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축하 드려요. 임신 6주차시네요!"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임신 결과지를 건넸다.
결과지를 건네 받은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믿을 수 없었다. 겨우 한 번 잤을 뿐인데 임신이라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차성우한테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맞는 걸까?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건 그도 원치 않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차성우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이를 이용해 그를 협박하는 나쁜 여자로 생각할 게 뻔했다. 그리고 임신했다고 해서 이혼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겨우 부여잡고 결과지를 가방에 넣은 채 병원을 나섰다.
세련된 외제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창이 반 쯤 열려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그 사람의 얼굴은 언제 봐도 참 잘생겼다.
그는 어딜 가나 시선을 끄는 타입이었다. 지금도 길가를 지나는 여자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다들 그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내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 차성우였다. 돈도 많고 잘생긴 외모를 갖춘 그의 매력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차성우를 곁눈질 하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무시한 채 보조석에 앉았다.
차성우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어?"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원 이사장이 서명한 계약서를 한 장 내밀었다.
"김 원장님이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원래 계약서는 혼자 받으러 갈 생각이었다.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차성우가 병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 당신이 맡아 줘." 차성우의 말은 좀처럼 반박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평소 말이 없는 편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계약서를 살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거두었다.
조금이라도 말대꾸를 했다간 오히려 내가 더 피곤해지니까 차성우와 있을 때면 나는 늘 침묵을 지켰다. 물론 익숙해지기까지는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해도 져서 어둑어둑한데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했지만 질문할 용기는 없었다. 난 차성우가 지금처럼 알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이젠 익숙해졌다.
그때 가방 안에 들어있는 임신 결과지가 생각났다.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까? 힐끔 차성우를 쳐다보았다. 도로에 고정된 차가운 그의 시선을 보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저기⋯" 땀으로 젖은 손을 부여잡고 겨우 입을 뗐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뭔데?" 차성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걸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물론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날 이런 식으로 대했다. 처음에는 화도 났지만 이제 그러려니 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좀처럼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차성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난 바로 다시 입을 닫았다.
"여보세요? 다현아, 무슨 일?"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의 사랑밖에 하지 못한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저 이방인에 불과했다.
차성우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강다현에게만 다정한 남자였다. 전화 받는 모습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다현이 무슨 말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차성우는 속도를 낮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말고 얘기해 봐. 바로 거기로 갈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잠시 동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던 그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차갑게 돌아왔다. "내려."
부하 직원을 명령하는 말투에 나에게는 거절의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킨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없는 결혼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차성우와 나의 결혼도 그렇다. 차성우가 사랑하는 여자는 오직 강다현 뿐이었다. 그에게 나는 방해꾼에 불과한 존재였고 줄곧 나와 헤어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2년 전 심근경색을 앓고 있던 차할아버지께서 차성우에게 나와의 결혼을 강요하셨다. 그는 원치 않았지만 집안 어르신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그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차성우는 나와 이혼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겨우 집에 도착했다. 화려하고 큰 저택이었지만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포영화에 나와도 될 법한 집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서둘러 샤워한 뒤 침대에 털썩 누웠다. 임신 때문인지 입맛도 없었다.
잠에 들기 직전 밖에서 차가 멈추고 누군가 내리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차성우인가?
오늘밤은 강다현과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회차 2
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곧 방문이 열리고 차성우는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의 옷이 다 젖어 있었다. 그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고 몇 초 뒤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잠자기는 틀렸다. 난 몸을 일으켜 실크 가운 위에 셔츠 하나를 걸쳤다. 그리고는 차성우의 잠옷을 꺼내 화장실 문 앞에 두고 베란다로 향했다.
장마철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몇 개 후드득 떨어지더니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세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자니 나의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차성우는 알몸으로 허리에만 살짝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나도 모르게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시선을 눈치라도 챘는지 차성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건조하게 말했다. "여기로 와 봐."
난 별 말 없이 그의 말대로 했다. 차성우는 수건 하나를 내게 던지며 말했다. "머리 좀 말려줘."
차성우의 버릇이었다. 드라이기는 싫다며 항상 내게 머리를 말려 달라곤 했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그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건으로 차성우의 머리를 말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인 거 알죠? 아침 일찍 같이 나가요."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오늘 차성우가 강다현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그가 잊고 있을까 봐 걱정했다.
"알았어." 차성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침묵했다.
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다 말려준 뒤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요즘 부쩍 잠이 많아졌다. 나는 하품을 하며 침대 구석에 등을 구부리고 옆으로 누웠다. 차성우는 샤워를 하고 나면 보통 자정까지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잠옷을 입고는 바로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내가 미처 당황하기도 전에 갑자기 차성우는 나를 끌어안고는 격렬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뗐다. "잠깐만! 나⋯"
"왜? 하기 싫어?" 차성우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거절할 권리는 내게 없었다.
"조금 더 살살해 줄래요?" 겨우 임신 6주차였다. 저번처럼 거친 관계는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차성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이따금 천둥 소리와 함께 방 안에 번개 불빛이 비쳤다 사라지곤 했다. 살 부딪히는 소리와 신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참 뒤에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차성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나는 하복부에 통증이 느껴졌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다는 걸 눈치챘다. 침대 옆 서랍에 손을 뻗어 진통제를 꺼내려다 아기 생각에 멈추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요란히 울리기 시작했다. 차성우 휴대폰이었다.
이미 밤 11시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강다현밖에 없을 것이다.
물소리가 잦아들더니 차성우는 가운을 대충 걸친 채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들어보려 했지만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다현아, 너도 이제 그만해." 차성우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내려두더니 바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이미 여러 번 봤던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가지 말아요. 오늘은 여기 있으면 안돼요?"
차성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곧 그는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 "몇 번 잤다고 달라붙는 거야?"
이 말은 차갑고 풍자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그 자체가 역겨웠다. 나는 무표정으로 차성우를 올려다 보았다. "내일은 할아버지 장례식이에요. 내일 일찍 가봐야 하는데 정말 나가려고요? 그 정도 분별은 할 줄 알잖아요."
"지금 협박하는 거야?" 차성우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 턱을 붙잡고는 차갑게 말했다. "한보라, 너 제법인데."
회차 3
차성우는 누구도 꺾기 쉽지 않은 황소 고집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랑 이혼하고 싶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오늘 밤 같이 있다가 내일 장례식에 함께 참석해요. 돌아오면 바로 이혼 서류에 서명할게요."
차성우는 마치 날 조롱하듯 대답했다. "그럼 내 기분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어? 몸으로."
그는 내 턱을 붙잡은 손을 내려놓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한보라,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을 해야지."
욕망이 다분히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가 원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차성우의 키가 크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야 겨우 그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다.
한 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와 어떻게든 하루 있어보겠다고 이러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셔츠 아래로 손을 넣으려는데 차성우가 손으로 날 막았다. 올려다 본 그의 눈빛은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만해."
이제 와서 갑자기 그만하라니? 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성우는 갑자기 옷을 벗더니 회색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몇 초가 지난 후 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차성우는 정말 오늘 나와 함께 있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창 밖에서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우 씨⋯"
차성우는 곧장 베란다로 나가 아래를 쳐다보더니 재킷을 하나 걸치고는 바로 나가버렸다. 내게는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베란다에 나가보았다. 강다현이 얇은 원피스만 달랑 걸친 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붉은 눈시울에 위로 올려다보는 아련한 눈빛, 원피스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갸름한 얼굴에 붙어 있었다. 빗물이 눈물과 함께 볼을 타고 흘려 내렸고 추위에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꽃 같았다.
차성우가 나타났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자신의 겉옷으로 그녀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그 어떤 말도 하기 전에 강다현은 그의 허리를 덥석 껴안고 고양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차성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제서야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나와 결혼한지 2년이 지났지만 차성우의 마음속에서는 강다현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차성우는 강다현을 부축해 집에 들어오려 했다. 깜짝 놀란 나는 바로 내려가 현관을 가로막았다. 둘이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젖은 생쥐 꼴을 하고 붙어 있는 걸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뭐 하는 거야? 비켜!" 차성우는 날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그는 날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내겐 무관심하고 차가운 남편이 이토록 한 여자에게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는 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성우 씨가 날 조금이라도 배려하지 않는 건 알겠는데 할아버님한테까지 그러면 안되죠. 내가 이 집에 있는 동안은 절대 저 여자를 들이지 않겠다고 할아버님께 약속한 거 잊지 말아요."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어떻게 강다현을 우리 집에 데려올 생각을 할 수 있지? 이 집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그녀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외박하는 것도 여태 눈감아 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참나!" 차성우는 콧방귀를 뀌며 날 밀쳐냈다. "한보라, 네 주제를 알아야지."
촌철살인.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차성우가 강다현을 손님방으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강다현은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비를 맞은 탓에 얼마 안가 고열에 시달렸고, 차성우는 그녀 옆을 지켰다. 난 몰래 손님방에 들어가 둘을 살펴 보았다.
어슬렁거리고 있는 내가 불편했는지 차성우는 강다현을 재운 뒤 차갑게 말했다. "오늘 밤은 본가로 가서 자. 시간도 많이 늦었고, 다현이가 열이 심해서 지금 집에 돌려보낼 순 없어."
이런 늦은 시간에 강다현을 자기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은 안 괜찮고 나 혼자서 본가로 가는 것은 괜찮다고? 대체 날 얼마나 싫어하길래 이러나 싶었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애초에 여길 온 게 잘못이었다.
난 차성우의 등을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본가가 여기서 얼마나 먼지, 그리고 야심한 시간에 여자 혼자서 밖을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말이다.
하지만 차성우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다현의 붉어진 얼굴만 쓰다듬고 있었다.
내 안전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는 애초에 저런 말도 하지 않았겠지. 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내 침실에 있을게요. 이 시간에 거기까지 못 가요."
차성우가 애인을 돌보기 위해 혼자 있고 싶어한다고 해서 나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속으로 두 사람을 저주하며 난 손님방을 나섰다. 그때 복도에서 정민호가 빠른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검정 잠옷 차림에 머리는 반쯤 젖어 있었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걸 보니 자다가 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