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권한별의 말에 겁이라도 먹은 걸까, 한참이 지나도 정나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권한별이 또다시 과감하게 비난하려던 찰나, 박우빈이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 들더니 강하게 입을 맞추며 침대에 눕히는 것이다.
박우빈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정사를 약속한 그는 권한별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할 때까지 밤새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쓰러지듯이 잠든 그녀는 눈을 뜨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박우빈이 새벽쯤에 침실을 나서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땐 이미 다음날이었다. 신혼방에서 깨어난 그녀가 잠깐 멍을 때리는 것 같더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커튼 때문에 새벽인지 아침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전날 밤의 희열로 몸 곳곳이 뻐근한 것을 느낀 그녀가 팔을 뻗어 휴대폰을 더듬었다. 인스타그램을 열자 정나래가 새로운 게시물을 업로드 한 것이다. 남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지만, 권한별은 그 남자가 박우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낀 그녀가 휴대폰을 벽에 세게 내던졌다.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은 액정조차 깨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빌어먹을.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에, 바람둥이 남편까지. 아주 끼리끼리네."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은 그녀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옆으로 던지며 자리에 선 그녀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남자가 애인 집까지 찾아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용서할 수 없었다.
정나래는 그녀에게 도발하기 위해 사진을 업로드 한 것이 틀림없다.
그때, 고용인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도련님의 지시로 해장국을 끓여 놨어요."
아직 화를 억누르지 못한 권한별은 박우빈이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용인에게 해장국을 끓이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마음속에서 피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해장국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문 하나를 사이 두고 선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사모님을 위해 약도 준비해 두었어요. 내려와서 약이라도 드시겠어요?"
고개를 갸웃한 권한별이 문을 살짝 열고 물었다. "무슨 약이죠?"
"저, 피임약인 것 같았어요..." 권한별의 눈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아주머니가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박우빈이 직접 피임약을 준비했다는 말에 권한별은 마지막 남은 이성이 끊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참으면 그녀는 호구로 몰릴 것이다.
아직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던 권한별은 지난 3년 동안, 박우빈의 의지와 상관없이 꾸준히 피임약을 복용했었다.
그건 그거고. 박우빈이 이렇게 피임을 강요한 것은 또 다른 문제지.
"싫어요. 아이를 임신하면 낳아야죠. 쌍둥이든, 세 쌍둥이든 낳아서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예요!" 권한별은 거의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문을 쾅 하고 닫는 소리가 저택에 크게 울려 퍼졌다.
고용인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확인한 그녀는 서랍을 뒤지며 이전에 사둔 피임약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이는 반드시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태어나야 한다.
다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운 그녀는 한참이나 뒤척거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박우빈과 정나래를 저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나래와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박우빈이 갑작스럽게 부대에서 나올 일도 없을 텐데, 정나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권한별의 추측은 근거 없는 의심이 아니었다. 박우빈이 급하게 휴가를 신청한 것은 정나래와 관련된 일이 맞았다.
부대를 나서자마자 권한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권한별이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아 조사한 결과, 그녀가 무명 배우 두 명과 술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과 함께 술집을 찾아 나선 것이다. 권한별을 잡아 혼을 내준 후 다시 정나래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권한별이 침대에 편하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 박우빈은 정나래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가벼운 빈혈 증상 외에 모두 정상이네요. 이분은 남편인가요?"
의사의 질문에 정나래는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박우빈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선생님, 앞으로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던가 먹지 말아야 할 음식 같은 건 없나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은 그는 정나래의 체면을 최대한 봐주려는 듯했다.
"갑각류는 최대한 피하는 게 좋고, 과식은 금물이에요. 입덧하는 중이니, 최대한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해 주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우빈은 작게 안도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산부인과를 나선 두 사람은 나란히 병원 밖으로 나왔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는 정나래의 얼굴에는 곧 엄마가 된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피어 올랐다.
박우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래야."
"오빠, 아기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정나래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며 박우빈은 차마 말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나래야, 아이 지우자."
"싫어요!" 정나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가 애원하듯이 간청했다. "오빠, 나 이 아이 낳고 싶어요. 제발 낳게 해줘요. 아이 낳고 저 혼자 잘 키울 수 있어요..."
"내 허락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권한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나래의 가녀린 목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병원 로비 모퉁이에 기대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권한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박우빈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정나래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