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왕부(王府) 안, 무완희(沐婉兮)는 불룩하게 솟아오른 배를 부여잡고 조급한 목소리로 옆에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군왕(郡王)께서 소식을 보내오셨느냐?"

"군왕비님, 군왕께서는 진국공부(秦國公府)를 위해 전력을 다할 테니 군왕비께서 마음 놓고 출산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녀 수화(繡荷)는 무완희에게 꽉 잡힌 자신의 손을 힐끗 쳐다보더니 언짢은 눈빛을 하면서 갑자기 손을 뺐다. 그러는 바람에 무완희는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하였다.

"조심하십시오, 군왕비님." 수화는 손을 내밀어 무완희를 부축했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만 지나면 당신은 더 이상 군왕비가 아니고, 나도 비천한 노비가 아닌 왕부의 이낭(姨娘, 첩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야.'

수화의 얼굴에 미소가 잔뜩 번졌다. 앞으로 좋은 날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자 그 동안의 고생이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수화야, 청죽(靑竹)은? 왜 이틀 내내 청죽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무완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식을 염탐하라고 내보낸 청죽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외조부 일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군왕께서 외조부 일가를 다 구해주셨는지 알 수 없었다.

"청죽 언니는 도움을 주러 갔어요. 아마 오늘 내로 돌아올 겁니다." 수화는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국공부 일가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군왕께서 진씨 가문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니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 부군께서 고생이 많으시지." 무완희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부군인 송영걸(宋英傑)은 송친왕의 서자(庶子)이지만 송씨 가문의 장자이자 황제께서 친히 책봉한 군왕이었다.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던 그가 오늘날 제국 내에서 명성을 떨치기까지 무완희와 진국공부의 도움이 컸다.

송영걸은 적자 또는 서자와 관계없이 장자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송친왕부의 법도에 따라 운 좋게 군왕 자리를 꿰찼지만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군왕"이라는 유명무실한 자리를 내놓고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진국공부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없고 오늘날과 같은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진씨 가문은 무장세가(武將世家)로서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혁혁한 전공을 세워 진국공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딸은 용모와 재능이 출중하여 승상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그녀는 딸인 무완희가 성인이 되는 날 뜻밖의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진씨 가문은 무완희에게 모든 정성을 몰부었다. 무완희가 송영걸과 혼인하겠다고 했을 때 비록 손녀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진씨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전쟁터에 나간 송영걸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큰 전공을 세워 명성을 떨치고 권력을 얻게 되었다.

"참, 수화야. 설유(沐雪柔)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요즘 잘 지내고 있느냐?" 무완희는 둘째 동생 생각만 하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설유, 운명이 기구하기도 하지. 시집을 간지 3년만에 부군을 잃은데다가 시어미는 아들 잡아먹은 년이라고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구박했다. 힘들게 사는 동생이 안타까워 그녀는 주동적으로 동생을 왕부로 데려왔다.

수화는 이 상황에서도 동생 걱정을 하는 무완희를 속으로 비웃었다. '지금 둘째 아가씨 걱정을 하십니까? 둘째 아가씨는 잘 지내고 있다마다요. 지금쯤이면 대청에서 군왕과 혼사를 치르고 있을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군왕비의 자리도 내주어야 할 걸요.'

"둘째 아가씨께서는 요즘 무척이나 바쁘십니다."

"그러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설유의 발목을 잡은 게야." 무완희는 불러온 배를 쓰다듬으며 자책했다. "내가 회임을 하지 않았더라면 설유가 나 대신 왕부의 대소사를 처리하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회차 2

수화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구제불능 여인 같으니라고. 둘째 아가씨께서 왕부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 본인을 위해서라고요. 그래야만 군왕비가 되는데 명분이 생기는 거라고요.'

"아가씨!"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정운각 안으로 쳐들어왔다. 무완희는 살짝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수화야, 청죽이 돌아온 것 같구나."

수화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청죽이는 왜 하필 지금 돌아와서 둘째 아가씨의 좋은 일에 훼방을 놓는 거야?' 그녀는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청죽이가 무완희를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청죽이의 충성심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청죽은 오로지 아가씨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괴력을 발휘하여 앞길을 막은 두 여인을 밀쳐내고 곧바로 방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저 년을 막아라!" 수화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안으로 달려가는 청죽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때 무완희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지금 뭐 하는 짓이니?"

"군왕비님, 큰일났습니다." 청죽은 무완희를 보자마자 애타게 외쳤다.

"폐하께서 오늘 국공부의 구족을 멸하라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노국공(老國公)을 위시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도 포함해서요⋯" 청죽은 눈시울을 붉히며 국공부의 상황을 무완희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무완희는 다 듣기도 전에 안색이 창백해지며 배를 움켜쥐었다. 너무 격동한 나머지 태기가 상역한 것이다.

"군왕비님." 청죽은 재빨리 무완희의 곁에 달려가 부축하였다. "군왕비님, 괜찮으십니까?"

무완희는 청죽의 팔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외조부께서 어떻게 되었다고?"

"진씨 온 가문이 멸족되었습니다." 청죽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소식을 듣자마자 돌아오려 했지만 무설유에 의해 마구간에 갇히는 바람에 이제서야 간신히 도망쳐나올 수 있었다.

무완희의 다리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배에서도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청죽은 놀라서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여, 여봐라. 어서 산파를 불러오거라, 군왕비님께서 출산을 하신다."

수화도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청죽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조심스레 무완희를 안아 침대에 뉘였다. "군왕비님, 아무쪼록 무사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도련님을 출산하셔야 합니다. 군왕비님의 미래는 전부 도련님한테 달려있습니다. 둘째 아가씨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군왕을 홀려 군왕비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군왕비님께서 만약 도련님을 출산하지 못하시면 지위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어서 산파와 의원을 불러 오거라." 청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수화는 미간을 찌푸리고 욕설을 퍼부으려 하다가 애써 참고 문밖으로 나갔다.

"청죽아, 군왕을 모셔오거라⋯" 무완희는 통증으로 인해 얼굴에 혈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군왕께서 분명히 외조부 일가를 구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일이 이 지경이 된 걸까.

"군왕비님, 부디 정신차리셔야 합니다. 반드시 도련님을 무사히 출산하셔야 합니다." 청죽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군왕은 지금 대청에서 둘째 아가씨와 혼례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군왕비님을 아랑곳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군왕비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자극을 받아 아이를 품은 채 숨을 거둘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아악!" 무완희는 배가 너무 아파서 비명을 내질렀다.

"산파는, 산파는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냐." 청죽은 옆에 서있는 푸름이를 째려보며 말했다. "어서 산파를 불러오거라."

푸름이와 이령이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완희는 밀려오는 통증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보다못한 청죽이 직접 산파를 불러오려고 하는데 수화가 탕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 서있는 사람은 혼례복 차림의 송영걸과 무설유였다.

회차 3

"군왕님⋯" 청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송영걸은 방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무완희는 그를 보자 간신히 손을 뻗으며 말했다."군왕, 분명⋯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송영걸은 무정하게 무완희의 손을 뿌리쳤다. 무설유가 미소를 머금고 무완희의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큰 언니, 몸은 좀 어떠십니까?"

무완희는 붉은색 혼례복을 입은 무설유와 송영걸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영걸을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완희는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송영걸을 바라보았다. 눈 앞의 이 남자는 일평생 그녀만을 사랑하고 절대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무설유가 입은 붉은색 혼례복은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하듯 아프게 했다.

"큰 언니, 군왕께서는 처음부터 언니를 마음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무설유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군왕께서 마음에 두신 여인은 처음부터 저였어요. 군왕께서는 단지 진국공부의 뒷받침이 필요했던 겁니다. 오늘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였고 군왕께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벼슬에 오르셨으니 이제 언니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 언니도 그만 물러나야죠."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에 무완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영걸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고 믿고 싶었다. "군왕, 말씀해 보십시오. 전부 거짓말이지요⋯"

"아 참, 언니가 모르는 사실이 또 있어요. 진국공부 말입니다. 바로 군왕께서 직접 사람을 데리고 가서 몰살한 거예요." 무설유는 얄밉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씨 가문이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배반한 증거 역시 군왕께서 찾아내신 겁니다."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큰 언니가 믿건 말건 이제는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언니가 이 탕약을 반드시 마셔야 한다는 겁니다." 무설유의 표정이 갑자기 사악해졌다.

"뭘 하려는 거야?" 무완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온 몸에 힘이 풀려 반항할 수 없었다.

"군왕비한테 손 대지 마십시오!" 청죽이 앞으로 나서서 무완희를 감싸 안았다. "군왕님, 둘째 아가씨. 군왕비께서 당신들에게 그리도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어찌 이리도 마음이 독하십니까."

"천한 노비 따위가 감히 어디서 참견이야. 썩 꺼지거라!" 무설유가 청죽의 뺨을 후려쳤지만 청죽은 비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송영걸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발을 들어 청죽을 힘껏 찼다. 힘없이 넘어진 청죽은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줄줄 흐르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죽아!"

"언니, 직접 마시겠어요, 아니면 제가 사람을 시켜 입에 넣어드릴까요?" 무설유는 환히 웃으면서 물었다.

"군왕,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입니다!" 무완희는 애원하듯 말했다.

송영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뻗어 무완희의 턱을 힘껏 끌어당겼다. "탕약을 부어 넣어라."

"네, 군왕님."

수화가 탕약을 들고 다가왔다. 푸름이와 이령이는 무완희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힘껏 눌렀다. 수화는 탕약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무완희의 입에 부어 넣으며 생각했다. '군왕비님, 저를 탓하지 마시고 멍청한 자신을 탓하십시오!'

송영걸을 바라보는 무완희의 눈빛이 점차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던 남자는 자신의 아이조차 버리려 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완희는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심해지는 통증과 더불어 배속의 아이가 점차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온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꼭 이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아직도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생각하느냐? 난 진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리고 드디어 난 바라던 모든 것을 전부 이루었어. 잔인한 사실을 알려줄까? 진국공부는 매국 죄로 멸족되었어. 갓 태어난 아이도 전부 목을 베었지."

지금 전체 스토리 읽기
작가를 후원하고 Moboreader의 다음 이야기를 응원해 주세요!
모든 회차 잠금 해제

이번 생은 악녀 왕비가 되겠습니다

1화
회차
사용자 설정
다음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