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그날 저녁 고진아는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거실로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우한결이 눈에 들어왔다.
'일에 열중할 때의 남자가 가장 매력적이다.' 고진아는 이 말이 진짜라고 믿었다. 오늘 일에 상처 받았지만 그를 보자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하지만 우한결이 검정색 라운지 웨어를 입고 있는 걸 보니 다시 침실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금세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낮에는 너무 민망하고 분하여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유명 배우이자 가수였던 조이진이었다.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고진아가 무척 좋아하고 응원했던 연예인이었다.
방금 조이진이 SNS에서 사진을 뿌렸는데, 사진 속에서 그녀가 입은 라운지 웨어가 최근에 삼촌이 입은 옷과 같은 브랜드였다.
아! 나의 짝사랑 상대와 우상이 그렇고 그런...
두 사람은 함께 사는 건 아니었지만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같은 스타일의 라운지 웨어를 입고 있었다.
삼촌이 누나 스타일의 여성을 선호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조이진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고, 많은 남성 팬을 지니고 있었다.
고진아는 비록 제법 인기가 있었지만 전체 분위기는 순수하고 담백하여 조이진과 완전 다른 스타일이었다.
가슴 한 켠이 쓰라렸다.
외적으로도 우한결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우한결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우한결은 건너편 소파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여기 와 앉아."
고진아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폴더 하나를 내밀었다. "서명은 왜 안 했어?"
펜을 잡은 고진아는 화제를 돌렸다. "조이진이 삼촌 여자친구예요? 그 여자랑 결혼하게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소파에 나른히 몸을 기댔다. "아까는 반응이 왜 그렇게 큰 거야? 요즘 TV에 그런 장면 다 나오지 않나? 네 나이가 몇인데? 알 거 다 알 텐데."
자신을 놀리는 듯한 남자의 미소에 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고진아는 펜을 꽉 쥐었다.
자신의 성생활을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 걸 보면 자신을 조카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조이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고 애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듯한 그의 모습에 아직 조이진이 여기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곧 결혼 할지도...
"숙모 생기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찌르는 그의 질문에 고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모...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녀는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은 우한결의 연인이 되고 싶었다.
씁쓸한 시선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서명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출국은 두 달 뒤야.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내일은 시간 내서 본가에 인사 드리러 오고."
가까스로 인사를 한 고진아는 막 눈물이 쏟아 나올까 봐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고진아가 자리를 뜨자마자 그는 안경을 벗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한편 그녀의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이런 저런 괴로운 생각들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결국 몸을 일으켜 가장 자리에 걸쳐 앉았다.
순간 눈을 반짝이며 시선이 옷장으로 향했다.
얼마 전 곽아남과 함께 쇼핑을 하다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란제리 원피스를 하나 구입했던 기억이 났다.
우한결은 정말 그녀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걸까?
어차피 떠날 마당에 한 번 질러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실패하더라도 해외로 가버리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