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임지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혼 합의서를 확인했다.

그녀가 신하린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 10년 동안, 그녀가 김도준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봤었다.

심지어 신하린이 김도준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1년 전, 둘이 결혼한 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임지연은 그 결혼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인 신하린이 오랜 소원을 이룬 셈이니

그녀는 진심을 담아 그녀가 행복하길 축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난 김도준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됐어."

임지연이 묻기도 전에 신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임지연을 쳐다보며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신하린의 미소에 임지연은 신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아버지의 사랑을 온몸에 받고 자랐던 재벌 가 아가씨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미소에 임지연은 마음이 놓였다.

"김도준은 내가 임신한 것도 몰라."

신하린이 이어서 말했다.

"숙려기간이 30일이야, 난 굳이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아. 김도준에겐 비밀로 할거야."

숙려 기간 동안 한쪽이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이혼 신청을 철회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여전히 부부로 지내야 했다.

임지연은 신하린이 김도준에게 마음이 완전히 식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 임지연은 간단한 검사를 진행한 뒤 다시 진료실에 돌아와 말했다.

"하린아, 네 수술은 며칠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아."

신하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수혈을 위한 혈액을 준비해야 해. 근데 너도 알다시피 넌 RH- 혈액형이잖아. 혈액을 신청했더니 그쪽에서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하더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신하린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희귀 혈액형인 그녀는 아버지의 혈액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혈액 이야기가 나온 탓에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아빠가 아직 살아계셨다면...'

"응, 알겠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신하린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임신 초기 유산 징조도 있으니 앞으로 며칠 동안 조심해야 할 거야."

임지연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이라, 임지연은 신하린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하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래? 오늘 제시간에 퇴근 할 수 있어. 이따가 같이 갈까?"

신하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 의자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아직 평평한 배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산 징조...

아기가 그녀의 결정을 알고 미리 떠나려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신하린은 보고서를 손에 쥐고 검사실로 향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은행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입금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새로 은행카드를 만들었다. 숙려기간 동안 재산을 따로 관리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부터 그녀의 모든 수입은 모두 그 카드에 찍힐 것이다.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작권료가 지급되었습니다. 해당 계좌로 입금되었으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하린은 김도준과 결혼하기 전, 익명의 작곡가로 조용히 활동하고 있었다.

음악은 그녀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부족함 없이 자란 그녀는 신씨 가문의 외동딸로 모든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문은 몰락해 버렸고 그 탓에 그녀는 어린 나이에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아빤 몰랐을 거야. 생전에 취미로 나한테 가르쳤던 음악으로 내가 돈을 벌고 있을 줄은...'

생각에 잠긴 채, 휴대폰 화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신하린이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작곡가님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에요. 지난 몇 년 동안 히트곡을 많이 썼는데, 이대로 은퇴할 생각은 아니시죠? 최근 저희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작곡가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자세한 내용은 메일에 보내둘게요. 이미 참가 신청은 해 두었어요.]

신하린이 메일을 열자 맨 위에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관한 기획서였다.

흔하게 TV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특별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창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휴대폰을 다시 거둬들이던 그때, 아랫배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또다시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오늘 만해도 벌써 두 번 째였다.

그 시각, 인터넷에는 핫이슈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미진 위암>

<플로리스트 한미진 시한부 판정>

<6개월 시한부 한미진>

가장 인기 있는 게시물은 한미진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기자의 내용이었다.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플로리스트 한미진 씨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 포털사이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고 전했습니다. 플로리스트 한미진은 남은 6개월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며 삶의 마지막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곧이어 영상에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한미진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뱉었다.

"앞으로 남은 6개월 동안 제가 느끼고 겪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여러분들에게 공유할 생각입니다. 팬들의 동정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시 화면에 나타난 기자가 물었다.

"한미진 씨와 김씨 그룹 대표 김도준 대표님과의 열애설은 이전부터 계속 끊이지 않고 올라왔었죠. 하지만 김도준 대표는 유부남이신인데, 한미진 씨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할지 의문입니다."

한미진은 기자의 물음을 예상이나 한 듯 싱긋 미소 지으며 다가와 앞에 멈춰 서더니 카메라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김도준 대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아요. 그는 정말 완벽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니까요. 그 사람을 사모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미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의 가정을 파탄 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기자만 남겨둔 채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피해 차에 올라탄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C국에서 데려온 엘리트 간병인이 그녀에게 물 한 잔을 건네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간병인의 안색을 눈치챈 한미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사도 내사람이야, 눈치 볼 필요 없어."

눈치를 살피던 간병인은 상체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한미진 씨, 검사 결과는 암이 아니라 위궤양입니다. 저희 쪽에서 진단서를 암으로 바꾸는 것 만으로도 이미 많은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터넷에서 위암이라고 밝힐 수 있습니까?"

한미진의 차갑게 비웃는 모습에 간병인을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 요양원도 의료 시설 중 하나잖아."

그녀의 태연하게 묻는 말에 간병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당신네 요양원은 환자의 병력 데이터를 독자적으로 관리하겠지."

간병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관리하는 내 병력 데이터엔 내가 위암말기라고 나와 있잖아? 반년 시한부 판정까지 더해져서 말이야."

간병인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미진은 싱긋 미소 지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모든 증거가 확실 한데 뭐가 문제야? 아무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미진 씨는 위암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혹시라도..."

"두가지 방법이 있어."

한미진은 간병인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첫 번째, 내가 당신들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다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가설. 아마 그건 사랑의 힘이겠죠? 두 번째, 당신들 요양원의 검사에 오류가 있었던 거지. 그건 사고였고 덩달아 난 그 동안 있지도 않은 암 치료를 받은 거지."

한미진은 위협 가득한 표정으로 간병인을 노려봤다.

"어느 방법이 더 나은 것 같아?"

간병인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한미진 씨,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미진 씨의 생각이 옳은 것 같아요."

한미진은 그런 간병인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한미진 씨,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간병인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먼저 말을 걸었다.

한미진은 휴대폰을 흘깃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A시 국립병원으로 가."

간병인은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어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진단서는 내버려 두고 진통제만 처방 받으면 되니까."

말하는 와중에 한미진은 분주하게 손가락을 놀리며 김도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도준에게서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알겠어.]

같은 시각, 병원 화장실. 신하린은 점점 거세지는 아랫배의 통증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손에 들린 티슈에는 피가 흥건했다.

유산 징조가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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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너를 포기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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