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허준혁은 순간 자리에 멈칫했다.
그는 서지안의 입에서 이렇게 단호한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항상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사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몸을 심하게 떨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위해 진유나에게 여러 번 수혈을 해줬다.
허준혁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지안을 쳐다봤다. "그럼…"
"지안 언니…"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진유나가 갑자기 말을 가로채며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 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죽기를 바라는 거예요?"
서지안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진유나를 내려다봤다. 악독하고 편협한 이 여자의 연기력은 일등이었다. 매번 허준혁을 속여 넘겼으니 말이다.
어쩌면… 허준혁은 기꺼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지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수혈해 줄 사람한테서 수혈을 받으면 되지. 어쨋든지 난 더 이상 너한테 수혈해 주지 않을 거야."
진유나는 허준혁의 팔짱을 끼고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혁 오빠, 언니가 저한테 죽으라고 저주하네요. 제가 엄마와 함께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요?"
진유나의 엄마는 허준혁을 구하기 위해 중환자실에 누워 5년이 지난 지금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허준혁은 진유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를 각별히 아꼈다.
진유나는 그 점을 이용해 매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엄마를 언급했다.
허준혁은 매번 그녀의 편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진유나가 엄마를 언급하자 허준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5년 전, 트럭이 통제 불능 상태로 달려오는 순간, 진정숙이 그를 밀쳐내고 자신이 트럭 바퀴 아래에 쓰러진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몸 아래로 피가 흥건하게 번져 있었으니…
하지만 서지안은…
허준혁이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지안의 마음속에 희망이 피어 올랐다.
단 한 번이라도.
허준혁이 그녀의 편에 서줬으면 했다.
그러면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지안아, 유나한테 한 번만 더 수혈해 주면 안 될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할게." 허준혁이 그녀를 올려다보자 검은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피어 올랐던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지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바보 같아.'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니 말이다.
그는 매번 똑같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매번 그의 이익을 저울질한 후 버려지는 사람이었다.
진유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지안을 돌아보면서 눈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안 언니, 이번에도 언니가 저한테 수혈을 해줘야겠네요. 정말 고마워요."
서지안은 진유나를 흘깃 쳐다봤다.
'허준혁은 진유나한테 정말 잘해주는구나…'
그녀는 허준혁이 천천히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평소와 다름없는 차갑고 무관심한 태도로 그녀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평생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서지안은 시선을 거두고 허준혁을 쳐다봤다. "난 진유나한테 수혈해 주지 않아."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서지안의 눈빛이 너무나도 무관심해 그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서지안을 처음 만났을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날, 그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햇살보다 더 눈부셨다.
언제부터 그녀는 웃지 않게 된 걸까?
"어떡해요? 지안 언니가 저한테 수혈해 주지 않으면 저 죽을지도 몰라요." 진유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허준혁을 쳐다봤다. "준혁 오빠, 오빠가 우리 엄마한테 저를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허준혁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을 찾아 수혈해 줄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진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허준혁을 쳐다봤다. "만약 찾지 못하면 어떡해요? 지안 언니는 저한테 수혈을 여러 번 해줬고, 혈액형도 일치하고, 부작용도 없는데 왜 다른 사람을 찾는 거예요?"
허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유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좋아요. 오빠가 저를 돌보지 않으면, 저는 이모를 찾아갈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울면서 병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왕미정이 진유나의 부축을 받고 병실에서 나왔다.
방금 잠에서 깬 왕미정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유나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왕미정은 서지안을 쳐다보는 눈빛에 비난이 가득했다.
"준혁아, 유나를 괴롭히지 마. 유나 엄마는 너를 구하기 위해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야. 지금 지안이가 유나한테 수혈을 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게다가 여러 번 수혈을 해줬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유나가 지금 당장 수혈을 받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허준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제가 지금 당장 다른 사람을 찾겠다고 했잖아요. 혈액 창고에도 혈액이 있으니, 꼭 지안이의 혈액을 뽑을 필요는 없어요."
"이모, 준혁 오빠는 저를 아끼지 않고 지안 언니만 아끼는 것 같아요." 진유나는 서지안도 끌어들였다.
왕미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허준혁은 무표정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서지안을 돌아봤다. "지안아, 유나한테 수혈 좀 해줄 수 있을까? 이모가 부탁할게."
서지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진유나가 고집을 부릴 때마다 양보하는 사람은 항상 그녀였다.
그리고 미래의 시어머니인 왕미정은 매번 그녀를 억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가 먼저 다가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왕미정을 처음 만난 날이 5년 전 겨울 방학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막 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느 날 밤, 학교에 너무 늦게 돌아온 그녀는 술에 취한 남자에 의해 어두운 골목으로 끌려갔다. 위급한 순간,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그녀를 구해줬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가슴에 칼에 베인 것을 똑똑히 보았다.
퇴원 후, 그녀는 허준혁의 몸에서 그 칼자국을 발견했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는 그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기뻐했다.
그가 그녀에게 차갑게 대할수록, 그녀는 더욱 그를 쫓아다녔다.
그녀는 법학과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이었지만, 체면도 버리고 그를 쫓아다녔다.
그 후 겨울 방학, 한 달이라는 긴 방학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가족들 몰래 기차표를 사서 그를 만나러 갔다.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 자란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고생이라곤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허준혁을 찾아갔을 때, 그는 누군가에게 바닥에 짓눌려 있었다.
"이 자식아, 왜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산에 늑대가 있다고 했잖아. 손 아주머니가 늑대한테 물린 거 못 봤어? 지금 산에 올라가는 건, 그냥 죽으러 가는 거야!"
"네 엄마도 아마 늑대를 만났을지도 모라.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
마을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허준혁은 바닥에 짓눌려 얼굴에 흙이 묻어 있었고, 몸에는 풀이 묻어 있었다.
그는 산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미쳐 날뛰는 야수와 같았다.
"그만해요!" 서지안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허준혁을 짓누르고 있는 두 남자를 밀쳐냈다.
"어디서 온 계집애야? 귀찮게 굴지 마. 우리는 이 자식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곧 해가 질 텐데, 지금 산에 올라가면 늑대 밥이 될 거야!"
허준혁은 바닥에 앉아 손을 꼭 움켜쥐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해가 지기 전에 산에 올라가서 찾아보는 게 어때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잖아요!"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늑대를 만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방해하지 마세요!" 서지안은 허준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자. 내가 이모를 찾아줄게."
허준혁은 바닥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봤다.
"가자!"
서지안은 허준혁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
"허준혁, 걱정하지 마. 내가 아주머니를 찾아줄게." 서지안은 심호흡을 하고 어둡고 위험한 앞을 똑바로 쳐다봤다. 두려움에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격려했다.
"아주머니를 찾으면, 우리 함께 태권도와 격투기를 배우자. 그러면 아무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막을 순 없어."
조금 전, 허준혁이 바닥에 짓눌려 있는 모습은 서지안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때야 비로소 항상 오만하고 잘난 허준혁에게도 무력하고 인간다운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빛나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존재여야 했다.
하늘은 그들의 편이었다.
해가 완전히 어두워지는 무렵, 그들은 다행히도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기 직전인 왕미정을 발견했다.
그녀는 늑대를 만나지 않았고, 그저 넘어졌을 뿐이었다. 나뭇가지가 그녀의 다리를 찔러 피를 많이 흘린 것이다.
허준혁은 당장 그녀를 등에 업고 산을 내려갔다.
서지안은 왕미정이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허준혁에게 그녀를 실망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고,
사람도 변했다.
그런 왕미정이 지금 그녀에게 다른 사람한테 수혈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