리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밖은 하늘이 어두워지고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가 세차게 내리치고 바람이 울부짖었다.
"밖에 무릎 꿇려 놔."
한세라가 제안했다.
"내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느낄 때까지."
강태준은 자신의 피 웅덩이 속에 무릎 꿇고 있는 연우를 보고, 다시 약혼녀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경호원들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가 차갑고 젖은 베란다 돌바닥에 무릎 꿇렸다.
비가 즉시 그녀를 흠뻑 적셔 얇은 드레스를 피부에 달라붙게 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무릎의 고통은 새하얀 불길처럼 타올랐다.
유리문을 통해, 강태준이 한세라의 어깨에 부드럽게 담요를 둘러주며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눈을 감았다. 마음이 흐려졌다.
몇 년 전, 다른 폭풍우를 기억했다.
천둥을 무서워하는 그녀를 태준이 안아주며, 언제나 지켜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기억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차가운 비와 무심한 경호원들, 그리고 이제는 낯선 사람이 된 남자뿐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비와 섞여 무릎의 피를 씻어내며 돌계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혼자였다.
완전히, 철저하게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