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야색 클럽.
룸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서도현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안주를 집어 먹었다.
"재진아, 정말 김이서와 결혼할 생각이야?"
가죽 소파에 기대앉은 이재진의 손가락 사이엔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서도현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알아봤는데, 김씨 가문의 큰 아가씨는 천방지축 날뛰는 성격이라 아주 까다로워. 얼마 전에는 고준한 그 병신 새끼를 지킨답시고 싸움이 나 A시가 한 동안 떠들썩했다고."
"내가 보기엔 임은지가 괜찮아 보이던데."
서도현은 낙지를 질걸질겅 씹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사생아이긴 한데, 말도 잘 듣고 착한 데다 얼굴도 예뻐. 그런 여자와 결혼하면 귀찮은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얌전하잖아."
"얌전해?"
이재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그런 여자는 재미가 없어."
"오호, 그런 취향이었어?"
이재진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김이서와 결혼할 거야."
"야. 근데, A시 사람치고 김이서가 고준한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고준한을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 좀 그렇지 않아? 체면이 안 살잖아."
"내 결혼이야. 누구랑 결혼할 지는 내가 정해."
그 말을 들은 서도현은 순간 경계하며 말했다. "너 무슨 생각이야? 섣불리 행동하지 마. 김씨 가문도 명문 가문이고, 김이서는 김씨 가문의 큰 아가씨야. 너 설마 김서아한테 양아치 짓 하려는 거 아니지?!"
이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서도현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야! 양아치 짓 할 때, 나를 꼭 불러야 해! 알겠지?!"
김씨 가문의 두 아가씨가 동시에 약혼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A시 전체에 퍼졌다.
3일 후, 김이서는 혼인 신고서를 손에 쥐었다.
사진 속 그녀와 이재진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김유나의 미소는 어색하기만 했고 이재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사실 이재준은 시청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며칠 전, 이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 김씨 가문을 찾았다. 그는 그녀를 사진 찍더니 포토샵으로 이재진의 사진과 합성했다. 이어 그 사진 위에 도장이 찍혔고 그렇게 혼인신고를 마쳤다.
모든 과정은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혼인 신고서를 손에 든 김이서는 사진을 뜯어보며 합성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전생, 이재준과 임은지의 결혼식은 그야말로 성대함의 극치였다. 3일 내내 연회가 열렸고 A시 사람이라면 전부 다 참석했을 정도였다.
당시, 임은지는 맞춤 제작 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이재진의 손을 잡고 레드 카펫을 걸었다.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정작 김이서의 결혼은 포토샵 사진 한 장으로 끝났다.
하지만 김유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A시에 김이서가 고준한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이씨 가문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재진은 이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준 것이다.
그렇다면 임은지는 어떨까?
임은지는 사생아다. 그래서 이재진은 임은지를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A시 사람들은 이씨 가문 사모님이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다시는 입에 올리지 못할 거니까.
이래도 저래도 결국은 다 이씨 가문의 체면을 위한 행동이다.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이익만 있을 뿐이다.
김이서는 이재진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재진을 선택한 이유는…
이씨 가문의 권세 때문이니까.
한편, 임은지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다.
고준한은 몸이 좋지 않아 시청에 가지 못했고, 두 사람의 결혼도 대충 끝났다.
신혼 첫날 밤.
김이서는 캐리어를 끌고 이씨 가문 저택 앞에 섰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씨 가문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영의식은 없었다.
심지어 결혼식도 열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씨 가문은 김이서더러 이사 오라고 통지만 했을 뿐이다.
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문 앞에 서서 물었다. "김씨 가문 아가씨 맞으십니까?"
"이재진을 만나러 왔어요."
"대표님께서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김이서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고요? 그럼 난 어디서 지내야 하죠?"
집사는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아가씨더러 일단 김씨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을 때, 다시 사람을 보내 모셔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우산을 건네 받은 김이서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집사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 "절 부른 건 이씨 가문이에요. 그런데 다시 돌아가라고 하다니요? 나를 무슨 강아지 취급하는 거에요?"
집사는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아가씨, 대표님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김이서는 우산을 집사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재진에게 전해주세요. 나 김이서는 오늘 반드시 이씨 가문 저택에 들어갈 거라고요."
"대표님께서 아가씨께서 만약 기어코 돌아가지 않는다면 대문 앞에 세워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대 만나주지 않으실 거라고 한마디 보태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김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재진이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고.'
'저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상관 없어, 내겐 방법이 있으니까.'
김이서는 곧장 이씨 가문 대문 앞으로 다가가 하이힐을 벗더니 그대로 철문을 기어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집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경보기가 미친듯이 울려댔으나 김이서는 듣지 못한 척했다.
허겁지겁 달려 온 경비원들이 김이서를 발견하고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막을 수도, 막지 않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김씨 가문의 아가씨는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대문을 기어 오르다니!
"김 아가씨!"
"전 이씨 가문 사모님이에요. 이건 나와 이재진 씨의 혼인 신고서고요. 내가 우리 집에 들어가는데, 누가 나를 막을 수 있죠?"
김이서는 주위를 둘러봤다.
경비원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김이서는 하이힐을 손에 든 채, 이씨 가문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씨 가문 저택은 매우 넓었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거실 중앙에 서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 본 뒤,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입구에 도착했을 때,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김이서가 고개를 들었다.
이재진이 2층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검은색 가운을 걸친 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로 서있었고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재진의 눈빛에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올라오라고 했지?"
"내가."
김이서는 캐리어를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그를 올려다 봤다. "이재진, 우린 혼인 신고를 마친 사이야. 설마 오늘이 첫날 밤인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날 어디 재울거야?"
이재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집사와 경비원들이 거실로 들어왔다.
집사는 황급히 말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사모님께서 대문을 기어 올라오셨습니다. 저희가… 저희가 미처 막지 못했습니다."
대문을 기어 올라왔다고?
이재진의 시선이 김이서의 다리에 머물렀다.
하얀색 짧은 원피스 아래로 그녀의 곧게 뻗은 다리가 보였고 더러워진 그녀의 하이힐이 눈에 들어 왔다.
다리에도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명문 가문 아가씨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재진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더니 그녀의 바로 앞에 멈췄다. 이어 그가 손을 들어 올렸고 집사와 경호원들은 자리를 피했다.
둘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김이서는 그의 몸에서 희미한 술 냄새와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의 차가운 미소에 김이서는 등골이 오싹해 났다.
"김이서."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혼인 신고를 했다고 해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다고 생각해?"
김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야? 혼인 신고를 한 순간부터 난 이씨 사모님이야."
이재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래."
그는 술잔을 옆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럼 이씨 가문 사모님에게 묻겠어. 첫날 밤인데 어디서 잘 거야?"
김이서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몸을 돌려 거실 소파 앞에 멈춰 서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이재진은 순간 멈칫했다.
김이서는 소파에 기대앉아 더러워진 하이힐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2층에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잖아. 여기서 자면 되겠네. 내가 어디서 자든 내가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란 사실은 변함 없어."
회차 3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김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재진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김이서는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김씨 가문의 큰 아가씨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고, 웨딩 사진도 찍지 못했으며 신혼 첫날부터 남편에게 문전박대까지 당했다.
그런데 김이서는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도, 처가에 전화해 고자질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냅다 소파에 드러누운 그녀의 모습에서 절대 이씨 가문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졌다.
이재진은 그런 김유나가 꽤 흥미로웠다.
김이서는 고개를 들어 이재진을 쳐다봤다. "이재진,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린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으니 한 배를 탄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네가 날 인정할 때까지 난 여기서 버틸거야. 하루가 걸리든, 일 년이 걸리든, 네가 날 인정할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뭘 인정하라는 거지?"
"내가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란 걸 인정해."
김이서를 빤히 쳐다보던 이재진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는 김이서를 향해 말했다. "기다리든가."
이재진이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거실에 남은 김이서는 천천히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로는 기다린다고 했으나 사실 도박을 하고 있었다.
전생, 그녀는 이재진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는 예삿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껴야만 이재준은 비로소 그녀를 거들떠 볼 것이다.
그녀는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
2층, 이재진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의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서도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때? 그 아가씨 난리를 쳤어?"
이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 따랐다.
서도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울었어? 김씨 가문에 전화해서 고자질하진 않았어?"
"아니."
"어? 그럼 걔 지금 뭐하고 있는데?"
이재진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소파에 드러누웠어."
"드러누웠다고?"
"그래."
"왜? 왜 드러누운건데?"
이재진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가 걔를 이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인정할 때까지 기다린대."
다음 날 아침.
김이서는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이씨 가문의 거실은 넓었고, 소파도 푹신했지만 침대만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목이 뻐근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주물렀다. 그때, 테이블 위에 따뜻한 우유 한 잔과 샌드위치 한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집사가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을 보고 다가왔다. 어젯밤보다 훨씬 공손한 태도였다. "사모님, 이건 사장님께서 준비하라고 지시하신 아침 식사입니다."
김이서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재진이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요?"
"네."
김이서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온도가 딱 적당했다.
그녀는 싱긋 미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층, 이재진은 서재 창문 앞에 서서 정원을 청소하는 하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곁에 다가서서 함께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 아직도 안 갔네? 난 김이서가 그저 말로만 그러는 줄 알았어."
이재진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서도현은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도 꽤 근성이 있네. 다른 아가씨였어 봐, 신혼 첫날밤에 소파에서 잠을 자게 했다면서 눈물을 질질 짜며 친정으로 돌아갔을 거야."
이재진은 몸을 돌려 책상 앞에 앉았다. "근성이 아니야."
"그럼 뭔데?"
"똑똑한 거지."
"똑똑하긴 뭐가 똑똑해!"
이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서류를 펼쳤다.
서류에는 김이서의 개인 정보가 적혀 있었다.
김이서는 똑똑한 여자다.
그녀는 울며 난리를 치는 것도, 친정에 고자질하는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김이서는 아침을 먹고 나서 캐리어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집사는 그녀를 막고 싶었지만 감히 막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사모님, 사장님 서재는 2층 동쪽에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난 어디서 자면 되죠?"
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복도 끝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은 사장님 침실이고, 그 옆 방이 손님방입니다."
김이서는 손님방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지만,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 놓더니 안에서 옷을 꺼내 옷장에 걸기 시작했다.
집사는 문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김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사모님, 사장님 성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먼저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이서는 몸을 돌려 집사를 쳐다봤다. "집사님, 이재진이 날 이 사모님으로 인정할까요?"
집사는 깜짝 놀랐다.
"쳇, 봐요. 모르시잖아요. 그런데 집사님한테 여쭤봐서 뭐하겠어요."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김이서는 계속해서 옷을 옷장에 걸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재진을 건드리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이곳에서 살 거에요. 이재진이 날 투명인간 취급하면 나도 이재진을 투명인간 취급하면 그만이에요."
점심, 김이서는 1층으로 내려왔다.
식당에는 그녀 밖에 없었고, 테이블 위에는 여덟 가지 반찬과 국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다.
오후에는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정원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원사는 그녀에게 장미와 월계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이재진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김이서는 말 없이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갔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날, 서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젠장! 나 못 참겠어! 너희 집에서 4일이나 보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김이서가 산책하는 모습만 주구장창 봤다고!"
이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김이서가 이렇게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며칠 동안, 그녀는 그를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집사더러 김이서를 서재로 데려오라고 해."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는 서도현이 그의 집에 아예 눌러 붙을 지도 몰랐다.
그 시각, 김이서는 정원사와 함께 새장을 들고 산책하고 있었다. 집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사모님,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서재로 부르셨습니다."
김이서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금요?"
"네."
"알겠어요."
김이서는 새장을 내려놓고 치마를 정리하고는 집사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2층 서재 문 앞,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집사는 문을 열더니 김이서를 향해 들어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서재는 넓었고, 통유리창 앞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이재진은 책상 뒤에 앉아 만년필을 손에 쥐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김이서는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재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이리 와."
김이서는 천천히 다가가 이재진의 맞은편에 섰다.
이재진은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머리를 자연스레 늘어뜨렸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너무나 맑았다.
사흘 동안 보지 보지 못했을 뿐인데, 약간 마른 것 같았다.
"지낼 만해?"
김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울지 않았어?"
"아니."
"소란 피우지 않았어?"
"아니."
이재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그녀를 쳐다봤다.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김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김씨 가문 아가씨가 신혼 첫날밤에 방에서 쫓겨나 불쌍하게 소파에서 밤을 보냈고 이튿날이 되었는데 여전히 창피한 줄도 모르고 김씨 가문에 눌러 붙었다고 하 더라고."
그 말을 들은 김이서는 싱긋 미소 지었다. "응"
"응? 그게 끝이야?"
"아니면? 무슨 반응을 원해?"
김이서는 이재진을 빤히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썼다면, 너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이재진은 그녀를 몇 초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다. 그런 그가 자신을 내려다 보자 김이서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역시 A시 제일가는 권력가 다운 기세였고 상계와 어두운 세계를 주름 잡는 다는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김이서, 뭘 원하는 거야?"
김이서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