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차태오는 그날 밤, 결국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다.

펜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은 만년필의 뚜껑도 열려 있었다. 서류 맨 아래, 한서윤의 이름 옆 빈칸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차태오.

석 자만 쓰면 끝나는 일이었다.

3년 전에도 그랬다. 결혼 서류에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결혼이란 사업상 필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한서윤은 그 결정의 조용한 상대였다.

말수가 적고, 선을 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여자. 공식 석상에서 웃어야 할 때 웃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그의 곁에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

태오는 그런 서윤이 편했다.

편하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는 그때 몰랐다.

펜촉이 종이 위에 닿았다.

차.

거기서 멈췄다.

태오는 한참 동안 미완성된 성씨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잉크가 종이 섬유 사이로 아주 조금 번졌다. 마치 지워지지 않을 흠처럼.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서명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넓은 집 안에 길게 울렸다.

그는 습관처럼 주방 쪽으로 걸었다.

컵장 두 번째 칸. 서윤이 늘 찻잔을 두던 자리였다. 손잡이가 얇은 흰 도자기 잔. 그녀는 그 잔을 태오의 것이라고 했다.

태오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잔은 당신이 쓰세요.”

“굳이 정할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으면, 제가 정할게요.”

그때 서윤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아주 부드럽게 접히는 웃음이었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날도 차를 반쯤 남겼다.

그 잔은 없었다.

컵장 안은 정리되어 있었다. 지나칠 만큼 말끔하게.

태오는 문을 닫지 못했다.

그는 주방 상판을 짚었다. 손끝에 차가운 대리석 감촉이 닿았다. 새벽마다 불이 켜져 있던 주방. 아무 말 없이 데워져 있던 국. 그가 손대지 않아도 다음 날이면 사라져 있던 찻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있었다.

그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강유라였다.

태오는 받지 않았다.

벨소리는 집요했다. 한 번 끊기고, 곧 다시 울렸다. 화면 위의 이름이 검게 빛났다.

그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빈집은 소리를 냈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 빗물이 창문을 치는 소리, 어딘가에서 작게 울리는 배관 소리.

그리고 없는 사람의 기척.

태오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서윤이 쓰던 쪽은 텅 비어 있었다. 옷걸이 몇 개만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향수 냄새도 거의 사라졌다. 다만 한쪽 선반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태오는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낡은 커프스 단추 하나가 들어 있었다.

검은 자개가 박힌 단추. 그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다 없어진 줄 알았던 물건이었다.

왜 이게 여기에 있지.

상자 밑에는 작은 메모지가 깔려 있었다.

태오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왼쪽 단추가 조금 헐거워요. 다음에 수선 맡길 때 같이 보내야겠다.

서윤의 글씨였다.

단정하고 작았다.

그는 메모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기억이 느리게 되살아났다.

결혼식 다음 날 아침.

태오는 새벽 회의가 있었다. 웨딩 촬영도, 피로연도, 형식적인 인사도 끝난 뒤였다. 모두가 피곤해하던 아침,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셔츠를 입었다.

그때 서윤이 조용히 다가왔다.

“잠깐만요.”

그녀는 그의 소매 끝을 잡고 커프스 단추를 만졌다. 손끝이 아주 차가웠다. 태오는 그 온도만 기억했다.

“단추가 빠질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빠지면 잃어버려요.”

“그 정도 물건은 다시 사면 됩니다.”

그 말에 서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단추를 풀어 가져갔다.

태오는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버리지 않았다.

3년 동안,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었다.

태오는 메모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그는 곧 손을 풀었다.

구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관 벨이 울린 것은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태오는 미간을 좁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인터폰 화면에 서 있는 사람은 강유라였다. 검은 코트 차림에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불쾌함이 먼저 떠 있었다.

태오는 문을 열지 않았다.

통화 버튼만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문도 안 열어 줄 거예요?”

“용건부터 말하십시오.”

“태오 씨답지 않네요. 방금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늦었습니다.”

“그래서 왔어요.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는 화면 속에서 작게 웃었다.

“한서윤 씨 나갔다면서요.”

태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말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이제 계약이 끝났다는 거죠.”

그녀는 우산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우리 쪽도 움직여야 해요. 이사회 전에 약혼 기사 내보내는 게 낫겠어요. 어차피 한서윤 씨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태오의 손이 인터폰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말조심해.”

짧고 낮은 말이었다.

강유라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한서윤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

화면 속 정적이 길어졌다.

강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태오 자신도, 방금 제 입에서 나온 말을 한 박자 늦게 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서윤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강유라가 천천히 웃었다.

“이상하네요.”

“돌아가십시오.”

“진짜 이혼할 거잖아요.”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설마 이제 와서 아깝기라도 해요? 차태오 씨가?”

그 말은 정확했다.

아깝다.

잃기 싫다.

내 것이었으니 다시 돌려놓고 싶다.

그런 감정이라면 설명이 쉬웠다. 태오가 잘 아는 방식이었다. 소유, 통제, 회수, 정리. 그는 언제나 그런 단어들로 세상을 다뤘다.

하지만 서윤은 물건이 아니었다.

계약서의 조항도, 가문의 장식도, 그의 곁에 놓아둘 수 있는 조용한 그림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떠난 사람은, 다시 부른다고 돌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태오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니.”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늦은 것 같습니다.”

강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요?”

태오는 인터폰 화면 속 자신의 흐릿한 얼굴을 보았다. 피로한 눈, 헝클어진 머리, 목까지 풀린 셔츠. 완벽과는 거리가 먼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너무 늦은 것 같다고.”

그는 통화를 끊었다.

벨이 다시 울리지 않았다.

태오는 현관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문 너머에 사람이 떠나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서윤은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작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스튜디오 근처에 급하게 구한 집이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작은 주방. 태오의 집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좁았지만,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놓였다.

비에 젖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상자들은 아직 풀지 못했다. 작은 공간에 쌓인 짐들이 서윤의 지난 3년을 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옷 몇 벌, 책, 작업 도구, 낡은 사진첩, 찻잔 두 개.

그녀는 그중 하나를 꺼냈다.

흰 도자기 잔.

태오가 한 번도 제대로 비우지 않았던 그 잔과 같은 세트였다. 원래는 두 개였다. 하나는 두고 왔고, 하나는 가져왔다.

서윤은 그 잔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다 손을 멈췄다.

버리는 것도 아직은 감정이 필요했다. 미워하는 일에도 힘이 든다는 걸, 서윤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녀는 대신 주전자를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메시지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서윤은 휴대폰을 엎어 두고 창가로 갔다. 오피스텔 창밖으로 새벽 도로가 보였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이 길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있던 자리는 하얗게 남아 있었다. 얇은 자국. 아주 오래 묶여 있다가 풀린 실처럼.

서윤은 그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이 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주전자가 울었다.

서윤은 차를 우렸다. 이번에는 태오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손끝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식탁이라 부르기에도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계약 종료 후 해야 할 일들을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확장 계약 최종 확인.

변호사에게 이혼 서류 발송.

주소 이전.

새 명함 디자인.

태오 씨 물건 정리.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태오 씨.

서윤은 그 글자를 가만히 보다가, 두 줄로 지웠다.

그리고 다시 적었다.

차태오 관련 물건 정리.

이름 하나 바꾸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서윤은 작게 웃었다.

웃음 끝이 젖어 있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서윤의 손이 멈췄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초인종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한서윤 씨 맞으십니까?”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태경그룹 법무팀입니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상대는 짧게 숨을 골랐다.

“차태오 본부장님 지시로 연락드렸습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벌써 시작이구나.

그가 서류 처리를 서두르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변호사를 통해 조건을 조정하자는 연락일 수도 있었다. 역시 그다운 방식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절차. 대화가 아니라 통보.

서윤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말씀하세요.”

상대가 말했다.

“이혼 서류 접수는 보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서윤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았다.

“무슨 뜻이죠?”

“본부장님께서 직접 만나 이야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피곤하고 창백했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전 할 말 다 했습니다.”

“본부장님께서는...”

서윤은 조용히 말을 끊었다.

“그분께 전해주세요.”

차가운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 안에서 조금씩 식어 갔다.

“이번엔 제가 보류하지 않는다고요.”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낮고 익숙한 목소리.

“한서윤.”

서윤의 호흡이 멎었다.

법무팀 직원의 전화가 아니었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아니, 듣고 있었다.

태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갈라졌다.

“한 번만 만나.”

서윤은 눈을 감았다.

예전의 그녀라면 그 한마디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부탁처럼 말했으니까. 명령이 아니라, 통보가 아니라, 어쩌면 처음으로.

그러나 서윤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테이블에 닿으며 낮은 소리를 냈다.

“싫어요.”

침묵.

그 짧은 한마디가, 3년 동안의 어떤 말보다 길게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태오가 아주 낮게 숨을 들이켰다.

“서윤아.”

처음이었다.

그가 그녀를 그렇게 부른 건.

서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다. 작은 방 안에는 비 내리는 소리와, 아직 식지 않은 차 향만 남았다.

서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대신 수첩을 다시 펼쳤다.

방금 지운 이름 아래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돌아가지 않는다.

펜 끝이 종이를 꾹 눌렀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차태오.

내일 오전 10시. 네 스튜디오로 가겠다.

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오지 마세요.

몇 초 뒤,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겠습니다.

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 새벽의 빗줄기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알았다.

진짜 폭풍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회차 3

서윤은 오전 아홉 시에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밤새 비가 내린 골목은 아직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앞 작은 화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간판 아래로 희미한 햇빛이 번졌다.

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

서윤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창백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입술에도 옅은 색을 올렸다.

괜찮아 보이는 얼굴.

그거면 됐다.

딸랑.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새벽 시장에서 들여온 꽃들이 놓여 있었다. 흰 라넌큘러스, 연분홍 작약, 짙은 녹색 유칼립투스.

서윤은 코트를 벗고 앞치마를 둘렀다.

가위를 소독하고,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자르고, 물통을 채웠다. 손끝이 차가운 물에 젖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손을 움직이는 일은 좋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카운터 아래 서랍에 넣어 둔 휴대폰은 조용했다. 새벽에 마지막으로 본 메시지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내일 오전 10시. 네 스튜디오로 가겠다.

서윤은 장미 줄기를 자르던 손을 멈췄다.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오겠다고 했다.

늘 그랬다. 차태오는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향해 직선으로 걸어가고, 상대가 물러서지 않으면 그것을 장애물로 여기는 남자.

서윤은 그런 태오의 방식 안에서 3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나오기로 했다.

오전 아홉 시 사십오 분.

첫 손님이 들어왔다.

“예약한 부케 찾으러 왔어요.”

서윤은 미소를 지었다.

“네, 준비해 뒀어요.”

그녀는 냉장고에서 작은 웨딩 부케를 꺼냈다. 흰 장미와 스위트피, 은은한 안개꽃을 섞은 부케였다. 손님은 부케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너무 예뻐요. 진짜 제가 원하던 느낌이에요.”

“다행이에요.”

“대표님은 결혼하셨어요?”

리본 끝을 정리하던 서윤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왼손 약지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반지가 있던 자국은 아직 희게 남아 있었다.

“했었어요.”

손님은 당황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서윤은 먼저 웃었다.

“오늘 예식이죠? 비 그쳐서 다행이에요.”

“아, 네. 맞아요.”

손님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부케를 품에 안았다. 유리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행복하세요.”

서윤이 말했다.

손님은 돌아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문이 닫혔다.

서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행복하세요.

남에게는 너무 쉽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허락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때 카운터 아래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서윤은 천천히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오전 아홉 시 오십팔 분.

메시지는 한 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손끝이 식었다.

딸랑.

정확히 열 시에 문이 열렸다.

차태오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짙은 회색 수트, 비에 살짝 젖은 구두 끝. 늘 그렇듯 빈틈없이 단정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보니 달랐다.

눈 밑이 조금 어두웠다. 넥타이 매듭은 평소보다 느슨했고, 손에는 검은 장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선이 곧장 서윤의 왼손에 닿았다.

반지가 없는 손.

그의 눈동자가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

서윤은 작업대 위의 가위를 내려놓았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태오는 젖은 우산을 문 옆에 세웠다.

“이야기하러 왔습니다.”

“전 할 이야기 없어요.”

“나는 있습니다.”

서윤은 짧게 웃었다.

“늘 그렇죠.”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뭐가 말입니까.”

“차태오 씨가 할 말이 있으면, 상대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스튜디오 안에는 꽃 향이 가득했다. 축축한 흙냄새, 잘린 줄기에서 나는 풋내, 막 피어난 작약의 달큰한 향.

이 공간은 태오의 집과 전혀 달랐다.

넓지도, 비싸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긴 서윤의 공간이었다.

그 사실이 태오를 낯설게 만들었다.

“서류 접수는 보류했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서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건 차태오 씨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아직 내 서명이 없습니다.”

“서명하세요.”

짧은 말이었다.

태오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왜 그렇게까지 이혼하려 합니까.”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이 우스웠다.

왜.

3년을 함께 살고도, 그는 아직 왜냐고 물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게 지겨워졌어요.”

태오의 눈이 흔들렸다.

서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늦게 돌아오는 밤마다 차를 우렸어요. 마시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언젠가는 한 번쯤 알아줄 줄 알았으니까.”

그녀는 작업대 위에 놓인 흰 리본을 손끝으로 밀었다.

“행사장에서 당신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웃었어요. 사람들이 묻는 말에 대답했고, 당신 가족이 저를 계약상의 아내처럼 대할 때도 아무 말 안 했어요.”

태오의 손이 천천히 주먹이 되었다.

“서윤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름 하나 다정하게 부르는 일도 3년이나 걸린 사람이잖아요.”

태오는 숨을 삼켰다.

반박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 창밖으로 비가 그친 뒤의 흐린 빛이 들어왔다. 유리잔과 꽃병 위에 희미하게 번졌다.

서윤은 작약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꽃잎 끝이 조금 무른 꽃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안쪽부터 상하기 시작한 꽃.

그녀는 그 꽃을 따로 빼 놓았다.

“우리 관계도 이랬어요.”

태오의 시선이 꽃에 닿았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죠. 남들이 보기엔 완벽했을 거예요. 재벌가 아들과 조용한 아내. 공식 석상에서 웃는 부부. 문제없는 계약.”

서윤은 꽃을 버리는 통에 내려놓았다.

“근데 안쪽은 이미 다 무르고 있었어요.”

태오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몰랐습니다.”

“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문제예요.”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아주 크게는 아니었다. 차태오다운 방식으로, 입술 끝이 조금 내려가고 시선이 잠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서윤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조차 무너짐이었다.

“다시 기회를 주면...”

“싫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윤이 잘랐다.

태오의 눈이 그녀에게 박혔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알아요.”

서윤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대답은 같아요.”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는 듯했다. 어젯밤처럼.

그러나 이번에도 멈췄다.

손끝이 허공에서 굳었다.

서윤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잘하네요.”

태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뭘 말입니까.”

“안 잡는 거요.”

그 말에 태오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잡지 않겠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하지만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윤은 피곤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도 부담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이었다.

태오가 그녀에게 방법을 물은 것은.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늘 답을 가지고 있던 남자. 남들에게 지시하고, 선택하고, 정리하던 남자.

그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래서 더 단단해져야 했다.

“서명하세요.”

“그건 못 합니다.”

“그럼 변호사 통해서 진행할게요.”

“한서윤.”

“그리고.”

서윤은 그의 말을 끊었다.

“제 스튜디오에는 다시 오지 마세요. 업무 외의 일로는요.”

태오의 시선이 바뀌었다.

“업무?”

서윤은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운터 한쪽에 놓인 서류 봉투.

스튜디오 확장 계약서였다. 태경그룹이 운영하는 프리미엄 웨딩홀 입점 제안서. 서윤이 몇 달 동안 준비한 가장 큰 기회.

하필 태경 계열사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뒤늦게 알았다.

태오의 눈이 봉투 위의 로고를 확인했다.

태경호텔.

그는 잠시 서류를 바라보다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계약, 당신 겁니까.”

서윤의 입술이 굳었다.

“상관없는 일이에요.”

“최종 승인자가 접니다.”

“알아요.”

태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알면서 진행했습니까?”

“제가 맡은 일이고, 제 실력으로 따낸 계약이에요. 차태오 씨와는 관계없습니다.”

“관계없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요?”

서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혼하자고 했으니 계약도 막으시게요?”

태오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이 그를 찔렀다는 걸, 서윤은 알았다. 그는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적어도 예전의 차태오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길목을 틀어막는 일쯤은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사람.

태오는 느리게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믿으라는 말인가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카운터 위의 계약서에서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 계약은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왜요.”

“당신 일이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오는 그녀를 보았다. 시선이 이전보다 낮아져 있었다. 내려다보는 눈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한서윤 씨의 능력으로 따낸 일이라면, 내 감정 때문에 망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 정도는 압니다.”

서윤은 그 말을 의심했다.

의심하면서도,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싫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가 주세요.”

태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코트 안쪽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검은색 무광 명함이었다.

서윤은 받지 않았다.

태오는 명함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계약 관련해서는 담당 팀장이 연락할 겁니다. 나는 빠지겠습니다.”

“정말요?”

“그래야 당신이 불편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이 낯설었다.

태오가 누군가의 불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서윤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런 척하지 마세요.”

태오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척이라도 하겠습니다.”

서윤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낮게 말했다.

“하다 보면, 언젠가 진짜가 될지도 모르니까.”

심장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서윤은 곧 손끝에 힘을 주었다. 작업대 위의 꽃가위가 차갑게 손바닥에 닿았다.

태오는 뒤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가 잠시 멈췄다. 유리문에 비친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젯밤.”

그가 말했다.

“차를 마시지 않은 게 후회됐습니다.”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달라졌을까요?”

태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정직해서, 서윤은 더 미워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마.”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때의 나는 그래도 몰랐을 겁니다.”

서윤의 손이 멈췄다.

태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후회합니다.”

문이 열렸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태오가 나갔다.

서윤은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남긴 명함은 카운터 위에 그대로 있었다. 차태오.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검은 종이 위에 박혀 있었다.

서윤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버리려 했다.

하지만 쓰레기통 앞에서 손이 멈췄다.

결국 그녀는 명함을 서랍 안에 넣었다.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태경호텔 담당 팀장이었다.

서윤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한서윤입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어딘가 딱딱했다.

“대표님, 오늘 오후 세 시에 최종 미팅 가능하실까요?”

“네. 가능합니다.”

“장소는 태경호텔 본관입니다.”

서윤의 손끝이 멈췄다.

태오가 빠지겠다고 했다.

그러면 괜찮을 것이다. 이건 일이다. 그녀가 자신의 실력으로 따낸 일.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서윤은 작업대 위의 꽃들을 다시 정리했다. 손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계속 불안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오후 세 시.

태경호텔 본관 21층 회의실.

서윤은 계약서를 들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담당 팀장과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한 인사, 준비된 커피, 가지런히 놓인 서류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때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서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들어온 사람은 차태오가 아니었다.

강유라였다.

흰 수트 차림의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차가운 미소였다.

“오랜만이에요, 한서윤 씨.”

서윤의 손에 들린 계약서 끝이 아주 조금 구겨졌다.

담당 팀장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강유라 이사님께서 이번 프로젝트 공동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시게 됐습니다.”

강유라는 서윤의 빈 왼손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이제는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는 회의실 상석에 앉으며 천천히 서류를 펼쳤다.

“그런데 이 계약, 조금 곤란하네요.”

회의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굳었다.

서윤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무슨 뜻이죠?”

강유라의 손끝이 계약서 첫 장을 가볍게 두드렸다.

“태경호텔 입점 브랜드는 이미지가 중요하거든요. 사생활 리스크가 있으면 곤란해요.”

서윤의 심장이 한 번 내려앉았다.

강유라는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를테면, 계약 결혼과 이혼 같은 것들.”

순간 회의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태오와 서윤, 양가의 극소수, 그리고 법무팀.

그런데 강유라가 알고 있었다.

서윤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손끝은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이 프로젝트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강유라는 웃었다.

“상관있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 순간, 회의실 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입 다물어.”

서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차태오가 서 있었다.

그는 강유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직 서윤만 보고 있었다.

마치 이번에는, 늦지 않겠다는 듯이.

태오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서윤의 옆에 섰다.

“이 프로젝트 최종 승인자는 나입니다.”

강유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태오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한서윤 대표의 사생활을 문제 삼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이 회의실에서 나가게 될 겁니다.”

서윤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차가웠다.

하지만 처음이었다.

차태오가 모두의 앞에서 그녀의 편에 선 것은.

그때 태오가 아주 낮게, 서윤에게만 들릴 만큼 말했다.

“이번엔 안 늦겠습니다.”

서윤의 심장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담당 팀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

“본부장님.”

태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말해.”

팀장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기사 초안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차태오 본부장님과 한서윤 대표님의 계약 결혼 의혹입니다.”

서윤의 손에서 계약서가 미끄러졌다.

종이가 바닥에 흩어졌다.

강유라가 조용히 웃었다.

태오의 얼굴이, 그 순간 완전히 굳었다.

이번 폭풍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세상 밖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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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에야 남편이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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