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어둠이 거대한 장막처럼 경성 전체를 뒤덮었고, 구름을 뚫고 비치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좁은 골목에 내려앉았다.

한 손에 구급상자를 쥔 심윤희가 골목길에 있는 집 대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골목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심윤희는 검은 그림자가 건장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털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진 것이다.

심윤희는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며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 남자는...' 쓰러진 남자는 경성 제일 가문이라 불리는 지씨 가문의 상속자 지한성이었다.

찰나의 순간, 심윤희는 이 도련님의 목숨값에 대한 계산을 끝냈다. 쓸데없는 참견이 가끔은 좋은 결과와 함께 찾아올 때도 있으니.

천천히 허리를 굽힌 심윤희가 지한성의 인중에 검지를 대자 따뜻한 숨결이 손끝에 닿았다.

숨을 고르게 쉬는 걸 보니 살아 있네. 그렇다면 희망은 아직 존재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심윤희는 곧바로 지한성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축했다.

어두운 골목을 거의 지날 때쯤, 갑자기 자리에 멈춘 심윤희가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더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은 검은색 대문을 열었다.

이곳은 그녀가 경성에 마련한 비밀 진료실 중 하나였다.

심윤희는 곧바로 지한성을 부축해 수술대로 옮겼다.

피로 흠뻑 젖은 외투를 벗고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가 수술 도구를 소독하더니 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탁!" 잠시 후, 피 묻은 총알이 금속 쟁반에 부딪히면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수술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심윤희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술 상처를 빠르게 꿰맨 뒤, 다른 상처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굉음과 함께 커다란 문이 힘없이 활짝 열리더니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녀의 진료실로 들이닥치는 것이다!

일부 경호원들은 수술대 위에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 지한성을 포위했고, 나머지 경호원은 진료실을 통제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선두에 선 경호원의 차가운 총기가 심윤희의 관자놀이를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우리 대표님을 납치한 목적이 뭐야?"

긴장 가득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심윤희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때,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지한성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리는 것이다.

아마 곧 의식을 되찾겠지. 그렇다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경찰과 조폭을 한 번에 주름잡는 거물 지한성이 설마 자기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배신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겠지?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더불어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당장에 찢어질 것 같은 가슴 통증에 지한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풀어줘." 지한성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압도감이 충분했다.

"다들 나가..."

남자의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가 권위로 가득 찼고 경호원들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움직여 수술실을 나섰다. 이제 심윤희와 지한성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심윤희는 그 틈에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더니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한성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다.

"날 구한 사람이 당신이에요?" 눈살을 깊게 찌푸린 지한성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심윤희를 쳐다봤다.

"네." 심윤희는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다.

지한성은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 "날 구해준 대가로 부탁 하나 들어줄게요. 갖고 싶은 게 있어요?"

심윤희는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깊은 고민에 잠긴 표정을 해 보였다.

"생각나면 연락할게요."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계산기를 백 번이나 두드린 셈이다.

경성에서 지한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자비 없는 수단은 온 경성에 소문날 정도로 잔인하고 매서웠다.

현재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한 심윤희는 지한성과의 인연은 붙잡아 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요." 말을 마친 지한성은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지한성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심윤희의 입 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이런 귀인을 구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이번 기회에 심윤희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회차 2

빠르게 달리는 차 뒷자리에 앉은 지한성은 방금 건네 받은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목숨을 구한 여자의 이름은 심윤희.

심씨 가문도 한때 경성에서 꽤 잘나가는 재벌 가문이었다.

심윤희의 조부모인 심창국과 이선홍도 의료 분야에서 손꼽히는 거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아들인 심명덕이 심씨 가문을 물려받았고, 머지않아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원도나와 결혼하고 심윤희를 낳았다.

그러나 심윤희가 한 살이 되던 해, 심씨 가문은 큰 변고를 맞았다.

갑자기 심각한 정신적 질병에 걸린 원도나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남은 시간 모두를 요양원에 갇혀 지내게 된 것이다.

같은 해, 심명덕은 원도나와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 양운청을 맞이했다.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됐지만 양운청은 딸 심청연을 낳고, 이듬해에는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결국, 심씨 가문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 심윤희는 더욱 힘든 생활을 지내왔다.

힘든 생활이라...

서류를 아무렇게나 옆에 놓은 지한성이 상처 부위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통증은 이미 마비되어 저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대표님,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비서 정문탁이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한성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가 기습을 당했다는 소식이 이미 지씨 가문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씨 가문에도 큰 혼란이 일겠지.

다음 날 오후, 검은색 옷으로 무장하고 마스크와 모자까지 푹 눌러쓴 심윤희가 다시 골목에 나타났다.

어젯밤에 치료했던 환자가 의식을 되찾았으니 치료비를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골목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심윤희가 갑자기 자리에 걸음을 멈춰 섰다.

오늘따라 골목길이 더 조용한 것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떠나려고 할 때, 골목 입구에서부터 일찌감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길을 막혔다.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심윤희의 아버지 심명덕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빠르게 나타나 그녀를 에워싸자 심명덕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몇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여기가 집보다 지내기 편해?"

"아니요. 이 허름한 곳이 어떻게 아버지 집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심윤희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반박했다.

단지 그곳은 그녀의 집이 아닐 뿐.

"잘 됐구나. 그럼 이제 집에 가야지."

심명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윤희의 곁에 선 경호원이 그녀를 강제로 차에 태웠다.

그 시각, 모퉁이에 몸을 숨긴 누군가가 주의 깊게 그들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심명덕과 그의 경호원들이 떠난 후, 모퉁이에 숨은 사람은 빠르게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메시지를 확인한 정문탁은 곧바로 지한성에게 보고했다.

"대표님, 저희도 조치를 취할까요?"

정문탁의 목소리가 조금은 걱정스럽게 내려앉았다. 심명덕과 그의 경호원이 좋은 의도로 심윤희를 데려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한성은 그저 담담하게 답했다. "조금 더 지켜봐."

"알겠습니다." 정문탁은 빠르게 대답하며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심씨 저택에 돌아온 심윤희는 사당에 버려지듯이 내팽개쳐졌다.

"무릎 꿇어!" 심명덕은 무자비하게 그녀에게 무릎을 꿇도록 지시했다.

차가운 바닥에 강제로 무릎을 꿇은 심윤희의 마스크와 모자가 바닥에 떨어지자 반항적인 눈빛이 그대로 드러났다.

심명덕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추궁하듯이 물었다. "너 나 몰래 병원 놀이라도 시작한 거야?"

"그런 적 없어요." 심윤희는 단호한 태도로 심명덕의 말을 반박했다.

"짝!" 채찍이 살점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고, 심윤희를 제외한 심씨 자녀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정작 채찍을 맞은 당사자인 심윤희는 그저 담담한 얼굴에 입술을 꼭 깨물고 신음 한 번 내지 않는 것이다.

"고작 너 따위가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또다시 채찍을 휘두른 심명덕이 차갑게 호통쳤다.

"네가 나 몰래 의학 공부를 한 것도 모자라 환자까지 치료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어. 심윤희, 아직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거야?"

심윤희의 안색이 이미 하얗게 질렸지만, 목소리와 태도는 더욱 단호했다. "왜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인정해야 하나요?"

"그래? 그럼 내가 거짓 정보를 입수했다는 거야?"

심명덕은 다시 채찍을 휘두르자 심윤희는 소매 밑으로 주먹을 더욱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어디서 소식을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의학을 공부한 적도 환자를 치료해 준 적도 없어요.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소식을 입수한 사람을 이곳에 불러 삼자대면을 하면 되겠네요."

회차 3

당장이라도 삼자대면을 하겠다는 심윤희의 확고한 태도에 심명덕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아주 잠깐이나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심명덕의 아내 양운청이 그의 곁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다. "여보, 그래도 윤희는 당신 딸인데 어떻게 손찌검까지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당신 몰래 의술을 배웠어도 엄마 능력을 물려받는 것밖에 되지 않잖아요. 도나 언니가 갑자기 발병하지 않고 수술대에서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명의로 소문이 자자했을 텐데 말이죠."

양운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말을 들은 심명덕은 더욱 바득바득 이를 갈더니 손을 번쩍 치켜들어 심윤희를 향해 채찍을 날렸다. "아직도 거짓말을 할 셈이야!"

채찍이 내리찍는 고통에 심윤희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윤희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반항적인 눈빛으로 양운청을 쏘아봤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엄마를 입에 올려? 우리 엄마는 전 세계에서 인정한 명의였어. 그랬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발병했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

심윤희는 명망 높고 건강했던 엄마가 왜 갑자기 병이 발작했는지 알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심명덕과 양운청이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난 후부터 갑자기 병을 앓은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그녀의 어머니를 들먹일 수 있을까?

심윤희의 두 눈 가득 담긴 증오에 심명덕은 몸이 흠칫 떨리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갑자기 벌컥 열린 문 뒤로 나타난 원도나가 침대 위에 벌거벗고 있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장면 말이다.

당시의 원도나는 조금의 이성도 잃지 않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역겨움이 가득 담겨 있는 시선.

그 눈빛을 심명덕은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원도나는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고귀했으며 심명덕은 그녀의 옆에 설 때마다 주눅이 드는 것 같은 위축감을 느꼈다.

연회나 세미나에 참석할 때도 사람들은 그를 원도나 박사님의 남편이라고 칭할 뿐이다.

심명덕은 그런 기분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그날 밤은 원도나와 결혼한 이래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드디어 원도나를 그의 발 아래에 짓밟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 밤은 그의 인생에 있어 최대로 수치스러운 날이기도 했다. 원도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광대 취급하며 웃음거리로 여겼다.

심윤희의 조롱 섞인 말투와 반항적인 눈빛에 심명덕은 원도나에게서 자주 느꼈던 열등감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자비감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되었고, 손에 든 채찍에 힘을 주더니 있는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누가 너에게 이런 말을 가르친 거야!" 심명덕의 목소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찼다. 그가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심윤희는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당에는 심윤희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어요. 아직 벌을 내릴 시기가 오지 않았을 뿐이죠."

"이 불효녀 같으니!" 분노에 눈이 먼 심명덕이 더욱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러댔다.

조용한 사당에 채찍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만 크게 울릴 뿐이다.

심윤희의 동생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심윤희를 쌀쌀맞은 눈빛으로 가만히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은근히 기뻐하기도 했다. 차라리 심윤희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채찍을 얼마나 세게 내리쳤던지 심명덕은 더 이상 채찍을 휘두를 맥조차 남지 않았다.

심윤희는 차가운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양운청은 그제야 심명덕의 팔을 잡고 아양을 떨며 설득하려는 것이다. "여보,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난 거예요? 윤희는 아직 철이 덜 들어 말투가 무뚝뚝해서 그런 거예요. 어쩌면 엄마를 닮고 싶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 몰래 의학을 공부했을 수도 있죠."

엄마를 닮고 싶다는 그 말 한마디에 심명덕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원도나는 그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심마였다. 그런 원도나의 눈빛을 빼다 박은 것 같은 딸이 있으니, 그의 과거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시시각각 알려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네가 그렇게 실력이 좋고 환자까지 구할 수 있는데 의사를 집에 부를 필요도 없겠어. 몸에 난 상처는 네가 직접 치료하면 되겠네." 심명덕은 잔뜩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지금 전체 스토리 읽기
작가를 후원하고 Moboreader의 다음 이야기를 응원해 주세요!
모든 회차 잠금 해제

잔혹한 남자를 이기는 법

1화
회차
사용자 설정
다음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