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간효영은 순간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진승율은 왜 아직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은 걸까?

혹시 마음을 바꾼 걸까? 설마 이혼을 원치 않는다는 뜻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간효영은 힘껏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승율은 언제나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제 간시은이 회복 중이고 결혼도 가능한 나이가 되었으니, 그가 이혼을 미룰 이유는 없었다. 아직 도장을 찍지 않은 것도, 아무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법원에서 보자." 간효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간효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멍하니 어두운 밤하늘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그녀는 지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일어섰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가볍게 화장을 했다.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고 싶었다. 비록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법원에 도착한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진승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진승율은 나타나지 않았다.

간효영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진승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해서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간효영은 법원에서 나와 진씨 그룹으로 향했다. 리셉션 직원이 제지했지만, 막무가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곧장 진승율의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진승율이 소파에 앉아 있는 간효영을 보고 창백한 얼굴에는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그는 간효영의 등장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마치 그녀가 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진승율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로 걸어가 앉아,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훑어보았다.

"30분 정도 됐어."

"그럼 좀 더 기다려."

진승율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효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간효영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간효영은 진승율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법원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 또 사무실에서 더 기다리라고!

진승율에게 그녀는 그렇게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것일까? 서류 몇 장보다도 더 못한 그런 하찮은 존재였던 걸까?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진승율?" 간효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좀 더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 순간, 간효영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는 못 기다려! 오늘 당장 이혼 절차 마무리하자."

"안 돼."

그 말에 간효영은 얼어붙었다. 그의 말이 뇌리를 강타하자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승율은 그녀의 반응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서류를 마저 정리한 그는 책상 서랍에서 이혼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간효영의 눈 앞에서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넌 아직 내 아내야. 네가 원하던 건 이게 아니야? 너, 나 사랑하잖아. 내 아내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애썼던 거 아니야? 좋아, 내 아내 자리에는 네가 있어야 해. 어느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을 거야." 진승율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간효영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이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간시은도 회복 중이었다. 진승율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는 지난 2년 동안 그녀를 밀어내기만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걸까?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이혼하자고 한 건 당신이잖아." 간효영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했다. "시은이한테 돌아가.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제발, 날 놔 줘."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간효영은 지금,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모두를 위해 전부 내려놓고 물러나기로 한 것이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럴 준비가 되었다.

"널 놔달라고?" 진승율의 입꼬리가 비웃는 듯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간효영의 마음은 더 답답해졌다. "갑자기 왜 이혼을 안 하겠다는 건데?"

"시은이가 그러길 바라니까."

"뭐?" 간효영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시은이가 원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란대."

간효영은 분노가 치솟았다. "행복하게 잘 지내?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그냥 잘 살길 바란대. 그게 시은이 소원이라더라."

진승율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차가운 미소는 곧 사라졌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진승율의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두 여자 사이에서 양보하느니, 돌려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결정은 오로지 그 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은 없었다.

간효영은 진승율을 이해하려 애썼다. 단지 간시은과의 약속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모든 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어떤데? 시은이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녀의 질문이 진승율의 신경을 건드렸다.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그가 차갑게 말했다. "가서 짐 싸."

간효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단 한 달 전만 해도 그녀를 매몰차게 쫓아냈던 진승율이?

"당신..."

간효영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왜 아직도 그러고 서 있어? 빨리 가."

간효영은 그의 강렬한 분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았다.

진승율은 몸을 돌려 통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창 밖을 내려다보며 길게 연기를 뿜었다. 담배 연기가 진승율의 주위에서 천천히 피어 오르며 그를 감쌌다.

그가 담배를 다 피우고 뒤돌아 섰을 때, 간효영은 이미 가고 없었다.

탁자 위에는 반쯤 마시고 식어버린 커피와 갈기갈기 찢긴 이혼 서류만이 남아 있었다.

진승율은 2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둘의 결혼 생활이 끝나는 순간만을.

이혼 서류는 이미 그의 비서가 몇 달 전에 준비해 두었었고, 마지막으로 도장만 찍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혼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모든 관계가 정리되고 홀가분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간효영이 정말로 도장을 찍고 떠나자,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불안한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두 사람이 계속 함께 하길 바라는 간시은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이제 진승율은 본인도 왜 그러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간효영은 목적 없이 무작정 걷기만 했고 찬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아무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한제 병원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몇 번이나 이곳에 왔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간시은을 보고 싶은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까지 왔지만 또 문턱에서 멈춰 섰다. 병원 입구 앞에 서서 한참을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익숙한 통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시은의 병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간효영은, 늘 하던 대로 병실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간시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간시은은 한결 나아 보였다. 밥을 먹을 때도 전보다 훨씬 활기차 보였고,

간병인이 그녀의 얼굴과 손을 부드럽게 닦아준 후에는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박미주가 서 있었다. 간시은에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쉬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효영 언니가 나온 드라마예요." 간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끝까지 보고 싶어요."

박미주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또 간효영이니? 너를 보러 오지도 않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챙겨 봐?"

"언니는 배우라 바쁘잖아요. 내가 이해해야죠. 퇴원하면 언니 보러 갈 거예요. 촬영장에도 가서 언니가 연기하는 거 구경하고 싶어요." 간시은이 신이 난 듯 얘기했다.

그러자 박미주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절대 안 돼. 누굴 보러 간다고 그래?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인 애를 좋아하고 그러니? 간효영은 너한테 신경도 안 써. 심지어 네 남자도 빼앗았잖아. 이제 그런 애는 잊어버려. 퇴원하면 넌 바로 진승율과 결혼할 거니까."

간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승율 오빠랑 결혼 안 해요. 이미 효영 언니의 남자잖아요."

"둘이 곧 이혼할 거야. 벌써 2년이나 지났잖아." 박미주가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였다.

"알아요." 간시은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승율 오빠가 그 얘기를 아직 꺼내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이제는 이혼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박미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넌 왜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해? 진승율이 그 얘기를 안 꺼내면, 네가 먼저 말해야지! 승율이는 너를 사랑해. 효영이가 아니라, 너를!"

간시은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무겁고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나 아직 다 나은 거 아니에요.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요. 병이 재발하면 이제는 이식을 버텨낼 체력이 없을 수도 있다고, 그때는 항암 치료밖에 방법이 없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엄마, 사실 나 너무 무서워요."

박미주의 분노가 잠깐 누그러졌다. 얼굴에는 두려움과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한 거지. 그런 '만약' 때문에 희망을 잃으면 안 돼." "희망을 잃은 게 아니에요."

간시은이 떨리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만약 승율 오빠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오빠를 언니한테서 떼어놓고 싶지 않아요. 그 누구에게도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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