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거센 바람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에 빗방울을 내리쳤다.
웅장한 저택 안에서는 오직 한 침실만 불빛이 켜져 있었다.
안세연은 머리맡에 기대어 책을 읽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침실 문이 확 열리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편인 소진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그의 얼굴에는 왠지 불쾌함이 드러나 있었다.
안세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진우의 술기운이 감도는 촉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으며 차가운 손이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낮고 취기가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직이지 마."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고, 통증이 극에 달해도 그저 희미한 신음소리만 냈다.
소진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안세연은 마치 폭풍우 속에서 몸을 의지하는 것처럼 소진우의 단단한 팔을 꼭 잡았다. 거의 기절하려 할 때, 마침내 소진우가 그녀를 놓아주고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던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화면을 힐끗 보자, 새로운 메시지 내용이 보였다. "진우야, 미안해. 싸울 때마다 벙어리 아내에게 가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돼? 자기 그럴 때마다 정말 상처받아."
메시지를 본 안세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남편과의 다정한 장난이나 사랑스러운 투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병으로 인해 그녀는 목소리를 잃었고, 지금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낼 수 있는 소리는 부서지는 음절 몇 개일 뿐이지만, 남편인 소진우마저도 그 소리를 싫어했으니.
욕실의 반투명한 유리창에 소진우의 늘씬한 그림자가 비추자, 그녀는 얼른 눈을 돌렸다.
소진우는 아무렇지 않게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방금 내 핸드폰 봤어?"
안세연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그저 우연히 본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내심이 이미 바닥난 상태였던 소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내 휴대폰에 손대지 마."
안세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우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들이 결혼한 건 할아버지의 강요 때문이었다. 소진우조차 그녀가 소씨 집안의 양녀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결혼한 것이라고 직접 말했었다.
안세연은 5년 동안 한 번도 소진우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의 외도를 알면서도,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수화로 그에게 해장국을 끓여주겠다고 말한 후,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마자, 소진우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삭제했다.
다음 날 아침, 안세연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위장이 약한 탓에 입맛이 까다로운 소진우의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세연은 수년 동안 매일 그의 아침 식사를 정성껏 준비해 왔다.
소진우가 계단을 내려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안세연의 모습이었다.
앞치마 끈은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하얀 목에는 전날 밤의 흔적이 연하게 남아 있었다. 부드럽고 조용하며, 여태껏 말썽을 피운 적이 없는 그녀는 확실히 좋은 아내였다.
소진우의 무표정한 얼굴에 잠시나마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 그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같이 아침 먹자."
안세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앞치마를 벗고, 그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진우가 샌드위치를 건네자, 안세연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샌드위치를 받았다.
그때, 소진우가 무심하게 말했다. "내일 조카 백일잔치에 같이 가자."
깜짝 놀란 안세연은 하마터면 샌드위치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평소에 그녀를 공개적인 모임에 데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자리에 함께 가자고 하다니. 그녀는 망설임과 혼란스러움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소진우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 듯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내일 비서가 옷을 가져다줄 거고, 점심 쯤에 데리러 올 거야."
안세연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씨 가문은 강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장남인 소장명은 첫째 아이의 백일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소장명은 이번 행사를 위해 최고급 호텔을 예약했으며, 초대된 손님과 가족 모두 흥분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세연은 은은한 메이크업을 더한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의 고운 이목구비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시선들에는 감탄이 아닌 비판이 담겨 있었다.
"참 운도 좋지! 말도 못하면서 시집은 어쩜 그렇게 잘 갔을까? 왜 난 그런 운이 없지? 내가 말을 할 수 있어서 그런 건가?"
"말한다고 뭐가 달라져? 저렇게 동정심을 유발할 수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생각해 봐, 그녀가 얼마나 처량해 보였으면 소 회장님이 양녀로 받아들여 둘째인 소진우 도련님에게 시집보냈겠어. 쯧쯧!"
"사람들은 그걸 행운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다 계산된 거야. 너도 좀 배워야겠어!"
안세연은 마음속으로 반박하며 할아버지께서 단지 그녀를 동정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세연아, 여기 있었구나! 모두 널 기다리고 있었어."
회차 2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호텔 안을 가득 채웠다. 안세연의 새언니인 강유미가 아이를 안고 따뜻한 미소로 안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아기 좀 안아봐. 너랑 진우는 5년째 결혼한 지 5년째인데, 빨리 아기를 가져야 하지 않겠어?"
순간, 모든 시선이 안세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안세연의 손에는 긴장으로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강유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누가 네 장애를 탓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내로서 착하기만 해서는 안 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면 어떻게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겠니?"
너무 민망한 안세연은 그저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정영이 강유미의 아기를 재빨리 데려가며 말했다. "이 아이는 건강하잖니. 네가 안았다가 병이라도 생기면 책임질 거야?"
안세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손짓으로 설명했다.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게 아니에요. 난 그저..." 그때...
안세연의 수화를 본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정영은 아예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차라리 네가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네 아이도 너랑 같은 장애로 태어나면 어떻게 하겠니? 너무 재수 없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동의했다. "맞아, 아이의 미래도 생각해야지!"
안세연의 마음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면, 그 여자는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걸까? 사실 그녀는 불임이 아니었고, 이전에 임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영은 아이가 말 못하는 게 유전될 수 있으며, 소진우가 그런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낙태를 강요했다.
안세연은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질병 때문이지, 유전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아이를 지워야만 했다. 그 결정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때 강유미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딸만 낳았고, 또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만약 세연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우리 가문의 대가 여기서 끊길 수도 있잖아요."
강유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소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우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방 안의 시선이 모두 소진우에게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소진우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공개적으로 안세연을 버린다면, 분명 큰 화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소진우는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강유미는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정영이 나서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했다. "네 형수가 그저 널 걱정해서 한 말이잖니.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구나."
강유미는 고개를 떨구며, 억울한 듯 말했다. "남편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나 혼자 케어해야 했어. 형수로서 너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할게."
소진우는 여전히 차가운 말투였다. "그렇게 힘들면 앞으로 집안일에는 더 이상 상관하지 마세요."
이어 비서에게 손짓하며 가져온 선물을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 "내 사생활은 내가 알아서 해요."
놀라고 당황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소진우는 안세연을 호텔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리둥절해 있던 안세연은 차에 타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소진우가 자신을 이렇게 감싸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안세연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대답에 소진우는 더욱 짜증이 났다. "그래, 그럼 지난 5년 동안 아이를 가질 생각은 정말 한 번도 안 해봤어?"
안세연은 항상 순종적이고 친절했으며, 소진우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마저도 아이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자, 소진우는 그녀의 마음이 진심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결혼 이후로 안세연은 꿈에도 두 사람만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있는 한 그 꿈은 절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소진우가 그녀의 생각을 떠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안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화로 대답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내가 낳은 아이가 건강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포기했어요."
소진우가 그녀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당신 말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거네. 하지만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어젯밤 우리 피임 기구 없이 뜨거운 밤을 보낸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이후로 당신 피임약도 안 먹었지?"
회차 3
"어제는 임신 안전기예요." 안세연이 수화로 답했다.
소진우의 눈에 실망감이 잠시 스쳤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안세연은 그가 아이를 갖는 데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의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쇼핑 가고 싶어? 아니면 미용실 어때? 같이 갈 사람을 구해줄게." 소진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전해왔다.
안세연은 고개를 저으며, 출근해야 한다고 손짓으로 전했다.
소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중요한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무리할 필요 없어. 그냥 일 안하고 집에 있으면서 편하게 지내도 돼."
소진우는 안세연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완벽한 남편이었다. 그녀가 집에서 해야 할 일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 외에는 거의 없었고, 매달 상당한 액수의 용돈도 챙겨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한도가 없는 카드도 주었다.
하지만 안세연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편안함이 아닌 사랑이었다.
안세연이 처음 소진우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겨우 17살이었다. 그는 그녀를 아끼고 평생 사랑할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첫 번째 약속은 지켰지만, 두 번째 약속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안세연은 차가 멈춘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제야 사색에서 깨어났다.
창문이 내려가자, 빨갛게 부어오른 호두 같은 눈과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바로 소진우의 애인 맹아연이었다.
맹아연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 그녀는 차 창문을 붙잡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기다렸는데 당신 통 연락이 없더라고. 그래서 자기 집에 갔더니, 형 아이 백일잔치에 갔다고 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정말 나한테 화났어? 내가 너무 많이 떠드니까 말 못하는 아내 옆에서 휴식이라도 취하려고 했던 거야?"
맹아연의 말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정말 웃겼다. 그녀가 벙어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조차 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다니.
맹아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소진우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이제 알았어?"
맹아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사과를 하려면 얼굴을 마주 보고 해야지. 이렇게 추운 데서 어떻게 제대로 사과하겠어?"
그녀의 시선은 안세연이 앉아 있던 자리에 고정되었다.
소진우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회사 앞이야. 안 내릴 거야?"
사실, 안세연의 회사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조금 걸어야 했다. 예전에는 소진우가 항상 그녀를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안세연은 마치 반항할 줄 모르는 꼭두가시처럼 고래를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맹아연은 가방에서 소독 티슈를 꺼내어 좌석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마치 안세연이 그 자리를 더럽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소진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하는 짓이야?"
맹아연이 상처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내가 결벽증 있는 거 잊었어? 자기가 운전할 때는 조수석은 나만 앉게 해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운전할 때는 우리 둘만 뒷자리에 앉기로 했잖아. 그냥 자리 좀 닦으려고 한 건데,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거야? 왜 화를 내?"
맹아연은 억울한 모습을 연기하며 안세연을 향해 곁눈질했다. 그녀 눈 밑의 도발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안세연은 그녀와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맹아연이 좌석을 닦고 나서 소진우에게 바짝 붙어 앉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뒤돌아서서,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진우는 안세연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맹아연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딱지처럼 그에게 꼭 매달려 있는 것이다. "제발, 날 밀어내지 마. 나 더 잘할게. 그리고 이혼 얘기도 다시는 안 꺼낼게. 용서해줘. 내가 잘못했어."
슬픈 눈으로 맹아연은 소진우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소진우는 맹아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쥐고,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가 말만 잘 들으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어. 단, 소씨 사모님의 자리는 제외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