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내 말 알아들었으면 눈 깜박거려." 차 뒷자리에서 남자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분명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차갑게 식은 눈빛은 공기마저 얼릴 만큼 날카로웠다.
등골이 오싹해 난 이예진은 바로 눈을 연신 깜박였다.
남자의 손에 쥔 총이 정확히 그녀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었기에, 대답을 조금이라도 늦게 했다간 당장에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카카오 택시를 운전 중인 그녀가 첫 손님을 목적지에 데려다 준 후 떠나려는 찰나, 낯선 남자가 차에 난입해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다.
겁에 질린 이예진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몇 명이 손에 연장을 들고 나타났다. 사나운 표정인 남자들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혼자인 게 확실해! 절대 기회를 놓쳐선 안돼!. 강력한 최음제를 다량으로 흡입했으니 멀리 도망치지도 못했을 거야! 오늘 김도현을 죽이지 못하면 형님이 우리를 찢어 죽일 거야! 빨리 찾아!"
한 무리 남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이예진은 룸미러를 통해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남자는 아마 방금 한 무리의 남자들이 쫓는 상대인 김도현일 것이다.
김도현,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한 이름. 왜 낯설지 않은 걸까?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시동 걸어." 김도현은 이예진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더욱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시커먼 총구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이예진은 긴장감을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
"저, 선생님. 제가 돈을 드릴 테니 다른 택시를 타는 게 어떨 가요? 저는 중병에 처한 할아버지 때문에 투잡을 뛰고 있어요.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총까지 겨누다니요... 하늘은 너무 불공평해요." 어쩌면 남자가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예진은 울상으로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토로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뒷자리에 앉은 김도현은 뜨거운 열기가 육체를 잠식한 것과 동시에 의식마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복용한 최음제는 그의 오감을 파괴하는 것과 동시에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묻어났다. 스승님의 생신인지라 그는 오늘 비서를 비롯한 경호팀을 대동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오늘 처음 만난 여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여기 적힌 주소로 가. 빨리!" 더는 참기 어려워진 그가 운전석을 향해 상세한 주소가 적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예진은 남자의 제안을 거부하려 했으나,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러오는 총구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켜야만 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이예진은 뒤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김도현을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카카오 택시를 운전한지도 이제 6개월 정도가 된 이예진은 이 도시의 지리에 빠삭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목적지는 그녀가 평소 다니던 길과 완전히 달랐다. 더욱이 GPS에도 노란 별로 표시되어 있어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가 이상한 낌새를 지우기도 전에 차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다급하게 차를 세운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손님, 여기가 맞나요?"
뒷자석에 앉은 남자는 무기력하게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지만 손에는 여전히 권총을 꼭 쥐고 있었다.
남자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본 이예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체념한 듯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려 뒷죄석 문을 열었다.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한 그녀가 바로 김도현의 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옷을 뚫고도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저, 손님. 그래도 요금은 내야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이예진의 차가운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김도현의 가슴에 닿았다.
간신히 정신을 잡고 있던 김도현의 이성이 그녀의 손길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잡았다. 김도현의 눈빛은 욕망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욕구로 얼룩진 김도현의 눈빛을, 성인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희미한 조명과 좁고 어두운 뒷좌석,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끈적하게 얽혔다.
회차 2
당황한 그녀가 힘껏 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했지만 김도현은 이미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만둬요! 택시 요금도 받지 않을게요. 네?" 이예진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당황함에 말까지 더듬었다.
"날 도와주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줄게." 마지막 이성의 끈을 겨우 잡은 김도현이 주머니에서 금색 카드를 꺼내더니 그녀의 머리맡에 내려놓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려 했으나 금빛이 반짝이는 카드를 본 순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도현의 외모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적어도 그녀가 그 동안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였다.
몸에서 끓어 오르는 열기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던 김도현은 이예진의 몸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살 내음에 자제력이 완전히 무너졌다.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이예진에게 첫 경험은 엄청난 고통만 남겨줬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 희미하게 드려진 달빛 아래, 흰색 승용차가 조용한 바다 위를 표류하는 외로운 배처럼 흔들렸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남자의 움직임에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린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더욱 거칠게 그녀를 안았고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끝날 무렵 이예진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힘도, 애원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희미하게 그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쏟아지는 잠에 다시 눈을 감았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예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아파..."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뒷좌석 시트에 누운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아파오는 통증에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좁은 공간에서 벌어졌던 황당한 일들이 눈 앞에 선했다.
남자가 했던 약속을 떠올린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은행 카드를 찾았다.
바로 머리 위에 놓여 있는 금색 카드 옆에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비밀번호는 없어.'
카드를 손에 움켜쥔 그녀는 어젯밤 일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녀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 측에서 밀린 입원비를 내라는 독촉 전화였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는 순간, 다리와 허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전해져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낮은 목소리로 김도현에게 저주를 퍼붓고 나서 그녀는 힘겹게 다리를 옮기며 간신히 운전석으로 향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조수석에 휴대폰을 던진 그녀는 황급히 시동을 걸어 숲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식은 차에 탈 때부터 이미 이럴 계획이었어!'
정말이지 이토록 뻔뻔스러운 남자를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낡은 월셋방으로 돌아온 이예진은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 밀린 병원비를 납부하려 했다.
30분 후, 깔끔한 모습으로 병원비 수납 데스크에 나타난 그녀는 남자가 남기고 떠난 금색 카드로 병원비를 납부했다. 한편, 그녀가 병원비를 납부하자마자 은행 측에서는 바로 직원에게 사실을 알렸다. 이예진은 누군가 자신이 카드를 사용하는 현황을 일일이 감시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밀린 병원비를 납부한 이예진은 중환자실로 가 할아버지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건물 앞에 3대의 고급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고, 독특한 번호판은 차량의 소유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복잡한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곧장 세단을 피해 중환자실로 향했다.
바로 그때, 대통령 비서실장인 고태수가 차분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로 이예진에게 다가갔다. "실례지만 이예진 씨 맞으신 가요?"
이예진은 조금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네."
"저희 상관께서 이예진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이예진의 신분을 확인한 고태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예진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그들이 말하는 상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전혀 만날 생각이 없었다. 고태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이나 한 듯,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금색 빛이 번쩍이는 카드를 사용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이예진 씨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면 차에 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 상관의 카드를 훔쳤다고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만약 이예진 씨가 기소된다면, 당분간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고태수는 여전히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예진은 바로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만약 그녀가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평생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어젯밤 김도현이 했던 약속을 떠올린 그녀는 마음속에 분노와 수치심이 차 올랐다.
회차 3
이예진은 주머니에서 골드카드를 꺼내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하게 말씀 드리자면 이 카드는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한테 준 거예요. 따라갈게요. 그 상관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제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어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자유까지 짓밟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협박까지 하는 건지!"
고태수는 아무 말 없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곁에 선 경호원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흠잡을 데 없는 동작으로 차 문을 열었다.
"이예진 씨가 카드를 훔쳤든 우연히 발견했든, 자세한 설명은 저희 상관님 앞에서 직접 하기실 바랍니다." 고태수는 그녀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문을 닫았다.
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어떤 상황이 그녀를 맞이할지 감조차 잡지 못한 이예진은 불안감과 긴장감을 지우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을까, 차가 미끄러지듯이 멈춰 섰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저택과 마당에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궁전을 방불케 하는 저택은 그녀가 월세도 간신히 내는 낡은 건물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커다란 대문 앞에 선 이예진이 어쩔 바를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제복을 입은 여자 도우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따라오세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가정부가 그녀에게 길을 안내했다.
이 곳에서 일하는 가정부라면 맡은 직책이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명문대 학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단순히 요리와 청소를 잘해서는 이곳에 명함도 들이밀 수조차 없었다.
이예진은 가정부의 뒤를 따라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의 인테리어는 호화스럽기 그지 없었다.
1층 객실에는 메이드복을 입은 가정부 몇 명이 이예진을 단단히 둘러쌌다.
이에 이예진은 놀라 뒷걸음 치며 다급히 물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카드를 돌려받기 위해 내 옷까지 벗길 필요는 없잖아요!"
가정부들은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를 사치스러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욕실로 데려갔다.
"그분을 만나시려면 아가씨께서는 몸을 깨끗히 씻은후에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혹시 위험한 물건을 숨겼다면 지금 내놓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에게 길을 안내한 가정부이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대체 이런 규정은 누가 정했나요? 그 분이 대통령이라도 돼요? 몸을 수색하는 것도 모자라 몸을 깨끗이 씻고 검사를 해야 한다니?" 이예진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거부했지만, 가정부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욕조에 담긴 물은 완벽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급 오일 향기가 희미하게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대체 그들이 부르는 그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예진은 가정부들이 모두 욕실을 나가고 나서야 천천히 옷을 벗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공기 중에 퍼진 오일 향과 적당한 물 온도가 그녀의 긴장을 서서히 풀어줬다. 욕조에 몸을 맡긴 그녀는 온몸의 피로가 가시는 느낌에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설마 어젯밤 나한테 준 카드가 누구한테서 훔친 건 아니겠지?' 어쩌면 진짜 카드 주인이 그녀를 찾아와 따지려고 할지도 모른다. 대체 카드 주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궁전보다 더 호화로운 저택에서 지내는 걸까?
이예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습을 본 가정부는 그녀에게 최신상 원피스를 입히고 간단한 메이크업과 스타일을 손봐 주었다.
이예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그녀는 단지 카드를 돌려주기 위해 왔을 뿐인데, 왜 그들은 그녀의 외모에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
"이예진 씨, 저를 따라오세요." 이예진이 방을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던 중년 집사가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길을 안내했다.
집사의 뒤를 따라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녀에게 카드를 돌려 달라고 하지 않나, 저택에 들어서니 가정부들이 몰려와 일단 씻고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심지어 의상에 메이컵까지 신경 써 주는 모습은 '도둑'을 잡기는 커녕 일부러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예진이 집사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는 고급 세단이 가지런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제일 앞에 멈춰선 차에서 훤칠한 남자가 역광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훤칠한 기럭지에 한눈에 봐도 고급진 양복을 입은 그는 멀리서 보아도 기품이 남달랐고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남자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 져서야 이예진은 그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었다. "당신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